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사] 일본에서 본 고려제국사 8 ㅣ 이제 양계(兩係)의 분열(分列)을 넘어 통합(統合)의 역사로 나아가야 |
참 오랜만입니다. 한국에 들어오니 글쓰기가 쉽지 않네요. 시간도 없었고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이것저것 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려제국의 역사를 밝히기 위한 발걸음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자 그럼 약속한 대로 제가 이해한 양계론(兩係論)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왜 고려제국을 다루면서 양계론을 언급해야 하는가?” 최근까지 우리 한민족의 나라였던 高麗帝國과 朝鮮帝國[大淸(金)帝國]의 역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양계론(兩係論)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양계론은 황진이 선생께서 정립하신 우리 역사 이해 방법입니다. 우리 민족을 크게 夫餘系와 鮮卑系(朝鮮系)의 양계로 나누어 이 두 세력 간의 대결과 동맹 관계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정립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역사 인식은 비단 황진이 선생만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연일지는 모르나 다물넷(http://www.damool.net)을 운영하고 계신 김산호(金珊瑚) 선생도 이와 비슷한 역사인식을 하고 계십니다. 또한 김운회 교수님도 우리의 역사를 쥬신족(朝鮮族)과 코리족(高麗族, 夫餘族)으로 나누어 이해하고 계십니다. 2300여년전 신시 배달한국(神市 倍達韓國)은 1500여년을 이어간 군장국가(群長國家) 단계에서 현대적 개념의 국가로 거듭나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이때 백두산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 살던 원토족(감족-熊族을 말하며 ‘땅의 신’이라는 뜻)을 지배하던 천산 쥬신족(天山 朝鮮族-이주해 온 기마족으로 배달한국의 지배층)은 새로 이주해 오는 알타이 부여족(夫餘族)의 도전에 직면한다. 배달한국의 지배층인 쥬신족은 원토족인 감족을 아우르기 위해 감족을 도와 부여족을 응징하는데... 한편 배달한국의 커붉단 한웅은 황비로 맞은 감족의 왕녀(熊女)와의 사이에 셋째 황태자인 시조 단군을 보게 된다. 세월이 흘러 소년으로 성장한 단군은 두 형님 황자들의 견제를 피해 감국(熊國)으로 가 외할아버지의 부왕(副王)으로 있으면서 감국의 제 부족들을 통합하여 강력한 나라로 탈바꿈 시킨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여족의 도전을 물리치고 마침내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시조 단군은 배달한국의 황권 도전에 나서고... [출처 : 다물넷(http://www.damool.net) 단군조선 안내] 그럼 이 고대종족의 이름은 왜 쥬신인가. 그 종족명은 크게 코리 계열과 쥬신 계열이 있다. 코리는 이들이 처음 출원한 알타이의 종족명으로 구려, 고리, 고구려, 고려 등으로 전승돼 왔다는 것. 그 어원은 구리 또는 하늘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 쥬신은 조선, 숙신, 식신, 직신, 주신 등으로 한자 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발음은 유사한 형태로 계승돼 왔다는 것이다. 쥬신의 어원은 태양, 아침, 산 등이 복합된 것으로 설명된다. 코리는 한민족 계열에 나타나지만 쥬신은 만주와 한반도에 공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좀 더 포괄적이다. 청을 세운 만주족은 자신들의 종족을 주신(珠申)으로 부르다 훗날 ‘문수보살’의 문수의 발음을 빌려 ‘만주’로 부르기 시작했다. [출처 : 동아일보. “韓- 日- 몽골의 공통된 뿌리는 쥬신족” 2006.03.14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03140076] 물론 두 분과 제가 보는 역사엔 차이가 있습니다. 황진이 선생도 두 분과 다른 역사를 보고 계실 것입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두 분은 백제(百濟) 멸망 이후 일본이 우리 민족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미 밝혔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이르러서야 열도가 고려제국에서 이탈한 것이며 나중에 다루겠지만 그 이탈마저도 영원한 이탈이 아니었습니다. 황제 고려(皇帝 高麗)를 정확히 파악해야 우리 역사를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욕먹을 각오를 하고 보다 사실에 근접한 역사를 찾는 밑걸음이 되고자 이글을 쓰는 것입니다. 양계론은 얼마 전에 막을 내린 드라마 대조영(大祚榮)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드라마가 일부 역사왜곡이 심했던 부분이나 대진국(大震國)이라는 국호에 대해 정확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정식 국호가 발해(渤海)였다고 처리한 부분, 거기다가 발해가 다민족국가였다는 좀 허황된 이야기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양계론의 시각에서 조명할 만한 드라마입니다. 대조영은 변방을 지키던 대중상(大仲象) 장군의 아들입니다. 아울러 대조영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걸사비우(乞四比羽) 장군은 확실히 말갈족(靺鞨族)입니다. 대조영도 책에 따라 말갈족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태왕 고려(太王 高麗)에서 대조영과 걸사비우는 변방세력이었다는 것입니다. 독자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태왕 고려는 夫餘族가 중심이 된 나라입니다. 이는 광개토태왕비에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양계론적 시각에서 보자면 당시 말갈족, 즉 변방세력은 鮮卑系(朝鮮系)였습니다. 즉 중심은 부여계, 변방은 선비계로 구성되어 있었던 나라가 태왕 고려였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보장왕(寶臧王)이 나라가 망하고 나서 고려왕이 아니라 조선왕에 임명된 것은 그가 변방의 땅, 즉 말갈(鮮卑, 朝鮮)의 땅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여계 중심의 태왕 고려가 망한 후,대조영이 세운 대진국은 선비계 중심의 국가입니다. 그러나 대조영이 세운 대진국은 한쪽 계(부여계)만 중심에 있었던 태왕 고려와 달리선비계와 부여계가 통합을 이루었던 나라였습니다. 드라마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조영이 보장왕의 조카인 숙영과 결혼하였는데 이는 선비계 대조영이 태왕 고려세력, 즉 부여계를 적극 포섭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대진국은 선비계 국가이면서도 고려를 국호로도 사용했던 양계가 통합되었던 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대진국은 단군 조선이래 선비계와 부여계가 잘 융합되었던 국가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민족사적 의의를 가진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진국은 부여계를 적극 포섭하였지만 선비계 일부와 갈라서게 됩니다. 선비계인 거란(契丹)과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끝내 대진국에 포섭되기를 거부합니다. 태왕 고려 1000년 동안 변방에 머물렀었는데 선비의 나라가 섬에도 불구하고 부여계가 중앙을 차지하고 있음에 분개한 것입니다. 같은 선비계임에도 대진국과 거란, 그리고 흑수말갈은 이제 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거관과 흑수말갈의 입장에서는 대조영은 부여계와 놀아난 배반자였던 것입니다. 北에서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말갈의 일부가 우리 민족에 통합되었지만 끝내 일부는 갈라섰다고 지적한 바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흑수, 즉 흑룡강까지 대진국이 진출했다는 기록과 함께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후에 흑수말갈은 발해에 강제 합병된 것으로 보입니다. 거란은 끝내 선비계를 배신한 "대조영 선비계"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요(遼)를 세운 다음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같은 선비계 나라였던 대진국을 멸망시켜 버립니다. 그러자 대진국의 "부여계"와 "대조영 선비계"는 부여계 국가였던 皇帝 高麗로 귀의하게 됩니다. 부여계는 거의 다 황제 고려로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선비계 일부는 남게 되는데 이들이 나중에 女眞族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전 글에서 이미 서구의 알파벳 표기를 통해 女眞은 “주신(珠申)”으로 발음되었으며, 주신이 바로 朝鮮이라는 것은 설명 드린 바 있습니다. 김운회 교수님께서도 “淸을 세운 만주족은 자신들의 종족을 주신(珠申)으로 부르다 훗날 ‘문수보살’의 문수의 발음을 빌려 ‘만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지적하신바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皇帝 高麗는 夫餘族가 중심이었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新羅系, 즉 鮮卑系를 적극 포섭해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그러하기에 부여계와 신라계간의 세력 다툼이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나라 안에서는 비록 세력 다툼이 치열했지만 신라계를 적극 포섭해서 나라를 열었기에 후에 신라계 출신 김함보(金函普)가 세운 대김제국(大金帝國)과 평온할 수 있었습니다. 大金帝國은 선비계 나라입니다. "부여계"와 "친부여 선비계(대조영 선비계)"는 이미 다 황제 고려로 이동하였기에 선비계만이 건국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대김제국은 상당히번영을누렸으나곧 부여계 국가였던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그러나 후에 大金帝國은 大淸帝國으로 부활합니다. 몽골족은 원래 거란족에 속해 있던 종족입니다. 서길수 교수님에 의하면 현재 몽골은 자신의 뿌리를 거란에서 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란족은 선비계이며 몽골족은 부여계라는 것입니다. 거란이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될 때 몽골족은 비주류로 거란족에 포섭되어 있었는데 후에 힘이 커지자 반대로 거란족을 몽골족으로 통합시켜 버립니다. 징기스칸이 "고리(Kori, 고려)족의 추장(즉, 부여계)"이었다는 점이나 어머니 후엘룬이 "고려인(부여계)"이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습니다. 아울러 지금의 몽골 북쪽 바이칼 호수를 끼고 부랴티아 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부랴티아는 바로 부여를 뜻합니다. 제가 알기로 몽골과 부랴티아는 통일을 원한다고 합니다. 왜 이 지역에 부여가 있을까요? 추모태왕이 힘을 키운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원래부터 부여세력이 자리 잡았던 곳이고, 동부여에서 도망쳐 온 추모태왕은 이들의 힘을 바탕으로 태왕 고려를 건국하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기에 대원제국(大元帝國)은 같은 형제의 나라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들이 우위에 서고자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부여의 적통을 이어온 고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합니다. 고려가 우리가 아는 그런 비굴했던 나라는 결코 아닙니다. 大元帝國이 망하자 고려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위상을 되찾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렸지만 列島에서 반란이 일어났고(壬辰倭亂), 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엄청난 국력을 소모하게 됩니다. 이 틈을 타서 중원을 장악한 나라가 바로 大淸帝國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이 두 제국, 즉 高麗帝國과 大淸帝國이 아시아를 양분하여 통치해 온 것입니다. 이게 제가 대략 파악한 양계론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질문하나가 떠 오릅니다. "언제 列島가 고려제국에 편입되었을까?"백제(百濟) 멸망 이후 열도는 일본(日本)이라는 독립국이 세워져 우리와 갈라진 것으로 보통 이야기 됩니다. 물론 열도가 짧은 기간 독립국을 유지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 고려에 편입됩니다. 저는 그 시기를 막부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이 양계론이 중요한 이유는 이런 대결 구도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北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大金(淸)帝國 황제와 마찬가지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점은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양계론 시각을 대입해 보면 列島는 夫餘(百濟)이며 半島 북부는 新羅(朝鮮, 金, 淸)인 것입니다. 일본에 있을 때 이 이야기를 몇몇 일본 지인과 나누었는데 그 기가 막힌 역사 전개에 다들 놀라더군요. 지금 중요한 것은 양계(兩係)의 분열(分列)을 넘어 통합(統合)의 역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칸민족은 통합을 이루었을 때 강했고 세계가 평온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후에 쓰겠지만 이 통합이라는 것이 일본의 대한제국 합병과 같은 형태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일본도 그들에 이용당했던 것인데... 아무튼 그러하기에 兩係의 統合을 이루었던 고려제국을 우리는 바로 봐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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