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순수비. 이것은 사학자들이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역시 기존의 역사와는 달리 해석됩니다.
진흥왕은 고구려와 돌궐이 10년간에 사활(死活)을 건 대전쟁(大戰爭)을 벌이는 동안 고구려의 남쪽 수비군이 전선으로 투입된 시기를 이용해 고구려의 남쪽 지방을 차지한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은 가르치지 않고, 단지 신라 진흥왕의 적극적인 북진정책과 고구려가 북방의 전쟁으로 남쪽 지방의 군대를 옮겼다고만 하여 역사를 은폐하고 있습니다.
돌궐은 어떤 나라입니까? 이들은 투르크(터어키족, Turk)으로 지금의 서남아시아지방에 자리잡은 민족입니다. 그 민족이 세운 나라로 유명한 나라가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등입니다. 이 중에서 셀주크 투르크는 십자군운동의 원인이 된 나라이기도 합니다. 셀죽 투르크의 뒤를 이어 몽고의 여러 한국을 통합하여, 티무르제국이 등장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다가 그 패권을 다시 오스만 투르크가 이어 받았으며, 당시 이 사람들이 진출한 지역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로, 지금도 이곳은 그 영향으로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사람의 특성도 비슷한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는 분명히 어디엔가 흔적을 남기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돌궐이 중원을 침략한 목적은 분명합니다. 기름진 평원을 차지할 목적, 당시의 중원을 다스리던 국가와 정치적인 마찰을 빚은 경우등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역사대로라면 만주에 위치한 고구려와 서남아시아에 위치한 돌궐이 무슨 정치적 갈등을 심각하게 겪어 10년에 걸친 대전쟁에 돌입하는가? 물론, 갈등을 빚어 수 만 대군을 이끌고 싸울 수는 있지만, 10년간이나 줄기차게 전쟁을 하기에는 너무도 멀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돌궐과 고구려사이에 있는 수많은 나라에서 돌궐의 군대가 진군하고 고구려군대가 진군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자신들의 영토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아래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왼쪽그림의 현재의 역사에서는 도저히 전쟁 자체가 이루워질 수가 없습니다. 오른쪽의 그림과 같은 상황이 되면, 두 나라는 아무런 불편?없이 전쟁을 벌일 수가 있으며, 그 사이에 신라가 고구려의 남쪽을 점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시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중원은 여러 나라로 나뉘어지고, 각 민족의 진출로 역사도 제대로 없는 실정입니다.
더군다나, 만주는 중원보다 기름지지 못한 땅으로 굳이 기름진 중원을 버리고 만주의 땅을 탐내기에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중원(中原)의 주인공은 고구려가 아닌가요? 중원의 고구려와 그 서쪽의 돌궐은 전쟁이 목적을 설명하기에 충분합니다. 참고로 고구려라는 뜻은 "중국(中國)"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참고로 중국어로 고구려(高句麗)는 "가우리"라고 읽습니다. 여기서 "가우"는 가운데 중(中)은 의미하는 우리말이고, "려"는 좋은 옥편을 찾아보면 나라이름 "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고려를 제외하고 이러한 글자를 나라이름에 사용한 나라가 없는 것을 보면 "고구려"라기 보다는 "고구리"가 맞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란 "가우리"라고 읽으며 "가운데 나라"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중국"을 의미하는 우리말인 것입니다. 단지 표기만 한자로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고구려가 당시 중원의 황제국이었다면 돌궐과는 국경을 접하고 있었을 것이고, 기름진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돌궐과 긴 전쟁을 벌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굳이 지리멸렬한 중원의 제국과 전쟁을 하지 않고 고구려와 전쟁을 한 것은 당시 중원을 지배한 것은 고구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국사책은 이러한 역사를 단지 역사속의 의문이라고하여 일반인에게는 가르치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지금의 중국사람과 우리나라 사람은 분명 외관상 구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물론, 조금 구별은 될 때도 있지만, 하지만, 당시 돌궐이었던 투르크(터어키)사람과 중국사람을 비교해 보십시요.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만일 돌궐이 만주까지 진출한 나라였다면 지금의 만주에 터어키사람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는 터어키사람과 구별이 안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역사는 어디엔가 그 흔적을 남기게 마련인 것입니다.
2002년 7월 Upgrade한 내용..
얼마전, 터키사람이 방송에서 나와서 하는 말이(월드컵 특집으로 세계 각국의 풍물을 알아보는 시간이었음) 한국에 와서 풍속이 너무 똑같은 것이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그 예로 결혼식 전에 함을 지고 신부집에 가는 풍속은 터어키와 똑같다고 하는 것을 방영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연히 같을 수도 있겠지만, 과연 돌궐이었던 그들과 지금의 역사대로라면 언제 문화적인 교류를 하였을까 연구를 해 보았으면 합니다.
다음은 2002년 6월 29일자 조선일보 이규태코너에서 게재된 글입니다.
" 이스탄불(터키의 수도)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세관이나 짐꾼으로부터 "야반지"라고 불렸는데, 그때 불쾌감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야반지라는 말이 "야만인(野蠻人)"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 말에 대해 알아보았더니 한자 야만인에서 비롯된 말인 것은 분명하나 그 말에서 미개인이라는 뜻은 사라지고, "외국인"의 통칭이 돼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역사시대에 있어 터키는 자기네가 세계의 중심국가요, 중심문화라는 것을 자부하고 긍지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실크로드를 통해 한문과 한문문화가 많이 유입됐음을 말해주는 것이 되면, 실제로 우리나라말과도 흡사한 말이 아주 많다. 터키말로 "에미"는 우리말의 "어미(母)"요, "아바"는 우리말의 "아비(父)이다. 우리말로 "무당"을 "박수"라 하는데, 터키에서는 "박시"요, "마을"의 터키말은 "마할레"이다. 터키말에서 "여성"의 존댓말이 "하님"인데, 옛날 우리나라에서 하녀를 존칭해서 부를 때,하님이라 했다. 김서방네, 아주머니네-하면 "집"을 뜻하듯이 터키에서도 접미어의 "네"는 "집"을 뜻한다. 터키에샤는 회교사원에 들려면 빗자루로 몸을 쓸어 사귀(邪鬼)를 쫓는데, 이 의식을 "시비알"이라고 한다. 고려사에 보면 왕후가 왕자를 낳았을 때 하객들의 몸을 빗자루로 쓸어 묻어들 사귀를 쫓는 의식을 "설미아(說備兒)"라 했음과 무관하지 않다. 터키에서 하늘을 "탕"이라 하고 하늘에 계신 "천신"은 "탕구니"라 하는데, 행여 우리나라 시조요 천신의 아들인 단군(檀君)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천신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역사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이고, 그들과 우리는 모두 "단군"을 모시던 (아니 같은 단군이 통치하는 나라에 살았던)같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필자註) 그밖에 셈하는 방법도 같고, 어순도 같은 것으로 미루어 한국과 터키는 알타이어의 사촌 어족임이 분명하다. "-끝-
여기까지가 칼럼의 내용이지만, 우리조상의 나라였던 배달국과 단군시대의 조선의 기록에는 수밀이라는 우리의 나라가 있었던 기록이 있습니다. 수밀이국은 세계사에도 널리 알려진 "수메르"문명을 꽃피운 나라를 말합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민족이고, 그들의 후손이 세운 나라인 돌궐과 그 뒤를 이은, 터어키 역시 우리의 형제국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들은 6.25.전쟁을 참여한 것을 비롯하여 아직도 "꼬레"를 형제국으로 여기고 있으나, 우리는 잊고 지내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터어키에서는 한국에서 터어키경기가 펼쳐지도록 배정되자, 한국은 홈구장이나 마찬가지이라는 절대적으로 친근한 감정을 나타내었고, 더군다나 첫경기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한국심판이 배정되자, 이것은 홈경기에 형제국에서 심판을 보니 절대적인 기대를 하였다고 합니다. 터어키교민들이야기로는 적어도 원정경기이지만, 유리하게 아니, 적어도 불리하지는 않게 경기를 할 것으로 전망했으나, 한국심판의 오심등으로 너무도 많은 실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터어키에서는 월드컵 3,4위전이 펼쳐지기 전에 그 경기는 친선경기와 마찬가지라는 평들이 지배적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도 월드컵에서 터어키대표팀을 열렬하게 응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터어키일간지등 언론에서는 그 다음날 보도에서 "이런 한국이라면 또 참전할 수 있다." "한국에서 받은 은혜"," "결코 잊지 않겠다."라면 "꼬레"에 대한 감사함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구려와 돌궐이 비록 전쟁도 하였지만, 이후, 수, 당이 등장하자, 다시 연합하여 대항하는 등 역사적으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6.25 전쟁에서도 "고려"군을 돕기 위해 "돌궐"군이 대거 도움을 주어서, 대륙을 통일한 "공나라(共-지금의 중국(中共))와 맞섰던 것입니다. 후세에 역사가 들이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어려울때 우리를 조건없이 도와줬던 형제국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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