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

신라는 어떤나라인가?

대동이 2008. 4. 24. 11:38

1. 신라의 조상이 소호 금천씨(小昊金天氏)라 한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六 義慈王篇

新羅人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는 황제(黃帝)의 아들이다.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 BC.2578년)의 후손인 진시황제(秦始皇帝 BC.255년)

의 진(秦)나라는 감숙성(甘肅省) 천수현(天水縣)에 도읍하여

六國(魏 . 韓 . 趙 . 燕 . 楚 .齊)을 통일했다.


2.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의 뿌리이다.

=> 梁書 新羅篇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去之以秦人故. 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有似.



辰韓은 역시 말하자면 秦韓이라고 했다. 서로 거리가 만리(萬里)였다.

진(秦)나라인 진한(秦韓)이 망하자 동쪽으로 (조선,한)유민들이 몰려

와 서야벌(徐耶伐)이 아닌 서야벌(西耶伐)(신라의 첫국명)을 세웠다.


이때 육촌(六村)이 아닌 육부족(六部族)들이,

서쪽에 있는 자들을 정벌하겠다는 뜻으로 서야벌(西耶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진(秦)나라인 진한(秦韓)이 망했기에

다시 별처럼 일어나겠다는 뜻으로 진한(辰韓)이라고도 했다.

신라는 진(秦)나라의 유민들이 세운나라이다.


가 망하여 그 유민들이 마한(馬韓)인 한국(韓國)으로 피난왔으며,

진나라 사람과 마한 사람이 같았다고 했다. => 三國志 辰韓篇


본래 낙랑 사람들의 남은 무리와 진한(秦韓)사람들로 처음 6개국, 그 후

12개 나라로 나누어졌고, 그 중 일부인 육부(六部)의 사람들이 뭉쳐

서야벌(西耶伐)인 신라(新羅)가 되었다.


3. 실크란 신라에서 비롯되었으며, 신라는 실크생산지의 중심지였다.


기신라는 정식국호인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기까지는 약 3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기림이사금 10년에 신라(新羅)를 다시쓰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전

기록에는 신라 라는 국호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신라(新羅)라는 명칭을 쓰기

까지 쓰여졌던 이름들을 나열해보면

걸의식국(乞衣食國), 비집기국(飛集基國), 시라(尸羅), 사라(斯羅),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괴), 계림(鷄林), 서야벌(徐耶伐 또는 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주로사용하던

이름이 모두가 누에치기와 관련지어 부른것이 특이 합니다.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키워 비단을 생산하고 그 교역을 통하여 부자나라가 되기시작하

면서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 근거지는 바로 실크로드의 (요충지) 감숙성 靑海와 金城(지금의 난주) 부근입니다.



신라는 감숙성 난주(금성)에서 시작하여 차츰 세력을 키워 동으로 이동해와

위(魏 220~265 AD.46년간)나라를 삼킵니다.

이때 위(魏 220~265 AD. 46년간)나라는 신라와 백제에 동화

되면서 없어졌습니다.신라는 처음에 고구려 안에서 소국으로 지내다가 차츰 세력을 키워

산동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왔습니다.


4. 신라의 북쪽에 "大漠"(큰사막)이 있었다 =>조선의 지리서인 <택리지>


무지하게 넓은 큰 사막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大漠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동쪽으로 흥안령에서

서쪽으로 천산산맥까지 이르는 사이에 뻗어져 있는 사막을 말한다.


큰 사막을 기록한 <택리지><대동여지전도>

<중국고금지명대사전><산해경>의 내용은 같은 지역을 두고 말한 것임에 분명하다.


5. 순화현은 신라의 근거지다

경주의 위치는 큰사막(大漠) 남쪽 순화현(淳化縣)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 경주편에 의하면, 경주는 별호로 낙랑(樂浪)이라 하며,

낙랑은 순화(淳化)에 정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爲慶州府別號樂浪也 淳化所定』

주목할 것은 두 번째 경주가 순화현(淳化縣)이라는 것이다.

이곳은 고려태조 왕건이 경순왕김부에게 내려준 봉지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八千戶)'가 그 봉호이다.

경주의 위치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바로 위쪽에 있는 순화현(淳化縣)에 있었다.


5. 경주의 어원은 신라가 망하면서 봉토의 명칭으로 유래한다.

즉, 신라의 수도가 아니라 경순왕이 태조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왕건으로부터

동맹(同盟)의 답례로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고 식읍으로 받은 땅에

경주(慶州)라는 이름을 왕건이 내려주었던 것이다.


6. 초기의 신라는 서역에서 건국했으므로 천축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은 본시 다파나국(多婆那國)사람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다파나국(多婆那國)은 다섯천축국의 제후국으로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나옵니다.


그리고 파사니사금(婆娑尼師今)은 유리니사금(儒理尼師今)의 둘째아들이므로 탈해니사

금(脫解尼師今)

과는 처남 매부관계인데 파사(婆娑)의 뜻이 무었입니까?

파사(婆娑)의 뜻은

범어로 婆bha 娑sa 바사 즉, "페르샤" 를 이르는 말이지요.


7.지금 한반도 경주에는 계림도 있고 금성도 있고, 낭산, 명활산,

황룡사, 포석정 등이 마치 영화셋장 처럼 한 곳에 있으니 말이 되겠는가


결론 부터 말하면 신라인이 한반도에 들어오게 된 것은 4~5세기경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알타이/시베리아 문화라고 하는 것이 통칭하여 단군문화인 것입니

다. 즉, 한반도의 스키타이식 유물이나 매장방식 등등은 그 기원이 중앙아시아라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