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

백제는 동아시아 제1의 대제국이었다

대동이 2006. 12. 7. 12:04
우리의 자부심 고구려로 알고 있던 나라는 백제였다

우리나라 유적 발굴은 三國이 어디에 위치했다는 날조 역사책에 근거한다. 高句麗 유적을 찾는 데는 新羅 遺蹟과 비교하고, 百濟 遺蹟과 비슷하면 高句麗 遺蹟으로 보는 식이다.

平壤城 유적이라는 大同江과 普通江이 만나는 濕地帶에서 통나무가 대량으로 발견 되었다. 수분을 일정하게 유지해서 부분 침하를 방지하기 위한 공법이라고 한다. 百濟 泗沘城 이라는 곳에서도 통나무와 나뭇가지들이 발굴됐다.



▲ 보통문 : 평양성 중성의 서문으로 보통강 기슭 천리마거리 어구에 있다. 6 세기 중엽에 세워졌고, 그후 고려 이씨조선에 걸쳐 여러 차례 고쳐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해방 후 본래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55 m정도 옮겨 지은 것이라 한다.

중국 대륙에 이어 韓半島까지 三國이 나누지는 않았다. 半島史 대로 韓半島에서 건국한 소국 이라면, 渤海灣에서 중가리아 분지까지 단기간에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高句麗의 일식관측지는 黑龍江 상류다. 高句麗는 大興安嶺山脈 이북을 가졌던 것이다. 大興安嶺山脈 이남은 발해만을 가진 百濟 영토였다.

高句麗가 大興安嶺山脈 이북에서 남으로 침공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大興安嶺山脈 이북은 인구저밀 지역이고, 百濟 땅 大興安嶺山脈 이남은 인구밀집 지역이기 때문에 전력에 있어서 高句麗가 밀렸다. 高句麗가 滿州와 韓半島 북부까지 차지했다고 하면, 韓半島 남부에 간신히 교두보를 마련한 百濟와 新羅를 구축하지 못 했을 리 없다. 이 경우 渤海灣에 있던 百濟는 韓半島를 차지하기 위해 해로침공을 감행해야 한다. 滿州는 百濟 영토였던 것이다. 百濟 泗沘城 (?)과 건축 공법이 똑같은 平壤城(漢城?)은 百濟의 성이었다.

4 세기 전후로 大興安嶺山脈 이북을 상실했을 때 高句麗는 동북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日本 날조역사책에 등장하는 高句麗人(?)은 고작 담징(曇徵 579∼631), 이리지(伊利之) 정도다. 高句麗人들은 열도로 건너가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日本語의 기원은 高句麗語인가.

동북아 남부에 있던 나라는 高句麗가 아니라, 百濟다. 百濟가 列島에 식민지를 세운 4 세기말은 高句麗가 동북아를 상실한 후다. 설령 高句麗人 몇 몇이 列島로 건너갔다고 가정해도, (지배층) 다수가 쓰는 언어가 공용어가 되기 마련이다. 日本은 百濟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었다.

백제라는 나라는 일본에다 혁명적으로 문화를 전해준 스승의 나라다. 불상은 물론이고, 그 밖의 미술, 공예, 학문, 기예에 있어서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 백제라는 지명이나 명칭이 남아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불상을 생각한다, 오카베 이츠코 : 罔部伊都子)

列島에 百濟 식민지, 新羅 식민지가 있었던 사실을 인정하는 학자는 많아도, 高句麗 식민지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日本語는 百濟語에서 변형 되었던 것이다.

平壤城이라 알려진 韓半島의 유적은 百濟의 왕성이다. 平壤城(?)의 연못을 두고 역사스페셜 4 권에서는 ”高句麗 사람들이 산성 건설에 지형조건을 얼마나 잘 이용하고 물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한다. 성을 쌓는데 지형조건을 무시하고 물을 중시하지 않는 나라도 있는가. 攻城戰에서는 성 안의 물이 떨어지면, 제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라 해도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長壽王은 평소 안학궁(安鶴宮)에 있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궁을 떠나 대성산성(大聖山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長壽弘濟好太烈帝가 거주하던 宮은 中國 대륙의 長安에 있었고, 山城도 그 주변에 있었다. 高句麗, 新羅와의 전쟁 속에서 산 百濟다. 百濟 역시 宮・山城 二元體係를 갖추었던 것이다.

韓半島 역시 溫祚 당대부터 百濟 영토였다. 高句麗 영토를 양분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百濟 홀로 동북아에 깊숙이 들어앉을 수도 없는 일. 溫祚는 현 黃河 하류에서 渤海灣, 滿州, 韓半島, 黑龍江 중, 하류에 이르는 高句麗 땅을 챙겼다.

百濟 유적과 비슷한 것의 실체는 百濟 遺跡 이었던 것이다. 新羅가 韓半島를 침공하면서 남부는 곧 전쟁터로 변해버린 탓에 대규모 건축물을 축조할 수 없게 되었다.

百濟는 東아시아의 天子國 朝鮮을 계승한 高句麗에서 분리된 나라라 그들의 기풍도 자연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琉璃明帝 때만 해도 百濟는 침략자의 위치, 高句麗는 방어자의 위치에 있었고, 4 세기 말 이전까지는 百濟의 전력이 高句麗를 능가했기 때문에 百濟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高句麗軍으로 알고 있던 것의 실체는 百濟軍이다. 百濟 백만 대군의 실체이다. 4, 5 세기 부터 三國은 격렬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近肖古帝(百濟 皇帝의 帝號가 近肖古 라던지, 蓋鹵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가 昭烈帝(故國原帝)를 살해하고, 長壽弘濟好太烈帝가 蓋鹵帝를 살해했다. 廣開土境好太皇이 동아시아를 정복하고, 韓半島에서는 新羅가 잠식해 들어왔다.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강자만이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것이 벽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韓半島와 滿州 일대에 걸쳐 이루어진 高句麗 미술은 퉁구스 직계의 북방 기마 유목 민족의 기풍에 한(漢)·위(魏)·진(晉)의 중국 문화를 흡수하였으며, 묘식(墓飾) 예술이나 불교 미술 등은 百濟·新羅·日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韓半島와 滿州에 高句麗 미술은 없다. 우리가 高句麗 미술로 알고 있는 것은 百濟 미술이다. 375 년 이전까지 新羅는 韓半島에 없었다. 日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百濟 미술이다. 한(漢)·위(魏)·진(晉)의 중국 문화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티벳고원 북부의 中奴에게 무슨 고도 문화가 존재할 것인가. 퇴폐적인 性文化만 빼면, 中土는 獨自文化 조차 없다.

퉁구스(Tungus)系? 소위 퉁구스계는 韓半島와 동북아에 분포한다. 漢族으로 둔갑한 滿州族과 滿州族으로 둔갑한 黑水靺鞨만 빼면, 모두 韓民族인 셈이다. 제 민족을 두고 날조사에 따라 靺鞨族, 女眞族, 거란족(契丹族)하고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韓族이 퉁구스계의 집합으로 분류되고 華夏와 거란이 漢族으로 변신한 것에서 보듯 오늘날 중국 대륙의 인종 분류는 믿을 것이 못된다.

遊牧民族이 정말 고도의 문화를 남길 수 있는가. 유목민족은 천막 하나 치고, 그곳에서 기거 하다가, 가축들이 주변의 풀을 다 먹고 나면 그대로 천막 걷어서 다른 장소로 이주하는 민족이다. 그런 민족에게 어떤 美術이 있고, 藝術이 있단 말인가.

蒙古高原도 우리나라 영토이다. 그래서 大震國이 蒙古高原 이북에서 일식관측을 할 수 있었다. 黑龍江 상류 이남, 大興安嶺山脈 이북은 高句麗 영토였다가, 3, 4 세기에 百濟에게 빼앗겼다.

고작 221,336 ㎢의 韓半島에도, 아니 9 만 9373 ㎢의 남한에도 지방차가 존재한다. 東아시아가 우리나라 땅이었던 그 옛날에도 지방차가 존재했다. “그 풍속은 모두다 실제에 임하여 이치를 찾고 일을 계획하여 그것이 옳음을 구함이 같았다(皆其俗就實究理策事而求其是則同也 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우리가 高句麗 미술이라 알고 있던 것은 百濟 미술 중에서도 韓半島와 그 이북 지방의 미술이다.

韓半島에 유주자사(幽州刺史)가 있을 자리는 없다. 幽州는 嘉陵江 너머도 아니고, 岷江(朝鮮時代의 松花江) 너머에 있었다. 幽州刺史 진(鎭)에게 13 개 郡의 太守가 하례를 올리는 벽화가 있는 德興里 고분은 幽州가 韓半島에 있었다는 증거도, 漢四郡이 있었다는 증거도 아니다.

◀ 13 군 태수들이 유주자사에게 인사 드리는 모습 : 연군태수(燕郡太守).범양태수(范陽太守).어양태수(漁陽太守).상곡태수(上谷太守).광령태수(廣寧太守).대군내사(代郡內史).북평태수(北平太守).요서태수(遼西太守).창려태수(昌黎太守).요동태수(遼東太守).현도태수(玄兎太守).낙랑 태수(樂浪太守). 그리고 또 한 명의 태수이다.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게 된 마지막 태수는 帶方太守라는 것을 알 수 있다.13 군이 幽州에 속하며 거느리는 縣은 75 개이고,광계(廣薊)는 幽州刺史의 治所이다.

6 세기 초까지 遼西는 百濟가 지배했다. 梁書에는 “진(晉)나라(265~316) 때 百濟는 遼西에 있었다(晉時百濟有於遼西)”고 했으며 宋書 97 권 百濟傳의 머릿부분에는,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淸나라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州源流考) 에서는 百濟의 도읍이 遼西에 있었다(國都在遼西)고 기록했다. 太白逸史에는 文咨好太烈帝 12 년(明治 12 년 : 504 년)에 “百濟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보내 공격하여 遼西와 晉平郡 등을 취하고 百濟郡을 폐하였다(百濟不貢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百濟郡廢)”고 했다.

안악 3호분(安岳三號墳 357년), 德興里 고분의 피매장자는 遼西를 다스리던 百濟의 관리로서 퇴임 후 韓半島에서 여생을 보냈던 것이다. 동수(冬壽)와 鎭이 노후를 보낼 때만 해도 韓半島는 新羅도 진출하기 전이라, 휴양지 같은 안락한 땅이었다. 물론 이사를 할 때는 중국 대륙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물건들을 다 실어 날랐다. 安岳 3 號墳에 매장된 冬壽는 遼西 太守가, 德興里 고분에 매장된 鎭은 幽州刺史가 최고관직 이었던 것이다.

德興里 고분의 28 수(宿) 동서 위치가 바뀌고, 진파리(眞坡里) 4 號墳이 天口 바깥에서 안쪽을 보고 그린 것은 고분의 피매장자나 고분 벽화 제작자의 취향일 뿐이다. 자신의 것만을 갖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 아닌가.

冬壽는 鮮卑族 출신의 망명객이 아니다. 冬壽는 처음부터 우리나라 사람이다. 高句麗인이 아니라 百濟人이다.

北中國은 처음부터 高句麗의 영토였다. 4 세기 초 鮮卑族 모용씨(慕容氏)가 넘보던 땅은 티벳고원 북부였다. 티벳고원 북부를 놓고 中奴가 鮮卑族 慕容氏와 치열하게 패권을 다툰 것이다. 소위 5胡16國 시대(304~439)에 연(燕:慕容氏)·진(秦:乞伏氏)·양(凉:禿髮氏)을 세우고 북위(北魏:拓跋氏)에 이르러 中土 서부를 통일, 西趙(?)의 기초를 연 것도 鮮卑族이고, 隋, 唐도 鮮卑族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싸움은 高句麗와 하면서 나라는 매번 中土에다 세울 수는 없다.

蒙古高原에서 中土에 나라를 세우자면 그 사이에 있는 高句麗 영토부터 통과해야 한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매번 高句麗를 통과할 수 있을 만치 高句麗의 방위가 엉망이었을까. 우리가 高句麗 군대로 알고 있던 것은 百濟 군대였다. 그러나 그런 百濟軍을 격퇴하고 이윽고 東아시아 패자의 위치에 올라선 나라가 高句麗다.


◀ 온조제 6 년 B.C.13 년 7월 그믐 ... 8월말 실행된 일식위치 : 실행이 되었습니다만, 백제 초기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백제 영역에서는 관측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 좀 더 북쪽이라면 관측이 용이할 것입니다만 ... 어쩌면 백제는 좀 더 북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 뜰 때니까, 어쩌면 제천 행사를 하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네요.

鮮卑族은 타림분지(塔里木盆地) 한 구석에 있다가, 高句麗에 쫓겨 3 세기 중엽 中土 서부로 침입했다. 中奴가 中國 大陸 전체를 차지했다고 역사 날조하자 종이 위에서 시라무렌(西拉木倫) 유역으로 옮겨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鮮卑族 慕容氏 형제 사이의 왕위계승전(실상은 酋長繼承戰)으로 일단의 鮮卑族 무리가 도망친 곳은 中土 동부다.

鮮卑族이 鮮卑山에서 유래한 종족명 이라면서 鮮卑를 어떻게 읽는가 하면, 천하고 작은 생선 이라고 한다. 鮮卑族은 생선 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유목민이다. 노하심(老河深) 고분(이 땅의 사학자들은 東夫餘 古墳이라고 우기는데, 東夫餘는 滿州가 아니라, 淮水 유역에 있었다. 朝鮮의 고분이다)에서 출토된 농기구를 두고 유목민 鮮卑族이 농경생활을 했다고 하더니, 유목민 鮮卑族이 해상생활까지 했다고 우기는가. 대체 언제부터 생선이 산에서 났단 말인가.


▲ 장춘시(長春市) 유수현(楡樹縣) 노하심(老河深)고분 허리띠 장식 앞, 뒷면

원래는 鮮裨族 이었다. 조선비왕(朝鮮裨王)에서 따온 것으로 檀君이 자신의 형제들을 보내 피지배 종족들을 거느리게 한 데서 비롯된 종족명이다(실증 한단고기). 檀君世紀에도, 己未 40 년(B.C. 1622), 15 世 檀帝(代音)의 동생 代心을 南鮮卑의 大人(支配者)으로 삼았다(己未四十年封皇弟代心爲南鮮卑大人)고 했다. 구한(九桓)이 해체된 이후 鮮卑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鮮卑族은 匈奴의 피지배종족 이전에 朝鮮의 被支配種族이다. 鮮卑族은 원래 가진 것이라곤 달랑 천막 하나밖에 없는 유목민이다. 4 세기에는 5胡의 하나였던 鮮卑族이 6 세기에는 隋를 세우는 中土의 어엿한 統一王朝로 변신한다.

唐에 이르면, 천하고 작은 생선 鮮卑族은 중국 최대 판도를 날조하는 中奴 自尊心의 代名詞로 우뚝 선다. 唐이 통일한 것은 티벳고원 북부다. 唐 이전 까지는 티벳고원 북부를 통일한 중국의 王朝가 없었기 때문에 唐에 이르러 중국 최대 판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기원전19 세기 부터 濊貊族이, 기원전 4 백년에는 南凶奴가, 이후 여러 유목민족들이 中土를 침입해 唐에 이르러서야 겨우 中土를 통일했다. 秦도, 漢도 통일국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朝鮮의 계승국 高句麗가 그런 천하고 작은 생선의 무리를 받아들여 太守로 임명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鮮卑族을 천하고 작은 생선이라 불렀던 나라는 鮮卑를 中土로 내쫓은 高句麗다. 中奴는 천하고 작은 생선 鮮卑族 唐이 中奴 역사상 최대판도를 차지 했다고 중국의 자부심으로 삼기에 바쁘다. 그런 중국이 唐의 존속 당시에는 천하고 작은 생선이라 부르며 비하했을 리가 없다. 鮮卑族이나 華夏族이나 피차 똑같은 수준이었다.

“壬申 원년(B.C. 169) 정월 樂浪王 최숭(崔崇)이 곡식 300 섬을 海城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崔崇은 樂浪 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馬韓의 서울 王儉城에 이르니, 이때가 檀君 解慕漱 丙午年(B.C. 195)의 겨울이었다(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 北夫餘紀).”

이미 莫朝鮮(馬韓)이 멸망한 뒤이다. 燕나라의 盧綰이 遼東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浿水로써 경계선을 삼은 己亥 38(B.C. 202)년(己亥三十八年燕盧綰復修遼東古塞東限浿水 北夫與紀) 이전에 莫朝鮮은 멸망했다.

盧綰이 도망가고, 衛滿이 番朝鮮으로 망명 했으니까, 北夫餘는 莫朝鮮의 옛 땅을 탈환했다. 이미 莫朝鮮은 사라졌으니까, 樂浪王 崔崇이 莫朝鮮의 땅을 얻고 싶어 바다를 건너 馬韓의 王儉城으로 온 것이다. 바다는 黃山江(揚子江)이다. 원래 樂浪은 黃山江 이남에서 北으로 莫朝鮮과 접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解慕漱는 莫朝鮮 땅을 崔崇에게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辛酉 원년(B.C .120), 北夫餘 4 世 檀君 高于婁가 西鴨綠(岷江)을 수비토록 발탁한 인물(高辰)을 승진시켜 高句麗侯로 삼았기 때문이다.

樂浪王 최리(崔理)가 好童王子를 만났을 때에 “북쪽나라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三國史記)” 한 것은 樂浪이 岷江 이서 일부[朝鮮, 漢 전쟁 이후 卒本夫餘의 東明帝(高豆莫汗)로 부터 받은 땅이다. 역시 岷江 이서에 있던 帶方, 臨屯, 玄兎는 樂浪 이전에 高句麗에게 멸망 당했다]와 揚子江 상류 이남을 차지하고 高句麗가 岷江 이동 및 揚子江 이북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大武神烈帝 때 樂浪을 멸망시키고, 高句麗는 岷江 이서까지 차지했다. 樂浪이 멸망하자, 高句麗는 漢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닿게 되었다. 하지만 後漢은 高句麗의 속국이니까, 高句麗 武烈帝 3년(AD 55)에 遼西 지역에 10 城을 쌓아 漢나라 군사에 대비할 필요는 없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武烈帝는 百濟의 침략에 대비해서 10 城을 쌓은 것이다.

樂浪을 멸망시킨 것은 大武神烈帝 이고, 遼西에 10 城을 쌓은 것은 高句麗 武烈帝다. 시차가 벌어지는 것은 百濟가 黃山江 이남에서 樂浪 땅부터 잠식하고 西鴨綠江(嘉陵江) 쪽으로 공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高句麗 武烈帝가 10 城을 쌓을 때는 百濟가 西安平을 공략하고 있었다. 高句麗는 끝내 西安平 조차 상실했다.

그래서 美川帝가 311 년에 西安平을, 313 년에는 樂浪을, 314 년에는 帶方을 공략 했다고 날조한 것이다. 梁書에도 晉나라(265 ~ 316) 때 百濟가 遼西에 있었다(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 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梁書 百濟傳)고 했다. 宋書에도 “백제가 요서를 다스릴 때 고구려가 요동을 다스렸다(百濟國本與高麗 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宋書)”고 했다. 樂浪 등을 멸망시킨 것은 高句麗지만, 高句麗는 樂浪 땅은 물론이고 嘉陵江 이서 전체를 百濟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미 멸망한 樂浪, 帶方을 공격했다는 것은 遼西의 百濟를 공격 했다는 말이다.

날조 漢四郡이 있는 番韓을 辰韓에 포갰기 때문에 百濟 땅 遼西를 공략한 美川帝는 날조역사 속에서 高句麗 땅으로 옮겨온 漢四郡을 공략해야 했던 것이다.

319 년 진(晋)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도망와서 이를 핑계로 모용외(募容嵬)가 高句麗를 침범 했다고? 百濟 땅 遼西는 文咨好太烈帝 12 년(504)에 이르러서야 高句麗 영토가 되었다. 平州刺史 崔毖는 百濟人이다.

晉나라(265~ 316) 때 百濟가 遼西에 있었다고 했지만, 504 년 까지는 百濟의 영토가 東아시아 끝에서 끝까지였다. 395 년 高句麗와 浿水에서 싸워 패했을 때, 浿水 유역의 일부를 상실 했으나 여전히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504 년 까지 遼西 지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 鮮卑族 募容嵬는 高句麗를 침범하지 않았다. 鮮卑 자체가 高句麗에 쫓겨 中土로 들어간 보잘 것 없는 유목민이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 高句麗 영토를 넘본단 말인가. 그 전에 막강 百濟軍이 수비하고 있는 遼西 지역부터 침입해야 한다.

高句麗 벽화는 百濟 벽화이고, 따라서 세계의 중심이라는 天下觀은 百濟의 天下觀이다. 百濟 역시 高句麗에서 분리된 나라라 朝鮮의 世界觀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는 高句麗 古墳으로 알려진 다까마스총(高松塚)의 벽화를 보는 순간, 百濟의 古墳群을 떠올렸다고 했다.

아스카(飛鳥)의 다까마쓰총(高松塚)에서 극채색 그림의 남여군상이며 용호 사신상이 발견 되었다. 기사를 보고 순간적으로 생각난 것은 3 년 전 방문했던, 백제의 왕도였던 웅진과 부여의 고분군이다. 특히 공주의 송산리 고분 에서는 극채색의 훌륭한 사신도가 뇌리에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신문의 사진으로는 남녀 군상도의 경우, 안악 장식 고분군에서 대표되는 고구려의 군상벽화가 연상된다. (요미우리 신문, 1972. 3. 30.)

◀ 다카마쓰 고분벽화(부인도) : 안악 장식 고분군에서 대표되는 군상벽화와 유사한 모습이다

다까마스총(高松塚)은 高句麗 고분이 아니라 百濟 고분 이었으니까 당연하다.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가 마지막 예로 든 안악고분(安岳古墳)조차 百濟의 고분이다.

7 세기 후반의 것으로 알려진 나라(奈良)縣 아스카(明日香)村 기토라(キトラ) 고분 천장 별그림의 관측자 위도가 북위 38.4°로 기원전 65 년경의 하늘이다. 이 당시는 백제도 건국하기 전인데, 벌써 천문대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北夫餘 시대에도 韓半島에 천문대가 있었던 것이다.

韓半島의 白頭山은 神市氏가 개천할 당시의 太白山이다. 神人王儉도 神市와 太白山을 辰韓(眞韓)의 영토로 삼기 위해 神誌氏에게 大興安嶺山脈 이북만을 주었다. 乙丑 35 년 처음으로 監星을 두었다(乙丑三十五年始置監星 檀君世紀). 천문대를 설치했다는 말은 고정된 위치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의미다. 韓半島는 기원전 1916 년 혹은 그 직후부터 천문대가 설치되어 줄곧 그 지점에서 천문관측한 까닭에 百濟 諸王(侯王 혹은 裨王)의 王城을 건설한 곳(북위 39°)과 위도차가 생긴 것이다. 新羅가 韓半島를 침공하기 전에는 百濟 諸王의 王城이 韓半島 남부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문대 위치와는 더욱 거리가 벌어진다. 천문관측 지점은 李氏朝鮮 초까지 고정되어 있었다.

기토라 고분 天文圖는 韓半島 독자의 천문도이다. 무용총(舞踊塚)의 26수도 韓半島와 이북의 독자 별자리다. 물론 기토라 고분은 高句麗 고분이 아니라, 百濟 고분이다. 기원전 18 년 이후 高句麗는 韓半島에 없었다. 高句麗는 4 세기 이후 동북아를 상실했다. 韓半島와 滿州에서 고분 벽화를 남긴 것은 百濟였다. 더구나 高句麗人은 列島로 이주하지 않았다.

天文과 曆法에 관한 연구는 인간생활과 직결되어 있어서 오랜 옛날부터 이루어져 왔다. 천문에 관한 기록은 여러 무덤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고구려 벽화고분 95 기 가운데 22 기의 천장에 별들을 선으로 이은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舞踊塚 벽화에는 벽면에 故人의 영생을 상징하는 四神圖와 日月, 천장에 여름 밤 남쪽 하늘에서 관측되는 南斗六星을 비롯한 26수(宿)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高句麗의 천문관서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일자(日者)”라는 천문관련 업무를 담당한 관직명과 高句麗에서 신라로 천문도(天文圖)를 전파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은 高句麗가 고도로 발달된 천문학적 지식을 소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문도 석각본은 원래 평양성에 있었는데, 전란으로 대동강물에 빠져 버렸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인본도 매우 희귀해 졌는데, 成桂가 즉위한 후 그 천문도 印本을 바치는 사람이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 천문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반도 천문도의 성립 시기는 4 세기 후반에서 6 세기 초 사이로 추정 하는데, 여기 그려진 1,464 개의 별이 중국(?)에서 3 세기 초에 만들어진 삼가성도(三家星圖)의 283 자리 1,464 개의 별의 수와 일치한다. 世宗 때의 천문학자 李純之는 그의 『諸家曆象集』에서 중국에서 陳卓이 310 년에 三家星圖에 의해서 처음으로 천문도를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바탕이 된 百濟의 천문도는 4 세기 후반 까지에는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첨문대라면 경주 첨성대(?)만 연상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에도 첨문대는 있었다. 고구려(?) 첨문대는 “世宗實錄地理志” 의 기록에 나타나는데, “平壤城 안에 9 개 사당과 9 개 못(池)이 있는데 9 개 祠堂은 바로 9 가지 별이 날아 들어간 곳이며 이 못 옆에 瞻星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두칠성, 남두육성, 동쌈성, 서쌈성 등 사방위 별자리는 중국에선 보기 힘든 고구려만의 독창적인 천문체계다.(역사스페셜 1권)

기토라 고분에 韓半島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 것은 高句麗 벽화가 아니라 百濟 벽화라는 증거다. 기토라 고분 벽화의 四神圖는 百濟人의 작품이다. 日本書紀에도 高句麗가 아니라, 百濟가 日本(당시는 倭였다)에 天文技術을 전했다고 기록돼 있다. 비록 倭가 배우지는 못했지만.

고지끼(古事記), 니혼쇼키(日本書紀)는 百濟 역사서와 新羅 역사서를 보고 썼다. 百濟, 新羅 역사서 어디에 高句麗人 담징(曇徵)이 와서 종이, 맷돌, 먹, 채색법을 가르쳐주고, 금당벽화(金堂壁畵)를 그렸다고 써 있단 말인가. 百濟, 新羅 역사서 어디에 百濟人 미마지(味摩之)가 高句麗樂(日本은 吳나라 音樂이라고 우긴다)을 전수해 주었다고 적혀 있단 말인가. 百濟, 新羅 역사서 어디에 高句麗人 이리지(伊利之)가 新羅의 牛頭山에서 스사노오노미코도(須佐之男命 : すさのおのみこと)의 신위를 모시고 日本으로 와서 정착했다고 적혀 있단 말인가. 曇徵과 伊利之는 모두 百濟人 이었다. 味摩之는 百濟 음악을 日本에 전수해준 것이다.

李成桂는 東鴨綠江을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으로 날조 했으므로 韓半島 북부와 滿州는 高句麗 영토인 셈이었다. 18 세기 이후 역사왜곡한 日本은 百濟文物 일부를 高句麗의 문물 전수로 돌렸던 것이다.

어째서 日本이 李氏朝鮮을 병탄했을 당시 우리나라 古墳을 다이너마이트로 파괴하고 모조리 盜掘 했겠는가. 日本의 植民地史에 대한 증거인멸 차원 에서였다. 倭奴政府는 우리나라 文化材를 훔치는데 學者들을 동원하고, 이렇게 훔쳐간 文化材 목록을 15 권의 책으로 기록할 정도로 조직적이고 철저하게 日本의 식민지사를 지우려 했다. 고분을 다 도굴해 三國이 韓半島를 나눠가진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없애야 했다. 그래야 이 땅의 사람들이 앞으로도 축소된 三國史를 사실이라 믿을 것이 아닌가. 그래야 日本이 우리나라의 植民地였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다. 그래야 日本이 미개 中國倭를 조상으로 둔 나라라는 사실을 감출 수 있다. 고작 植民地史를 지우려고 그처럼 혈안이 되고, 광분했다. 그러니 그 植民地史가 얼마나 초라한 것이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李成桂와 朱元璋은 동북아 남부에 있는 百濟를 高句麗로 둔갑 시키기로 합의했다. 百濟의 역사 일부를 高句麗 역사로 기술하는 것이다. 百濟는 高句麗에서 갈라진 나라 이므로 高句麗와 비슷 하다고 하면 됐다. 그리고 高句麗, 百濟 역사 대부분은 中奴가 가졌다. 일례로 동맹(東盟)은 百濟의 祭天行事다. 高句麗의 제천행사는 한맹(寒盟이 아니라 漢盟이다)이라 불렀다. 중국은 百濟의 東盟을 高句麗의 제천행사(朝鮮의 蘇塗)로 둔갑시켜 高句麗(朝鮮) 역사에 남긴 다음 ‘귀신을 섬겼다’고 하고, 吳,齊는 가져가서 중국의 풍습으로 날조한 다음 ‘신을 섬겼다’고 했다.

그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百濟人의 인상이 너무나 강렬해서, 누구나 百濟가 高句麗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날조역사 에서는 高句麗의 영토가 韓半島 북부와 그 이북으로 아주 작다는 사실도 간과한 채, 단지 강인함에 매혹된 것이다. 동북아도 유지하지 못하고 韓半島로 축소되자,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역사를 더욱 축소 하면서 그 책임을 전부 우리나라에 전가했다. 倭寇가 설치고 壬辰倭亂이 발발하자, 高麗 시대에는 더했다고 날조했다. 歷史와 疆域이 축소되자, 강인한 百濟人들이 이상적인 인물상으로 다가와 高句麗라고 맹신하게 된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는 北極星, 北斗七星 등이 표시되어 있다. 天象列次分野之圖의 중앙부는 李氏朝鮮이 그린 것이다. 어째서 李成桂는 高句麗의 천문도를 그대로 모사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李氏朝鮮의 天文圖를 만들지 않고, 중앙부만 李氏朝鮮 초의 하늘로 바꾸었는가. 역사날조 차원에서 였다. 百濟의 별자리를 高句麗 천문도와 합성 함으로써 百濟를 高句麗로 둔갑시키기 위해서였다.

天象列次分野之圖 주변부의 관측자 위도는 별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곳(북위 40°)이 아니다. 北緯 40°에 있던 천문대는 泗沘(北京)다. 百濟에서 제작한 天文圖(泗沘)에 百濟 별자리(韓半島)를 합성할 필요는 없다. 高句麗가 중가리아분지와 大興安嶺山脈 이북 에서도 천문관측 했으니까, 북위 40° 오르도스에서 천문관측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天象列次分野之圖 石刻本이 平壤城에 있었고, 大同江(浿水; 漢水)에 빠졌다고 했다. 현 西安에서 관측한 하늘을 그린 것이다.


▲ 천상열차분야지도



天象列次分野之圖 주변부의 관측자 위도 북위 34.3°는 바로 高句麗의 卒本이자, 平壤이다. 朱蒙聖帝가 기원전 26 년 訥見(洛陽)으로 遷都할 때까지 卒本(長安)이 高句麗 수도였다. 427 년 長壽弘濟好太烈帝가 또 다시 平壤(長安)으로 천도했다.

天象列次分野之圖는 原本이 아니다. 도면 안의 별을 모두 포함하기 위해 주변부를 약간 크게 그린 것이 아니라, 李氏朝鮮이 베끼면서 외곽선 근처의 별들을 지웠거나 高句麗가 원래부터 별을 생략했던 것이다.

天象列次分野之圖 주변부가 34.3°에서 관측한 1 세기의 하늘이라는 점에서 長安을 수도로 하지 않을 때도 長安에서 천문관측해 왔음을 알 수 있다. 長安은 고정적인 천문관측 장소였던 것이다.

열차분야지도(列次分野之圖)에서 적도원의 반지름은 222.4 mm이다. 주극원의 반지름이 94 mm이니, 이는 관측자의 위도가 (94/222.4)×90°= 38°임을 뜻한다. 이 위도는 국내성이나 평양과 같은 고구려의 수도들 보다 훨씬 낮은 곳이고, 고려의 수도 개성의 위도 38°나 한양(서울) 경복궁의 위도 37.6°와 매우 가깝다.(천상열차분여지도의 별그림 분석)
(http://astro.snu.ac.kr/%7Ecbp/General/Refer/Hangul/chun.hwp 참조)

韓半島에는 百濟 건국 이전부터 천문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기토라 고분 벽화의 천문도 에서도 알 수 있다. 기토라 고분 천장 별그림의 관측자 위도가 북위 38.4°로 기원전 65 년경의 하늘이다. 天象列次分野之圖는 원본이 아니라, 李氏朝鮮이 베낀 것이므로 적도원의 반지름이나 주극원의 반지름에 다소의 오차가 발생한 것이다. 李成桂는 38.4°에서 관측한 14 세기의 별자리를 天象列次分野之圖 중앙부에 그렸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토라 고분 천장 별그림이나 天象列次分野之圖 중앙부의 별자리는 같은 위치에서 관측한 하늘이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1916 년부터 李氏朝鮮 초까지 3300 년 동안, 다수의 정해진 장소에서 천문관측했던 것이다.

우리가 高句麗의 강역이라 알고 있던 韓半島와 滿州는 百濟 영토지, 高句麗 영토가 아니다. 기원전 65 년의 하늘을 그린 기토라 고분의 별자리가 韓半島(滿州 포함) 별자리라는 사실에서 北斗七星, 南斗六星, 동쌈성, 서쌈성 등 사방위 별자리는 韓半島만의 독창적인 천문체계다(韓半島에 별자리가 등장한 시기는 최소한 5000 년 전이다. 모든 문화가 그러하지만, 별자리도 韓半島에서 시작하여 중국대륙으로 전파 되었던 것이다).
(http://www.life114.info/history/samkuk/%BB%EF%B1%B9%20%BA%B0%C0%DA%B8%AE%BF%CD%20%B0%ED%B4%EB%B9%AE%B8%ED.htm 참조)

韓半島는 줄곧 독자적인 별자리를 고수해 왔으므로 高句麗 天文圖만 구하면 高句麗가 韓半島에 있었다고 간단하게 날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날조를 위해 궁궐 등을 지을 능력은 없었던 李成桂는 天象列次分野之圖 하나를 그려서 天象列次分野之圖와 百濟를 멋지게 바꿔치기한 것이다.

李氏朝鮮 초에도 高句麗, 百濟의 중심지가 있는 중국 대륙과 韓半島의 별자리 체계가 틀리고, 天文用語도 28수, 26수로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만큼 우리나라 역사서는 풍부했다. 유목국가 唐이 高句麗, 百濟 역사서를 분서하고, 거란(契丹)이 大震國 역사서를 분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新羅에는 왜 온돌이 없고, 百濟에는 온돌이 있는가. 겨울 추위가 극심한 滿州가 百濟 영토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新羅 영토 중국 대륙 남동부는 아열대성 기후(亞熱帶性氣候)이다.

소리를 내는 화살 명적(鳴鏑)이 新羅, 伽倻는 물론이고 匈奴의 유물 에서도 발견 된다고? 鳴鏑은 百濟만 만들었다. 날조 역사 속에서 新羅도, 伽倻도 韓半島에 몰아넣고, 匈奴도 오르도스(Ordos)로 옮겨오자, 이들 나라가 다 鳴鏑을 만든 셈이 되었다. 鳴鏑이 오르도스에서 발견되는 것은 高句麗와의 전투시 百濟軍 집결지점의 하나가 漢水(黃河) 중류였기 때문이다. 新羅가 어떻게 鳴鏑을 사용할 것인가. 鳴鏑의 용도가 전투시 신호용 이므로 百濟와의 전투에서 쌍방이 똑같은 소리가 난다. 新羅와 伽倻가 싸울 때도 마찬 가지다.


▲ 중국사서와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지명들의 대륙의 현존지명들



사라사(Sarasa) 염법(染法)이 인도에서 기원해 2 천년 전에 동남아를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 되었고,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高句麗로 들어 왔다고? 高句麗는 중국 대륙에 있었다. 百濟도, 新羅도, 朝鮮도, 배달도 다 중국 대륙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배달 개천만 기원전 3898 년이다. 그런 우리나라가 맨 먼저 옷을 해 입고, 염색을 했겠는가, 인도가 했겠는가. 印度는 朝鮮의 諸侯國 중 하나다. “대저 구한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蓋九桓之族分爲五種以皮膚色 三神五帝本紀)." 그래서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수로왕(首露王)에게 시집왔던 것이다. 사라사 染法은 중국이 제 것이라 날조하지 못한 우리나라 역사의 하나다. 사라사 染法은 朝鮮에서 印度로 건너갔던 것이다.

어째서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 중 제 것이라 날조하지 못한 것이 나왔나. 우선 시간이 촉박 해서였다. 문명대국 明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明 초기에 전 역사를 다 바꿔야 했다. 文明大國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역대 왕조의 찬란한 문화를 전제로 하니까. 5300 년의 역사를 뒤바꾸는 작업이다. 시간이 부족하니까, 우선 高麗 末의 상황부터 해서 正史書를 먼저 바꿨다. 복식 등은 후순위로 밀려난 것이다. 그래서 殷, 周가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殷, 周는 번듯한 옷을 입고, 우리나라가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三國志)“을 뻔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馬韓 사람들은 잠상(蠶桑)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綿布)”는 後漢書, 三國志의 기록도 고치지 못했던 것이다.

中土에는 나라가 엄청나게 많다. 文明大國에서 未開國으로 다시 文明大國으로 이행하는 것은 이상하니까, 年代를 대부분 後代로 밀어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印度 등으로 전파된 연도 아래로 밀어 쓰다 보니까, 印度 등이 개발해서 거꾸로 도입한 꼴이 되었던 것이다. 연대를 밀다 보니까, 殷나라, 夏나라에 배당할 역사가 부족하고, 배당할 역사가 없는 堯, 舜은 理想聖代로 묘사된 것이다.

중국은 神農이 농사의 시조라고 우기지만, 中土의 토착민은 堯가 中土를 다스릴 4300 년 전에도 농사조차 지을 줄 몰랐던 미개인이다. 그래서 后稷이 우리나라에서 곡식과 과일의 종자를 가져다가, 土着民들에게 농사를 가르쳐야 했다. 그런 땅에 음식문화가 있었을리 만무하다. 4700 년 전 慈烏支 한웅이 저 땅을 정복한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거 이주했을 당시에는 짐승이나 잡아먹고 살았다. 그래서 밥 먹는 우리나라 사람보고 모래를 먹었다고 한 것이다. 中奴의 음식문화 조차 우리 것에 기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티벳고원이 차고 건조한 기후라서 기름진 음식으로 변했던 것이다.

티벳고원 북부에서 음식문화가 발전해 봤자,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가. 中奴의 음식문화가 다양해진 것은 朱元璋이 華夏를 이끌고 티벳고원 북부에서 나왔을 때 부터다. 우리나라 음식에 華夏와 濊貊의 음식까지 뒤섞었으니까 다양해질 수밖에. 그래놓고는 중국의 음식문화는 오래 되었다, 秦始王의 입맛을 맞추느라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날조한 것이다.

“밭 가운데 작은 원두막(廬)이 있고 외(瓜)가 열려 있다. 이것으로 정성껏 ‘저(菹)'를 담가 조상께 받치면, 수를 누리고 하늘의 복(祜)을 받는다(中田有廬疆埸有瓜是剝是菹獻之皇祖曾孫壽考受天之祜)”는 詩經의 저(菹)는 김치다. 中土의 음식이 아니고, 우리나라 역사를 베낀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이나 매료된 高句麗人의 실체는 百濟人이다. 百濟人은 당당하고 아름다웠고 자부심도 강했다. 그런데 헤이안(平安) 시대까지의 列島 倭에게서는 어째서 강인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가. 그것은 百濟軍이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戰士였기 때문이다. 원래 百濟人들은 느긋한 천성을 가진 사람들 이었다. 배달과 朝鮮이 그러했듯이.

고분 벽화에서 알려진 百濟人과 미개의 밑바닥을 기는 倭寇로 알려진 日本人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가. 百濟人을 倭奴 그리고 2차 대전 당시의 잔혹한 日本人들과 연결시킬 수 있는가. 日本이 미개와 잔혹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것은 中國倭가 列島로 이주하고 나서 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