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의 전성기를 이룩한 한 무제를 패퇴시킨 전쟁의 신 대무신왕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한 무제가 침입한 조선은 둘인데, 한서(漢書) 식화지에, "무제가 즉위하고 수 년만에 팽오가 예맥조선(濊貊朝鮮)을 쳐서 창해(滄海)라는 군(君)을 설치했다"고 한 예맥조선이 그 하나요, 사기 조선열전에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을 만들었다"라고 한 조선이 또 하나이다. 뒤의 조선은 곧 조선열전으로 인하여 위씨의 조선(위만조선)이고 앞의 조선은 식화지나 평준서에 간단히 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전기(傳記)에서도 발견되지 않아 종래의 사학자들이 어떤 조선인지를 말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채호 선생의 견해에 의하면 전자의 조선, 즉 예맥조선은 곧 동부여를 가리킨 것이라 한다. 신채호 선생은 위 기사를 한무제가 동부여를 저희 군현(郡縣)이라 하여 고구려와 9년동안 혈전하다가 패하여 물러난 일이 있은 것으로 보았다. 그것에 대해 신채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후한서(後漢書), 예전(濊典)에, "한나라 원삭 원년에 예의 남려왕 등이 모방하여, 우거가 28만 호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와서 항복하여, 한나라에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만들었다"고 하였고, 한서 본기에, "원삭 3년 봄에 창해군을 폐지하였다"고 하였으며, 사기 공손홍전에는, "공손홍이 여러 번 간하여... 창해군을 폐지하고 오로지 삭방만 받들게 하기를 청하여...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고 하였으니, 종래의 학자들은 위 세가지 책을 '예맥조선은 예 임금 날며의 나라로 지금의 강릉이니, 강릉이 당시 우거의 속국으로서 모반하고 한에 항복 했으므로 한이 팽오를 보내어 항복을 받고 그 땅으로써 창해군을 삼았다가, 그 뒤에 땅이 너무나 멀고 비용이 맗이 듦으로 그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라고 단정하였다. 하지만 신채호 선생은 이를 비판하여 원광 원년 창해군 설치의 해는 기원전 134년이요, 원삭 3년 창해군 폐지의 해는 기원전 126년이니, 그러면 한이 동부여를 침략하여 창해군을 만들려는 전쟁이 전후 9년 동안이나 걸쳤으니, 동부여가 만일 우거의 속국이라면 우거가 가서 구원하지 안을 수 없으며, 만일 돌아와 구원하였다고 하면 사기 조선전 만전에 우거의 한에 대한 관계, 요동 동부도위의 공격이며 살해 따위를 다 기록하고서 어찌 이보다 중요한 9년 전쟁의 사실을 빼었느냐? 며 이의를 제기했다. 앞에서 말한 개정한 연대에 의하면 이때는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이니, 남려는 위씨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속국이라는 것이다. 부여가 고구려의 속국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대무신왕) 5년 봄 2월에 왕은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중략) 여름 4월에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 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전에 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그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자 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다. [그는]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국왕(曷思國王)이 되었다. 가을 7월에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선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는데 왕의 동생이 도망쳐 갈사에서 도읍하였다. 나도 역시 불초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가 없다.” 마침내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那部)에 두고,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낙(絡)씨 성을 주었다. (하략) 당시 고구려의 동부여에 대한 압박이 심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원한을 가진 남려는 동남부여와 고구려에 멸망당한 낙랑국의 잔당들과 함께 몰래 우거와 내통하여 고구려를 배척하려 했다가 우거가 고구려보다 미약함을 알고 우거를 버리고 한(漢)에 통하려 한 것이다. 그것을 안 무제는 동부여를 장래의 창해군으로 예정하고, 팽오를 대장으로 삼아 연제-지금의 직예 · 산동(山東) 의 군사와 양식을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싸워 남동부여와 남낙랑 여러 나라를 구원하다가 대무신열제가 이끄는 고구려의 반격이 뜻밖에 강하여 9년동안 혈전을 계속하였는데, 한이 여러번 패하여 창해군을 폐지한다는 말을 핑계로 삼아 군사를 거두어 전쟁을 결말 지은 것이다. 우리 민족 역대 제왕 중 유일하게 신왕(神王)의 칭호를 받은 대무신왕, 그는 한의 최대 전성기를 구축한 한무제에 필적하는 민족 영웅이었고, 동방에서 한나라의 침략세력을 몰아낸 전쟁의 신이었다. 상승의 기세를 타던 한나라군을 패퇴시키고 동이족의 안녕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에게 전쟁의 신을 뜻하는 대무신왕이라는 시호를 받지 않았나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