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

백제는 정말 중국을 지배했는가

대동이 2007. 3. 14. 11:42
백제는 정말 중국을 지배했는가? new
조회 (6)
역사를 찾아서|2007/03/13 (화) 11:57
공감 스크랩
한국의 고대사는 미스테리하고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다. 우리 고대사는 쟁점의 논란이 되는 부분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백제의 중국대륙지배인 대륙진출설이 그 중 하나이다. 일찍이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백제가 중국의 요서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그 지역을 직접 경영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부정하는 견해도 많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있어 백제가 저 드넓은 중국대륙을 호령했다는 사실에 은근히 자부심을 느낄만하다. 그렇다면 백제는 정말 중국대륙에 진출했을까?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한국 역사서인 삼국사기가 아니라 중국사서 그것도 남조계열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 게다가 당시 백제가 바다를 건너 요서지역에 군현을 설치할만큼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지 않았다는 점, 백제가 4세기 말 대륙에 진출했던 시기, 요서지방은 선비족의 전연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백제의 대륙진출을 부정한다.

하지만 대륙진출설을 부정하는 견해는 문헌자료를 근거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정적 한계를 갖는다. 그리고 백제는 뛰어난 해양능력을 지닌 해상국가였기에 백제의 대륙진출설은 부정할 수 없다.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濟)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 불렀다"

『북사』 「백제전」

위 기록은 백제의 국명이 왜 백제인지 설명하는 중국사서인 북사 백제전의 기록이다. 위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 백제의 건국주체가 해양능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게다가 북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백제 도성의) 주민은 신라, 고려(고구려), 왜 등이 섞여 있고, 또 중국 사람도 있다"



이 기사는 백제가 외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전개할 정도로 매우 뛰어난 해양술을 지닌 나라라는 것을 입증해준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부정할 수 없는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이러한 내용이 중국측 자료에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삼국사기같은 우리 측 자료에 나오고 다른 자료에 나오지 않았다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처럼 그 사료 가치를 의심받았을 것이다. 중국 측 자료에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는 것은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기록한 중국 측 사료들의 내용을 보자.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소유하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송서』「백제전」

중국 정사 중 하나인 송서는 백제가 요서지역에 진출해 진평군, 진평현을 설치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송나라의 뒤를 이은 남제의 역사서인 남제서는 백제가 중국에서 활동했음을 간접적으로 전해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해(490)에 위(북위)의 오랑캐가 또 다시 기병 수십 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갔다. [이에 백제의]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어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남제서』「백제전」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우리 측 사료인 삼국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백제)를 공격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패배하였다"



이 기사들을 두고 북위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위 남제서 기록은 북위의 군사가 바다를 건넌 수군이 아니라 수십 만에 달하는 기병이라 밝히고 있다. 즉 백제와 북위는 평원에서 맞붙은 것이다.

게다가 북위는 유목민인 선비족이 세운 국가로 바다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으며 해군력도 미약하였다. 실제로 북위가 북중국만 통일하고 전 중국을 통일하지 못한 이유는 수전에 익숙하지 못해 양쯔강을 건너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자강도 건너지 못한 북위의 기병이 저 넓은 서해바다를 건너 백제를 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북위가 고구려의 길을 빌려 백제를 칠 수도 없는 일이다. 당시 고구려는 동방의 강대국으로 그 국력은 북위를 능가하고 있었다. 게다가 북위는 동으로는 고구려, 서로는 토욕혼, 남으로는 남제, 북으로는 유연으로 둘러쌓여 있는 상황이라 바다 건너 백제를 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인 것이다.



"그 나라(백제)는 본래 구려(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였고, 백제 또한 요서, 진평 두 군의 땅에 웅거하면서 차지하고 백제의 군을 설치하였다"『양서』「백제전」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 백제는 진(晉)대부터 요서와 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치통감』



"백제국이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양자강 좌우를 차지하고있었다." 『북사』 「백제전」



"백제국이 양자강 어구의 좌안을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 대에 이르기까지 점령하고 있었고, 후위 때는 중원을 차지했다.『주서』 「백제전」



"금주, 의주, 애훈(중국 동해안 지역) 등지가 다 백제이다."<<만주원류고>>



"원래 백가제해라는 데서 백제라 부르게 되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와 진평두 군을 영유하여 근거지로 삼았으니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이다." 『통전』 「백제전」

"(백제의 영토는) 서로는 월주(양쯔강 연안)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 『구당서』 「백제전」

이렇듯 백제의 중국대륙 지배는 여러 중국사서가 전하고 있다. 그 중 구당서, 자치통감, 통전, 북사, 만주원류고 등의 사서는 북중국 계열의 왕조 또는 그 후예가 남긴 사서이다. 그러니 백제의 중국지배가 남중국 사서에만 보인다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서』 재기 9 기록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한다.

"모용황의 기실참군인 봉유가 간언하였다. "‥‥ 고구려와 백제 및 우문(선비) 우문부와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전쟁으로 인해 강제로 끌려온 자이지 중국인들처럼 의리를 사모하여 온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10만여 호에 이르러 도성을 비좁게 할 정도로 많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큰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이 기사는 4세기 전반 요동과 요서에 걸쳐 자리잡고 있던 모용선비족의 전연과 관계된 기록이다. 당시 고구려, 우문부, 단부등은 모용씨와 접경하던 강력한 적대세력이었다. 위의 기록은 그러한 세력 가운데 백제가 포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가 한반도 서남부에 있었다면 왜 전연의 도성에 백제인이 가득했을까? 이 기사는 백제가 요서지방의 전연과 가까운 지역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것으로 백제의 대륙진출을 사서등을 통해 검증하였다.

백제는 한반도 중,서남부에 자리잡은 나라가 아니었다. 고구려와 함께 저 넓은 중국대륙을 호령한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백제의 멸망으로 우리는 중국을 호령한 옛 선조들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이기 때문이다.
메일 | 인쇄 | 이전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