百濟는 얼마나 강대했는가. 高句麗는 百濟軍에 대항하기 위해 거란(契丹), 靺鞨을 속민으로 삼아 이들을 百濟와의 전투에 투입(濊貊族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날조사라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해야 했을 정도이다. 百濟가 인구 밀집지역을 다 차지하자, 高句麗에게는 嘉陵江에서 浿水(漢水)까지를 제외하면, 蒙古高原, 중가리아분지, 大興安嶺山脈 이북, 시베리아, 타클라마칸사막(塔克拉阿汗沙漠)에 오르도스(鄂爾多斯),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 등만 남았다. 지켜야 할 땅은 크고 병력은 적었다. 百濟가 백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을 당시, 高句麗는 병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高句麗가 동북아를 계속 보유할 수 있었을까. 高句麗의 동북아 영토라고 해봐야 大興安嶺山脈 이북이다. 인구저밀 지역이다. 그 땅의 주민으로는 수비병력이 충족되지 않는다. 병력수요를 줄이기 위해서도 高句麗는 동북아를 포기해야 한다. 동북아 전체가 百濟의 영토였음은 黑龍江에서 관측한 新羅 일식기록 으로도 알 수 있다. 新羅는 大震國과 남북으로 百濟 영토(그런데 新羅는 大興安嶺山脈 이북을 빼앗지 않았다. 新羅는 高句麗, 百濟 멸망 후 내부적으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또한 新羅와 大震國은 위계서열이 명확했다)를 나눠가졌다.
高句麗가 동북아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이 3 세기 까지이다. 남아 있는 일식기록이 얼마 되지 않으나, 4 세기 이전에 동북아를 포기 했다고 추정된다. 이 결단이 주효해서 廣開土境好太皇에 이르러 百濟를 굴복시킨 것이다.
遼西와 黃山江 중, 상류를 상실했을 당시도 百濟의 전력은 막강했다. 중국 동부 해안과 동북아가 百濟 영토였다. 高句麗가 百濟, 新羅의 공격을 받았다면, 百濟 역시 高句麗, 新羅의 공격을 받았다. 그런데도 高句麗는 百濟의 침공을 견디다 못해 오르도스 남방한계선에다 長城을 쌓았다.
▲ 삼국시대의_지명
대만(臺灣)은 대마도(大馬島)에서 바꾼 지명이다.
中土의 지명을 중국대륙에 이어 동아시아로 밀어냈을 때, 中土의 지명만으로는 지명을 다 채울 수 없어서, 그 중 한 가지 수법으로 동음의 한자로 바꾸었다.
揚子江 북안, 三峽(싼샤) 서쪽의 白帝城도 百濟城을 바꾼 지명이다. 白帝城은 揚子江 이남에서 밀린 지명이다.
中國倭가 日本으로 이주하면서 九州, 對馬島라는 지명도 함께 가져갔다.
3 세기 중반에 이르면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 있던 鮮卑까지 中土로 침입해 합세하고 4 세기에는 中土가 여러 이민족의 각축장으로 변한다. 이른바 5 胡 16 國 시대에 匈奴, 갈(羯), 鮮卑, 저(氐), 강(羌)의 5胡가 잇달아 나라를 세우기 바쁘다. 이때 靺鞨이 세력 다툼에서 졌던 것이다.
中土에서 밀려나 사막 지대를 거쳐 이동하던 靺鞨 일부를 高句麗가 받아들여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에 이주시키고 百濟와의 전투에 동원했다. 나머지는 黑水로 가서 黑水靺鞨이 되었다.
靺鞨이 新羅를 공격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날조사 에서는 新羅와 百濟를 韓半島 남부에 동서로 집어 넣었으니까, 靺鞨을 북부에 갖다 놓으면, 양국을 다 공격할 수 있다지만, 중국 대륙은 넓다. 중국 남부에 新羅와 百濟가 동서로 위치 했지만,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의 靺鞨이 黃山江(揚子江) 하류의 新羅를 공격할 수 있는가. 靺鞨兵 따위를 高句麗의 핵심 요충지인 浿西 지방에 주둔시킬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皇龍寺 9 층탑에 관한 三國遺史도 날조됐다. 皇龍寺九層塔에는 층마다 이렇게 적혀 있다고 했다. 1층은 왜(倭),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靺鞨,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穢貊)(新羅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龍寺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層穢貊 三國遺史)
皇龍寺塔은 643 년에 세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643 년에는 중국 대륙에 나라가 넷 뿐이었고, 新羅는 확실한 강국이었다. 그래서 漢水(黃河)유역도 차지한 것이고, 25 년 후엔 三國도 통일했다.
皇龍寺九層塔은 新羅가 힘이 없어 자주 침략하는 적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라, 新羅가 중국 대륙을 통일 하고자 하는 야심에서 세운 건축물이다. 皇龍寺九層塔을 세운 시기는 新羅가 黃山江 이남으로 밀려나기 전인 504 년 이전이다. 그래도 伽倻와 東夫餘가 추가될 뿐이다. 中土와 中土 밖의 거란, 穢貊을 포함해도 여덟이다. 隋, 唐 이전에는 中土가 분할되어 있었지만, 中土가 가치 있는 땅과는 한참 멀다. 일일이 中土의 小國들을 새겨 정복의지를 다질 가치가 없다. 中土를 세분할 가치는 없으나, 2 분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른바 中土의 南北朝 때, 中土를 토착민의 나라와 이민족의 나라로 구분 했다면 정복대상이 아홉 나라가 된다.
643 년에는 倭가 대륙에서 밀려나 海上에 있었다. 日本이 날조한 628 년부터 709 년까지의 일식기록이 新羅日蝕이다. 이 당시 중국 남부도 新羅 영토였던 것이다. 倭 영토 아래이다. 高句麗 영토를 획득했을 정도니까, 倭쯤이야 그 전에 정복했다.
탁라(托羅)는 탐라(耽羅) 이전의 이름일 것이다. 1 층에 왜(倭)가 있는데, 다시 4 층에 托羅라 새겼으니까 托羅는 날조 하면서 끼워 넣은 것이다. 5 세기에 세운 塔을 643 년에 세웠다고 했으니까 나라가 부족했던 것이다. 2 층 中華는 朱元璋이 붙인 이름이고, 그 당시에는 中奴 혹은 華夏라고 불렀다. 어쨌거나 中奴는 唐이다. 唐은 新羅의 속국 이니까 643 년은 절대 아니다. 3층 吳越이라 함은 나라이름이 아니고, 이른바 中土 동부에 있던 華夏의 나라이다. 그렇다면 2 층은 中土의 서부에 있던 만맥(蠻貊)을 새겼다.
5 세기 당시 靺鞨은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에 있었다. 高句麗만 정복하면 자연히 新羅의 속민이 되는 종족이다. 新羅는 靺鞨이 高句麗의 속민인 것이 그리도 부러웠단 말인가. 두 번씩이나 써놓게? 9 층 穢貊은 靺鞨이 아니라고 날조하기 위해 집어넣은 것이다. 7 층은 단국(丹國)을 거란이라 하는데, 이 당시 거란은 高句麗의 속민이었다.
5 층 응유(鷹遊)가 百濟의 별칭이라는 주장이 있다. “먼저 夫餘와 沸流를 들었고 다음으로는 尸羅, 高禮, 南北沃沮, 濊, 貊, 응(鷹)이 있었다. 이들 여러 임금이 누구의 후손인가를 묻는다면, 世系는 역시 檀君 에서부터 이어져 있으니......”(제왕운기)에서 응(鷹)이 百濟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應은 朝鮮의 제후국이다. 百濟는 朝鮮의 계승국이다. 百濟는 기원전 18 년에 건국했고, 朝鮮은 기원전 425 년에 大夫餘로 국호를 바꿨다. 大夫餘를 朝鮮에 포함 시켜도 기원전 239 년에는 北夫餘가 건국했다. 濊貊을 집어 넣으면서 百濟를 지웠다. 皇龍寺九層塔의 9 층에는 百殘이라고 적혀 있었다.
8 층의 여적(女狄)은 고구려(高句麗)다. 女는 麗에서 음을 빌려온 것이다. 우리나라 책을 베낀 孟子에 어진 것을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했다. 狄 역시 賊에서 음을 빌려온 것이다. 高句麗를 정복케 해달라고 빌고 있다는 사실이 高句麗에 알려지면 당장 정벌을 받게 된다. 이 당시 高句麗는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다. 그래서 음만 빌려 적은 것이다.
女狄이라 맨 처음 부른 나라는 百濟다. 물론 百濟는 麗賊이라 했다. 高句麗도 百濟를 비칭으로 불렀다. 백잔(百殘)이라고. 의로움을 해치는 것을 殘이라 했다.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보면, 百濟皇帝를 잔주(殘主)라고 불렀다. 百濟는 당연히 高句麗 皇帝를 적주(賊主)라고 불렀다. 후발주자 新羅는 애써 비칭을 만드느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高句麗 武烈帝(高宮)를 두고 “태어나면서 부터 눈을 뜨고 보았다. ...... 장성하자 과연 흉학하여 자주 노략질을 했다(其曾祖名宮生能開目視......及長大果凶虐數寇鈔 三國志 魏書).”고 한 것은 百濟다. 中奴는 그런 말을 할 주제도 못되었다. 그러니까 증오의 감정이지, 공포심 하고는 전혀 상관없다. 물론 高句麗도 百濟 皇帝에 대해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百濟를 韓半島의 소국으로 축소하다 보니까, 악담도 지워야 했다. 百濟 황제에 대한 악담도 버리지는 않고 高句麗 황제에 배당했을 것이다.
遼西가 高句麗에게 돌아 왔지만, 병력수요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百濟는 漢水 하류와 중류 방향에서 수시로 공격해왔고, 이제는 국력이 신장된 新羅마저 高句麗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隋, 唐은 新羅편에 붙었다.
大震國 때도 濊貊族은 高句麗人과 섞여 살지 못하고 柴達木盆地로 내쫓겼다. 大震國 멸망을 기화로 西鴨綠江 이동으로 내려 왔다가, 高麗 太祖 王建에 의해 遼西로, 光宗에 의해 柴達木盆地로 내쫓겼다. 金汗을 세우게 되는 熟女眞은 거란이 아니라, 高麗의 지배를 받았다. 아무리 오지라 해도 자국 영토에서 나라를 세우는 것을 대제국 高麗가 용납할 리 없다. 熟女眞은 中土로 이동하여 金汗을 세웠던 것이다.
不毛의 고산지대가 隋, 唐의 영토다. 그 옛날, 그곳에는 313 만 3800 명을 전쟁에 동원할 인구가 절대 살 수 없었다. 양광(楊廣)이 隋를 지배할 때, 4600 만 명이 살았다고?
高句麗의 인구가 멸망 당시 고작 69 만호 였다고? 戶當 인구를 5 명으로 계산하면 345 만명 밖에 안된다. 高句麗의 강역과 비교하면, 완전히 텅텅 빈 셈이다. 물론 고원지대나 사막 지대가 꽤 있었지만, 중국 남부 절반이 새로운 高句麗 강역이다. “丁酉 24 년(B.C. 24) 柳花夫人이 돌아가셨다. 高句麗는 호위병 수만으로 卒本으로 모셔와 皇太后의 예로 장사지냈다(丁酉二十四年柳花夫人薨高句麗以衛兵數萬葬于卒本命以皇太后禮 迦葉原夫餘紀)”고 했다. 高句麗 인구가 69 만명(高鄒牟는 기원전 사람 이지만, 아직 百濟가 분리되지 않았으니까, 7 세기와 인구가 비슷할 것이다)이면, 高句麗의 병력을 전부 동원해 柳花夫人의 시신을 옮겼다는 소리다. 高句麗에는 전투병력은 없고 호위병만 있다는 소리다. 高句麗를 방어하는 병력이 하나도 없는데, 後漢이 그 호기를 이용하지 않고 속국으로 살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檀君世紀 및 檀奇古史에는 기원전 1666 년 인구가 1 억 8 천만 명 이었다고 나온다. 기원전 1666 년에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에 1 억 8 천만 명이 살고 있었다고 보기엔 이후의 병력동원 규모(5 천에서 많아야 수만 명)나 한 지역의 인구가 너무 적다. 檀君世紀 및 檀奇古史 이전의 책을 필사 하면서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1 천 8 백만 명쯤이 아닐까. 朝鮮時代에는 전쟁도 별로 없었던 평화로운 시대라 2 천 여년 후에 동아시아의 인구가 10 배쯤 늘었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다.
▲ 4 세기의 삼국 배치도
504 년, 백제는 요서와 양자강 이남을 상실, 고구려 땅이 된다. 375 년 신라는 현 양자강에서 현 대마도를 거쳐 한반도 현 김해에 상륙작전을 펼쳤다.
三國 말기 新羅는 高句麗에 버금가는 국력 이었다. 무엇보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베꼈다는 점에서 4600 만명은 三國 중 한 나라의 인구다. 高句麗의 인구라 날조한 69 만호나 百濟 인구라 날조한 76 만호가 隋의 인구다. 사람들은 高句麗가 百濟보다 컸다고 알고 있지만, 마지막 250 년 동안만 그랬다. 5 백여 년간 百濟가 高句麗 보다 더 큰 나라였다. 그래서 明은 高句麗 69 만호에, 百濟 76 만호로 날조했다. 그러나 날조 역사를 써놓고 보니까, 百濟는 내내 소국 이었다. 그래서 李氏朝鮮이 날조비를 새길 때는 百濟의 인구를 36 만호라 날조한 것이다.
隋가 高隋戰爭에 동원했다는 313 만 3800 명은 隋의 총인구에 육박한다. 그러나 이것은 통상적인 계산이고, 中土가 모계사회라는 점을 계산해 넣어야 한다. 다수의 여자와 다수의 남자가 혼인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가구당 가족수를 5 명씩 계산하면, 中奴는 15 명 이상 이었다는 결론이다. 따라서 中奴의 가구수는 69 만호에 불과하지만, 실제 인구수는 1 천만 명을 넘었을 것이다.
隋의 인구가 4600 만인데 반해 高句麗의 인구가 345 만명 밖에 안됐다면, 高句麗를 멸망시키지 못한 隋와 唐은 무능해도 이만저만 무능한 것이 아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얘기다.
313 만 3800 명은 어디서 나온 숫자일까. 3 백만도 아니고, 313 만 3800 명이다. 순수창작은 없다고 했다. 隋에 배당된 내용을 보면, 전투병력은 113 만 3800 명이고, 나머지는 오늘날의 보급부대에 해당한다.
新羅가 高句麗와의 전쟁에 동원한 숫자일까. 新羅는 水軍으로 浿水를 거슬러 가서 공격했다. 물론 唐을 능가하는 육군도 동원 했겠지만, 한단고기에 百濟와 高句麗는 백만 병력을 보유 했다고 나오지만 新羅는 아니다. 물론 唐의 속국으로 둔갑 시켰으니, 백만 대군을 동원 했다고 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新羅는 三國統一 후 29 년 만에 신생 大震國에게 高句麗 古土와 百濟 고토 절반을 빼앗긴다. 新羅 땅에서 평로치청(平盧淄靑)까지 건국한다. 명백히 新羅가 무력의 뒷받침으로 三國을 통일한 것은 아니었다.
百濟가 313 만 3800 명을 동원 하고도 高句麗를 정복하지 못했을까. 百濟는 영토가 넓은 이상으로 高句麗, 新羅와 국경을 접하는 곳이 많아서 수비해야 할 곳이 많았다. 전투병을 백만이나 동원 했다면, 百濟 영토를 수비하는 병력까지 합쳐서 최소한 백 수십만 명 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百濟가 백만 대군을 거느린 것은 전성기였다. 313 만 3800 명을 동원한 것은 高句麗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이 동아시아를 정복할 당시 高句麗는 黃山江(揚子江) 이북에서 시베리아까지, 嘉陵江에서 浿水까지의 땅을 가진 절대 크지 않은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313 만 3800 명을 동원할 수는 없다. 百濟가 드넓은 땅을 수비하다 보니까, 高句麗는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할 수 있어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313 만 3800 명을 전투에 동원한 것은 文咨好太烈帝다. 이 당시 高句麗가 백만 강병을 유지한 이유가 뭘까. 文咨好太烈帝 12 년(504), “百濟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보내 공격하여 遼西와 晉平郡 등을 취하고 百濟郡을 폐하였다(百濟不貢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百濟郡廢 高句麗國本紀).”는 간단한 기사가 간단한 전쟁으로 끝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文咨好太烈帝 12 년에 新羅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겼다(十二年移新羅民於泉州 太白逸史)." 이 말은 百濟가 遼西도, 黃山江 이남도, 浿水 유역도 다 상실했다는 뜻이다. 이전 까지는 新羅 영토가 高句麗 영토와 직접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高句麗는 新羅의 백성을 옮길 수가 없었다.
“江南에는 월주(越州)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이 있었다. 문자제(文咨帝) 明治 11 년 11 월에 이르러 越州를 공격하여 취하고, 관공서의 郡縣을 고쳐 松江 회계(會稽) 吳越 左越 山越 泉州라 했다 12 년 新羅의 백성을 泉州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江南有越州其屬縣一曰山陰二曰山越三曰左越至文咨帝明治十一年十一月攻取越州改署郡縣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十二年移新羅民於泉州以實之是歲以百濟不貢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百濟郡廢 高句麗國本紀).”
新羅의 金城 武漢을 방치하고 揚子江 이남의 新羅 땅을 공격할 리가 없다. 高句麗가 越州를 취했다면서 그 땅의 일부를 新羅 수도로 삼았다고? 新羅人이 옮겨간 泉州는 원래 新羅 땅이었고, 高句麗가 차지하지도 않았다. 越州에 山越 左越이 있는데, 또 다시 署郡縣에 山越, 左越을 만들었다는 것도 이상하다. 越州의 속현에는 山越 左越이 없었던 것이다.
越州는 百濟 땅이다. 高句麗는 揚子江 이남의 百濟 땅을 침공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越州가 高句麗軍에 함락된 것이 明治 11 년 11 월 이었다. 越州의 함락으로 百濟는 黃山江 이남을 완전히 상실했다.
新羅는 黃山江 이남으로 수도를 옮겼다면서 新羅보다 고위도에 있는 東夫餘와 揚子江 하류에 있던 伽倻를 내버려둘 리가 없다. 文咨好太烈帝는 東夫餘와 伽倻를 병합했다. 이들 나라는 소국이라 옮겨갈 땅이 없었다. 文咨好太烈帝는 百濟와의 전쟁에 승리해, 遼西와 黃山江 중, 상류 이남, 浿水 유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新羅의 수도를 江南으로 옮기고, 東夫餘, 伽倻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文咨好太烈帝는 明治라고 개원하였다. 11 년 齊 魯 吳 越의 땅은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文咨好太烈帝改元明治十一年齊魯吳越之地屬我至是國疆漸大 高句麗國本紀).” 中土의 齊 魯 吳 越 땅은 百濟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高句麗가 遼西와 黃山江 이남을 차지하자, 百濟 영토는 漢水 이북으로 줄어들고, 百濟의 지배를 받던 中土도 高句麗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太白逸史는 李氏朝鮮 중기에 찬한 책이다. 李陌은 날조사와 실사가 모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것이 實史 인지는 알지 못했다. 어떻게든 實史를 남겨놓기 위해 날조사와 실사를 섞어 편집했던 것이다.
百濟와 결전을 벌이기 위해 文咨好太烈帝는 백만 강병이 필요했다. 이때 百濟는 영토 절반을 상실했고, 두 번 다시는 강대국의 위용을 되찾을 수 없었다.
浿帶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百濟와 新羅가 밀려난 浿帶는 高句麗가 독차지했다. 浿水 유역은 平壤城 공격의 출발지점이자, 百濟의 江南 땅 회복을 위한 선결조건이라 高句麗의 방어력이 집중된 곳이었다. 江南에서 新羅는 전방위로 진출할 수 있었는데 반해, 百濟는 공격대상이 浿水 유역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新羅에게 倭는 손쉬운 공격대상 이었다. 같은 高句麗 땅이라도 新羅는 江南에서 비교적 수월하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지만, 百濟는 浿水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해야 했다.
雪上加霜으로 新羅가 武漢을 도로 회복하고 浿水 하류를 차지하자, 百濟의 浿帶 진출은 더욱 어려워졌다. 浿帶를 확보한다고 해도, 일정한 넓이가 되어야 유지가 가능한데, 浿水 하류는 新羅 땅이고, 浿水 중, 상류는 高句麗 땅이었다. 한쪽을 공략 하자니, 수도에서 가까워 전력이 집중되어 있고, 중간지점을 공략하면, 양쪽으로 부터 반격을 받게 된다.
浿帶는 언제나 三國이 최우선적으로 차지해야 하는 땅이었다. 高句麗와 新羅에 있어서 西鴨綠江과 漢水는 영토 확장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확보할 땅이었고, 浿水는 국가안보를 위해 확보해야 하는 땅이었다. 百濟에게 있어서도 都城이 있는 漢水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浿帶 확보가 전제조건이다. 浿帶는 三國時代(列國時代)를 통털어 최대의 격전장 이었던 것이다.
百濟는 浿帶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浿帶 진출에 노력한 결과 중국 동해안은 확보했다. 그래서 百濟는 漢水 하류를 3 분의 2를 상실한 말기에도 중국 동해안은 확보하고 있었다.
隋 때 즉 7 세기 초에 4600 만명이 있었다고 날조 했지만, 4600 만명에 이른 것은 文咨好太烈帝 12 년, 즉 6 세기 초였다. 4600 만명은 百濟에게서 嘉陵江 이서와 揚子江 중, 상류 이남을 획득한 직후의 高句麗 인구일까. 전쟁 전에 高句麗는 嘉陵江에서 漢水 사이, 중가리아 분지 및 타림분지, 그리고 몽고고원과 시베리아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인구밀도가 극히 낮다. 이 당시 4600 만명이고, 嘉陵江 이서와 揚子江 중, 상류 이남을 획득한 덕에 인구가 증가 했다면, 隋나라의 인구가 1 억 이라고 날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전에는 高句麗의 인구가 2 천만 명을 약간 상회할 것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의 정복의 대가로 땅을 가져가지 않는 대신 百濟는 엄청난 인구를 빼앗겼다.
百萬强兵은 高句麗 인구의 5% 에 해당하고, 313 만 3800 명은 15.7% 에 해당한다. 엄청나게 높은 수치이다. 그러나 文咨好太烈帝 때 高句麗는 분명히 백만강병을 유지했다. 313 만 3800 명을 전쟁에 동원한 것도 高句麗다. 단 인구의 5% 를 병력으로 투입하고, 15.7% 를 전쟁에 동원한 것은 극히 단기간 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高句麗는 인구가 배로 늘었기 때문이다. 504 년 百濟와의 전쟁에서 패했다면, 高句麗는 멸망에 직면했다.
三國 末期 百濟의 인구 76 만호는 高句麗 69 만호에 맞추어 날조한 수치이다. 韓半島의 平壤城(?)을 두고 42 년간 연인원 400 만명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역사스페셜 4권). 高句麗의 인구가 69 만호에 불과 하다면서 城 하나 쌓는데, 연인원 400 만명을 동원할 수 있는가. 高句麗에 성이 하나 뿐인가. 더구나 韓半島의 平壤城(?)은 高句麗의 皇城이 아니라 百濟 王城 이었다. 연인원 수백만 명을 동원한 나라는 百濟의 諸侯國이었던 것이다.
百濟는 4 세기 까지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 이었다. 百濟 때문에 高句麗는 揚子江 이남으로 진출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揚子江 중, 상류 이남과 嘉陵江 이서에 黃河 하류와 동북아를 가진 6 세기 초 百濟의 인구는 얼마여야 하는가. 4600 만명이다. 504 년 이전에 高句麗가 2 천만 명이나 인구를 보유했다(2 천만 명을 보유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百濟에 맞설 수가 없다)는 것은 그 당시 로서는 嘉陵江과 浿水 사이의 인구 밀도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百濟가 이 전쟁에서 병력을 얼마나 투입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백만 명을 투입했다고 해도 인구 대비 2.17% 이다. 高句麗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이다. 그러나 百濟는 高句麗에 의해 병력 규모를 제한 당하고 있었다. “新羅 매금(寐錦) 百濟 어하라(於瑕羅)와 남쪽 平壤에서 만나 납공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다(與新羅寐錦百濟於瑕羅會于南平壤約定納貢戌兵之數).” 는 太白逸史의 기사는 長壽弘濟好太烈帝 때 얘기다. 長壽弘濟好太烈帝에 의해 蓋鹵帝가 살해 당했으니 百濟가 더 이상 高句麗의 간섭을 따르지 않았겠지만, 504 년의 전쟁에 백만 명의 병력을 동원 했다면 百濟의 병력이 백 수십만 명이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高句麗가 인구의 15.7% 에 해당하는 313 만 3800 명을 百濟와의 전쟁에 투입한 것은 허세를 부린 것이 아니라, 그 정도는 되어야 百濟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504 년의 麗濟戰爭에서 500 만 이상이 격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신라왕경도(?)
隋가 新羅편에 붙었다는 것은 百濟가 黃山江 이남을 상실해 제3의 국가로 떨어졌다는 뜻이다. 百濟가 黃山江 이남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동아시아 제1의 대국 이었고, 新羅는 제3의 나라밖에 안됐다. 隋와, 唐은 高句麗의 영토를 통과해서 新羅에 조공하러 갔다. 唐은 高句麗가 黃山江 물길을 막아 新羅에 조공을 바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소연한 것이다. 조공 받겠다고 국운을 걸고 싸울 수는 없으니, 新羅는 唐에 高句麗와 화친하라 지시한 것이다.
“이 해에 양견(楊堅)은 또 양량(楊諒) 왕세적(王世績) 등 30 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纔) 定州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遼澤)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물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구(周羅緱)는 병력을 모아 등주(登州)에 웅거하여 전함 수백 척을 징집시켜 동래(東萊)로 부터 배를 띄워 平壤으로 향하다가 高句麗에 발각되어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항하며 나아가다가, 홀연히 큰 바람을 만나서 (隋의) 전군이 물에 떠다니는 판에 百濟가 隋나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가 되려 하다가 高句麗의 밀서(密諭)를 받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是歲遣又堅楊諒王世績等三十萬來與戰纔定州未至遼澤値水亂而饋轉杜絶癘疫幷熾周羅緱以兵據登州徵集戰艦數百自東萊泛船趣平壤爲我所覺殿而拒之以進忽遭大風而全軍漂沒時百濟請隋爲軍導受我密諭而未果).”는 太白逸史의 기사는 주라구(周羅緱) 이후는 날조다. 周羅緱는 周羅侯의 오자가 아닐까.
598 년 (여름) 6 월 (丙寅) (隋나라 煬帝가) 조서를 내려 [高句麗]왕의 관작을 낮추었다. 漢王 량(諒)의 군사가 림유관에 나가자, 장마비를 만나, 식량의 수송이 계속되지 못하여 군중에는 양식이 떨어졌고, 또 유행병을 만났다. 주라후(周羅侯)는 동래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달려오는데, 역시 폭풍을 만나 배가 많이 표류하고 가라앉기도 하였다. 가을 9 월 [己丑]에 군사들이 돌아가는데 죽은 자가 열에 아홉이나 되었다. [高句麗]왕도 또한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를 올리어 '遼東 똥덩어리(자신을 비하하는 말)의 신하 아무개'라고 일컬으니, (隋나라 煬帝)[임금]는 이에 군사를 철회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그리고 『三國史記』에서는 "주라후"라는 글이 갑짜기 나와서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지만, 『資治通鑑』에는 그 앞의 날에 왜 그런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해두고 있다.
즉, "(598 년 2 월) 乙巳日 漢王 량(諒)과 왕세적(王世績)으로 원수를 삼아 수군, 육군 30 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高句麗를 토벌케 했다.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고경(高檠)을 한왕장사(漢王長史)로 삼고, 주라후(周羅緱)를 수군총관으로 삼았다(乙巳, 以漢王諒, 王世績幷爲行軍元帥, 將水陸三十萬伐高麗, 以尙書左僕射高檠爲漢王長史, 周羅緱爲水軍摠管)."는 말이 있다.
이로 보면 분명히 『三國史記』는 『資治通鑑』의 내용을 보고 썼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더구나 『三國史記』의 이 문장은 高句麗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隋나라의 군사들의 활동을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은 고구려 로서는 그런 내용이 상관이 없으며, 알 수도 없는 것이기에 隋나라의 역사이다.
그리고 "귀환(歸還)"이라는 글 앞에는 『자치통감』에서는 추가할 글이 없어도 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분명 그 주어가 '수나라 군사'이므로 "隋軍"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야 옳다. 이런 실수는 분명 『자치통감』의 글을 베껴 쓴 데서 빚어진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문제가 되는 문장은 "동래에서 평양성으로 갔다"는 말에서 대륙의 산동성에서 한반도 평양성으로 배를 타고 건넜을 것이라고도 생각 될 수 있지만, 그 방향이 일단 적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기서 서쪽으로 黃河를 타고 갈 수도 없지 않기도 하다. 최두환밍은 후자의 입장에 서있다.
이런 글을 볼 때마다, 『삼국사기』는 어느 시기엔가 일괄적으로 하나의 대본을 가지고 각각으로 나눈 역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그 정도로 밖에 쓰지 않았다면, 그동안 매우 유식하고 훌륭한 문장가였다는 인물평에 대하여, 참으로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최두환)
百濟는 504 년에 遼西와 黃山江 이남을 상실했다. 隋의 군대가 平壤으로 가려 해도 百濟가 인도해줄 수가 없었다. 平壤으로 진격하던 隋軍은 隋나라 군이 아니라, 新羅軍이다. 百濟는 이미 浿水 유역도, 漢水 유역(동해안은 보유하고 있었다)도 상실 했음으로 新羅軍 조차 인도해줄 수 없었다. 百濟는 新羅와도 사이가 나빠, 서로 침공하기 일쑤였다. 공동의 적 高句麗를 침공하는 일이라 해도, 연합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新羅가 못 미더운 隋와 唐을 끌어들여야 했던 것이다.
4 천만명을 상회(7 세기 초에는 또 증가했다)하는 인구를 가진 대제국 高句麗가 어째서 隋, 唐을 멸망시키지 못했던가. 唐은 소국이라 高句麗 혼자서 충분히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唐을 치러 군대를 보낸 사이, 新羅가 高句麗를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이미 국력이 엇비슷하고 新羅도 동아시아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高句麗가 隋, 唐을 정복하지 못한 것은 新羅 때문이지, 隋, 唐의 국력이 강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1 차 高新戰爭은 645 년에 있었다. 太白逸史에는 李世民이 참패한 후 “산서(山西), 하북(河北), 산동(山東), 강좌(江左)가 모조리 高句麗에 속하게 되었다(山西河北山東江左悉屬於我)”고 했다. “이에 高句麗는 百濟와 더불어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遼西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百濟가 영유하던 곳은 遼西의 晉平(是高句麗與百濟外競俱存遼西地有百濟所領曰遼西晉平)"이라 했다. 그런데 이 글 아래에는 文咨好太烈帝 12 년에 “百濟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보내 공격하여 遼西와 晉平郡 등을 취하고 百濟郡을 폐하였다(百濟不貢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百濟郡廢)”는 기사가 있다. 文咨好太烈帝 12 년은 504 년이다. 文咨好太烈帝가 百濟郡을 폐하고도 百濟가 여전히 遼西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날조 1 차 高唐戰爭에 근거해 쓴 글이다.
山西省, 河北省, 山東省은 현대지명이다. 山西省, 河北省, 山東省이라 열거한 데서도 알 수 있다. 티벳고원 북부에서는 河北, 山西, 山東 순으로 있었다. 河北은 金沙江 너머를 가리키던 지명이다. 北平이 山西와 河北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 이라는 날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山西도 金沙江 끄트머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중국 행정구역처럼 河北이 山西와 山東 사이에 끼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예전에는 河北 지방이 山西지방 왼쪽에 있었다.
高句麗가 취한 땅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는데, 山西省 河北省 山東省을 얻음으로써 遼西에 있게 되었다고 했다. 山西省 河北省 山東省이 遼西라는 것이다. 桑乾河가 遼水였을 당시의 날조사를 보고 쓴 것임을 알려준다.
太白逸史의 기사는 날조 역사와 실사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李陌 자신도 뭐가 진실인지 몰라서 두 가지 다 쓰기로 했던 것이다. 모순된 내용을 연달아 쓰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현 사학계 에서는 高隋戰爭, 高唐戰爭을 文明大戰이라 부르지만, 절대 아니다. 隋와 唐이 미개국이었기 때문이다. 隋와 唐이 문명국이면, 濊貊族과 匈奴도 문명대국이다. 文明大戰을 벌인 것은 三國이다. 高隋, 高唐戰爭의 실체는 新羅, 高句麗의 전쟁이다.
◀ 금휴개 복원 사진
李世民이 高句麗를 침략할 때, 百濟에서 바친 금휴개(金髹鎧 : 검게 옻칠을 한 황금 갑옷)를 입고 있었다고? 文明大國의 황제가 남부끄럽게 남의 나라 갑옷이나 입고 전쟁터로 나갔다고? 李世民이 皇帝가 아니니까, 唐이 문명대국이 아니니까, 남의 나라 갑옷을 걸치고 전투를 해야 했다.
李世民은 新羅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천하고 작은 생선 唐은 변변한 갑옷조차 만들 능력이 없었다. 자신의 말을 잘 듣는 李世民이 죽으면 안되니까, 唐이 망하면 高句麗 편에 붙는 나라가 들어설지 모르니까, 新羅 皇帝가 갑옷을 하사한 것이다. 金髹鎧는 꿈 같은 소리이고, 新羅將軍이 입는 갑옷을 하사했다.
新羅는 李世民을 어느 정도로 대우해 주었을까. 명백히 金庾信보다 두, 세 단계 아래다. 金庾信은 新羅 皇帝에 맞먹는 지위를 누렸다. 金庾信이 죽었을 때, 新羅 황제가 내린 고취악대는 백 명이 아니라 천 명 이었다. 李世民은 新羅 황제에게 여자도 진상(新羅 황제가 안받았다)하고, 제 아들을 新羅 황제의 근위병으로 보내고, 唐의 복식도 新羅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인물이다.
大帝國 高句麗의 안시성(安市城) 성주가 고구려에 패해서 도주하는 타칭 皇帝(唐王은 존속 당시 皇帝를 참칭하지 못했다. 明이 역사날조 하면서 붙여준 것이다) 오랑캐에게 절을 했다고? 李世民도 아닌, 朱元璋의 희망사항이었다. 패주하는 李世民이 잘 싸웠노라고 安市城 성주에게 비단을 하사 했다고? 그런 쪼그라진 나라라서 전쟁에 패할 것을 염려해 언제나 비단을 갖고 다녔던가? 李世民은 安市城 城主 양만춘(楊萬春)이 쏜 화살에 왼쪽 눈을 맞자, 병사들 틈에 끼어 쥐새끼 마냥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걸 두고 비단을 하사 했다고 왜곡할 정도면, 나머지 역사 기술이야 얼마나 왜곡 했을지 뻔하지 않은가.
水經注에 보면, 遼水가 桑乾河라고 되어 있다. 이때 벌써 遼水가 桑乾河 라면, 隋, 唐은 중국 대륙 전체를 빙 둘러서 桑乾河로 갔다가 되돌아 오면서 長安城으로 쳐들어 갔다는 소리다. 百濟 영토 桑乾河를 경유해서 高句麗로 침입 했다는 소리다.
水經注가 北魏가 만든 河川志라고? 北魏는 386 년에서 534 년까지 존속한 나라이다. 高句麗가 존속할 때, 세워지고 망한 나라다. 北魏가 어떤 나라인가? 한 마디로 비참 그 자체인 나라였다. 高句麗 여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로 王妃로 삼고 高句麗 皇帝가 붕어할 때마다 高句麗 영토 근처까지 나가 高句麗를 바라보며 애도의식을 올리던 티벳고원 북부의 한 줌을 차지한 미개 소국이다.
水經注란 水經에다 주(注)를 붙인 책이다.
水經은 3 세기경에 쓴 작자불명의 책이고, 水經注는 水經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3 세기에 썼다는 水經은 百濟人이, 北魏 사람이 썼다고 날조당한 水經注는 高句麗人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3 세기는 百濟가, 5 세기에는 高句麗가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10 세기 경부터 水經注 일부가 분실 되었다? 18 세기 이래 淸이 보정 작업을 한다면서 왜곡역사에 맞춰 또 다시 뜯어고치기 위해 한 변명에 불과하다.
중국의 역사왜곡은 明과 淸, 中華民國, 中華人民共和國에서 대대적으로 벌인 국책사업이다. 지금도 3 조원을 들여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明 때부터 한 역사날조가 21 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제국의 모든 것을 모방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며 이제는 우리 조상의 문명과 역사마저 훔치고 있는 저들 중노의 속성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것을 모방하는 짝퉁공화국의 부끄러운 이름이 이제와서 만들어 졌다고 보는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모방과 왜곡의 역사는 중노들의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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