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

고구려 압록수가 대요하라는 증거

대동이 2007. 10. 2. 15:05
고구려*발해의 압록수가 "대요하"라는 증거
지금 현재 중국 영토에는 "발해만"이라 불리우는 곳이 있다. 그 발해만은 고구려*발해의 압록수 하구와 연결되는 바다를 일컫는다. 압록수의 하구부분에 대해 "발해만"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여진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 식민사학자들(특히 서울대 출신)은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를 축소*왜곡하고 있다.





중국인은 한자를 모른다
중국인은 고구려도 모른다

7) 일곱 번째 증거 (證據7)
[반산현지 盤山縣志] [자치통감 資治通鑑]

[자치통감]에 의하면, 당태종의 침공 때에 개전 초반에 장량(張亮)이 해군으로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했다.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이나 오직 서문으로 오를 수 있었는데 (其城 四面懸絶...唯西門可上) 정명진이 밤에 군사를 이끌고 가고 왕대도가 먼저 올라서 5월 기사일에 함락시켰다. (程名振引兵夜至,副總管 王大度 先登, 5月己巳 拔之) 남녀 팔천을 포로로 잡았고, 총관 구효충에게 군사를 따로 주어서 압록수에 불을 환하게 밝히도록 했다.(分遣 總管丘孝忠 等 燿兵 於鴨淥水)

비사성(卑沙城)이 대련(大連)의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이라고 요동지(遼東志; 1537년)에서부터 주장해왔다. [요동지]도 역사 왜곡을 확실하게 했다. 그러면 비사성을 함락한 날 밤에 압록강에 불밝힐 수 있겠는가? 아니다. 비사성은 대련반도가 절대 아니다. 그러면 지금의 압록강인가? 군신들이 안시성에서 당태종에게 말하기를 장량(張亮)의 수군 군대는 사성(沙城)에 있으니, 부르면 이틀밤(信宿; 兩夜)에 올 것이라고 했다. 안시성에서부터 사성의 장량을 부르러 가고 군대가 배타고 오는데, 단 이틀이면 되는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 될 수 없으니 응당 지금의 요하(遼河)다.

비사성(卑沙城)은 반산현(盤山縣) 사령(沙嶺)에 있던 삼한고성(三韓古城)이다.
[반산현지(盤山縣志)]에 의하면
사령(沙嶺)의 삼한지고성(三韓之古城; 최소한 당나라가 지은 것이 아니다.)은 성주위가 매면 일리(每面一里, 성둘레는 2km)이고, 성문은 서남방에 단 1개가 있었다. (西南隅 一門)
이 대요하 연안의 삼한 고성과 비사성 전투 전황은 일치하는 것이다.
결론은 비사성은 압록강에 있었고 그 압록강은 요하다.

청나라는 요양시(遼陽市)에 팔기목장(八旗牧場)을 두었다.
그 팔기목장 중 하나인 요양시 태자하구(太子河區) 소기가공사(小祁家公社) 방상수자(芳雙樹子) 하리하목장(蛤蜊河牧場)에서
3쾌석비(三快石碑)가 나왔고, 그중 제1쾌 목장비(弟1快 牧場碑)에서 “비사목장 세세거민 영위자뢰 ; 俾斯牧場 世世居民 永爲資賴”라고 했는데 이는 1775년에 기록된 것으로서 “비사목장은 백성들이 세세히 살아온 곳이지만 이제 팔기목장 설치하니까 백성들은 출입하지 마라”는 팔기목장 설치 포고문이었다.
요양시 서쪽 태자하 강안에 대대로 비사 목장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사비성(沙卑城)은 요나라 해주(海州)에 있었다. 요나라 해주는 무순(撫順)에 있었고, 해주가 관할하는 요주(耀州)가 있었는데, 이 사령 고성의 남쪽에 요주성(耀州城)이 남아있다.
장량의 붉 밝히는 비사성의 요병(燿兵)에서 요나라 요주(耀州)가 비롯되는 것이다. 비사성의 비사가 빛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빛성이다. 사비성은 새비사성, 새빛성일 것이다.
비사성은 지금의 요하에 있었고, 그 요하를 당나라는 압록강이라고 불렀다.

8) 여덟 번째 증거 (證據8)

신당서 도리기 新唐書 道里記

지금 압록강이 고구려 때 압록강이 아니라면 뭐라 했을까?

오골강(烏骨江)이라고 했다.

[신당서(新唐書)]에 실린 고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를 본다.


산동반도 등주(登州)에서 배를 타고 북으로 오백리를 가면 요동반도 대련(都里鎭)이고 登州, 東北海行 過 大謝島,龜歆島,淤島,烏湖島三百里 北渡烏湖海 至馬石山東之都里鎭二百里. 대련(都里鎭)에서 동쪽으로 연안을 따라 800리를 가면 오골강이 나온다.
東方海壖 過靑泥浦,桃花浦,杏花浦,石人汪,橐駝灣,烏骨江 八百里

지금 압록강은 고구려 오골강(烏骨江) 이었다. 그러나 오골강도 나중에 역시 압록강이라고도 했다. 서요하 압록수와 구별하여 동압록이라고 했다.

지금 중국에서 고구려 졸본성이라고 지정하고 반도의 속국인들이 경배하고 난리치는 환인(桓仁)의 오녀산성(烏女山城)은 본래 오리고산(烏爾古山)이라고 했는데, 고구려 오골강(烏骨江)의 오골성(烏骨城)이었던 것이다.


9) 아홉 번째 증거 (證據9)

요사지리지 遼史地理志


지금 압록강 주변이 발해 때는 무엇이었는가?

[요사지리지 (遼史地理志)]에 의하면 요나라는 지금 압록강 북쪽에는 개주(開州), 남쪽에는 염주(鹽州)를 두었다.

지금 단동(丹東)의 봉황성(鳳凰城)에 요나라는 개주(開州)와 개원현(開遠縣)을 두었는데, 발해의 동경용원부 경주(慶州)의 이름을 차용하려다가 개주로 고쳐 부른 것이며 경주 부속현이 용원현을 개주 개원현으로 고치기도 했는데 아무튼 이름만 빌린 것이다.

개주(開州)의 속주 3주를 보면 이름만 빌린 것이 확실하다.

염주(鹽州)와 목주(穆州), 하주(賀州) 셋이다.


이제 [요사지리지 (遼史地理志)] 염주의 설명을 보자

鹽州 本 渤海龍河郡, 故縣四 海洋, 接海, 格川, 龍河 皆廢 隸開州 相去 一百四十里


상국과 속국 바보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두만강가의 발해 염주에는 해양, 접해, 격천, 용하 등 4현이 있었는데, 요나라가 이들을 두만강에서 압록강에 옮겨다가 염주만 설치하고 4현은 없앴다.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올바른 해석은 이렇다.

두만강가의 발해 염주 이름을 가져다가 압록강의 발해 용하군에 설치했는데, 발해 용하군에는 해양, 접해, 격천, 용하현이 있었지만 다 없앴다.

바보들은 압록강에 발해 땅이 없었고, 두만강 염주에는 용하현등 4현이 속했는데 4현은 없애고 염주만 압록강에 가져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발해 용하현은 발해 염주에 속해 있었을까? 아니면 발해 용하군에 속해 있었을까?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용하군에 용하현이 속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사실에 가깝다.
그냥 있는대로 해석하면, 요나라가 설치한 염주는 본래 발해 용하군 지역이었고 용하군에는 해양, 접해, 격천, 용하현이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를 왜곡하겠다는 비뚤어진 마음을 버리고, 그냥 이렇게 사실대로 읽으면 된다.

요나라 염주는 본래 발해 용하군(龍河郡)이며 해양(海洋), 접해(接海), 격천(格川), 용하(龍河) 등 4현을 두었었는데 폐지하였고, 개주와는 140리 거리이다.

용하군은 지금 북한의 용천군(龍川郡)이 되었는데 용천역에서 대폭발 사고가 일어났었다. 이 용천군 동남방에 염주(鹽州)가 남아있다.

다음 목주의 설명을 보아도 그렇다.

穆州,保和軍,刺史。本渤海會農郡,故縣四:會農、水歧、顺化、美縣,

皆廢。户三百。隸開州。東北至開州一百二十里。统縣一:會農縣。

양국의 바보 학자들은 두만강의 목주에 회농, 수지, 순화, 미현등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두만강에서 그 회농의 흔적을 찾는다.

이제 우리 상식적인 보통 사람들은 압록강의 회농군에 회농현과 수지, 미화, 미현 등 4현이 있었는데, 요나라가 두만강에서 목주를 옮겨오고 나머지를 폐지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나라 목주(穆州)는 본래 발해 회농군(會農郡)이며 회농(會農), 수기(水岐), 순화(順化), 미현(美縣)등 발해 4현이 있었으나 모두 폐지하였다. 동북으로 개주까지 120리이며 회농현 하나로 통일하였다.

발해 회농군의 위치는 개주 서남 120리로서 단동시(丹東市) 동구현(東溝縣) 고산진(孤山鎭)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요나라 동경의 소속현 이름에 순화현(順化縣)이 있다.

동경요양부 직할 소속현 이름은 다음 9개다.

1) 요양현(遼陽縣 발해 금덕현金德縣과 상락현常樂縣이었다. 금덕현은 금덕사가 있으니 태자하 남쪽이고 상락현은 태자하 북쪽으로 추정된다.

2) 선향현(仙鄕縣 발해 영풍현永豊縣, 현 흑산현 黑山縣)

3) 학야현(鶴野縣 발해 계산현鷄山縣 현 당마채 鞍山市 唐馬寨)

4) 석목현(析木縣 발해 화산현花山縣, 현 개원시 중고진 開原市 中固鎭)

5) 자몽현(紫蒙縣 발해 자몽현紫蒙縣; 현 부신시 阜新市 紫都臺)

6) 흥료현(興遼縣 발해 장녕현長寧縣 현 태안현 손성자 台安縣 孫城子)

7) 숙신현(肅愼縣 발해 현 창도현 노성 昌圖縣 老城)

8) 귀인현(歸仁縣 발해 상주常州 현 창도현 사면성 昌圖縣 四面城)

9) 순화현(順化縣 발해 순화현順化縣 현 단동시 봉성현 鳳城縣)


동경요양부의 소속현 이름이면 제법 큰 것이다.

이 순화현은 당연히 지금의 봉성현이어야 할 것이다.

즉 요나라 성종때 만든 개주 개원현은 본래 발해 회농군의 순화현, 요나라 요양부 순화현이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요나라 하주(賀州)는 본래 발해 길리군(吉理郡)이며 홍하(洪賀), 송성(送城), 길리(吉理), 석산(石山) 등 4현인데 모두 폐지하였다.

贺州,刺史。本渤海 吉理郡,故縣四:洪贺、送城、吉理、石山,皆廢。户三百。隸開州。

단, [거란지리도]에서는 하주가 아니라 길주(吉州)라고 표시하였고 압록강 남쪽이다. 평안북도 의주(義州)에 송성고성이 있었다.

단동시가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이었다는 왜곡 역사 소설을 뒷받침할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편 발해는 62주와 천정군(泉井郡)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서 더 많은 주와 군이 발견된다.
이는 발해 12대 대인수황제 때의 공적이다.

그런데 발해 남해부가 요양시 북쪽까지였고, 요양시 동남쪽, 본계시 부근은 발해 삼로군(杉盧郡)이 있었다.

요나라 노주(盧州)는 발해 노주 이름을 빌려서, 발해 삼로군(杉盧郡) 위치에 두었는데 삼로군에 발해는 5현을 두었는데, 산양현(山陽縣), 삼로현(杉盧縣), 한양현(漢陽縣), 백암현(白巖縣), 상암현(霜巖縣) 등이다.

노주는 재경 동쪽 130리에 있다. 이 발해 삼로군의 흔적이 본계시 삼송산성(杉松山城)이다. 본(本)을 한으로 읽는 것이 부여식 혹은 일본식이다. 日本 ; 니혼!!!

고구려 홀본 忽本 === 발해 홀한성 忽汗城

그래서 본계(本鷄)에 흐르는 강이 역시 한수여서 거기 한양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압록강에는 발해 용하군, 길리군, 회농군 등이 있었다.

이는 818년 당나라에 조공한 고덕무의 후고구려가 본계시부터 대동강까지 자리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819년경에 대인수 황제가 이 후고구려를 병탄하여 임진강까지 확보하고서, 그때 새로 발해 군현이 설치되는 것이다.

특히 단동 봉황성은 성둘레가 10000m에 달하는데 만주에서 제일 큰 산성이다. 그러나 고구려 수도가 여기 있었던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당나라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임명받아 자립하였던 고덕무(699년)의 후고구려 때에 도성으로서 건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713년 당나라가 고려대수령(高麗大首領)으로 인정한 고정전(高定傳)은 그 후예다. 당나라 사자 최흔은 대련 땅을 가졌던 고정전의 후고구려를 거쳐서 발해에 들어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돌아간 것이 된다.

고구려는 9000m 이상의 산성을 쌓지 못했는데, 이 후고구려가 10000m 산성을 쌓은 것이다.

물론 그 무렵에 발해는 14000m 평지성을 만들었다.

10) 열 번째 증거 證據10)
평양성벽 각서(平壤城壁 刻書)

대동강 평양에서는 6세기경에 고구려인에 의해서 현재의 평양성이 세워질 당시에 만들어진 [평양성벽 각서 (刻書)]가 발견되었는데 그 성벽에 평양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대신에 오로지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했던 대동강 평양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
(漢城 下 後部小兄...)

여기서 [한성 하, 漢城 下]는 고구려 한성이 건설 도중에 잠시 백제에게 함락되었던 사실을 의미한다.

아니 사실은 백제 한산성이었는데 고구려 광개토왕이 빼앗았다.
이 지역에 살던 백제인들이 일본에 가서 백제촌을 짓고 그들의 고분 속에 평양의 밤하늘, 평양의 별자리를 그려 넣었으니 그것이 일본 기또라 고분에서 발굴되었다.
지금 평양에 백제인들이 살았던 사실을 모르는 역사학자들이 일본 백제촌에 백제인이 아닌 고구려 간첩이 스며들어 감히 고분을 만들고 게다가 고구려 하늘 별자리를 그려넣었다고 해석한다.

광개토왕이 뺏은 고구려 한성이 본래는 백제 온조왕이 마한(馬韓)에게서 뺏은 평양이었고, 그래서 고구려 남평양, 혹은 하평양(下平壤; 광개토왕비문)이라고도 했고 본래는 근초고왕의 수도 한산성이었다.

아신왕은 광개토왕에게 한성을 뺏기고 후퇴하여 지금의 예성강에 위례성을 다시 만든다.
위례성의 물이 위례성강이고 줄여서 예성강(禮成江)이다. 예성강 상류는 부여면의 위라천(位羅川)이다. 부여면 위라천과 예성강을 합치면 위례성이 나온다. 현재 남아있는 예성강병 평산의 태백산성(太白山城)인데 충남 부여의 백제 왕궁인 부소산성(夫蘇山城)과 거의 똑같다.

또한 백제 대방태수 장무이묘(張茂夷墓)가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발굴되었다. 이 대방태수묘는 무녕왕릉묘와 똑같은 벽돌묘로서 무녕왕릉의 모델이다.

그런데 475년 장수왕 때에 또다시 백제 위례성을 함락시켜서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돌아간다. [일본서기]에는 한성이라고 했다. 이후 백제는 서울 한강을 그냥 지나서 멀리 공주로 천도한다. 백제는 서울 한성에 도읍한 사실(史實)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대규모 백제 고분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후 무녕왕(武寧王) 때에 공주의 백제가 반격하여 평양과 백제 한성을 수복한다. 고구려 한성을 쌓던 고구려가 놀라 도망간다. 백제는 이때 평양과 한성을 수복하는데, 평양은 집안이고 한성은 대동강평양이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압록강) 평양은 백제고지(百濟故地)라고 나온다. 지금의 대동강, 즉 백제 한산성의 하늘도 물론 백제 고향 하늘이었다. 고구려 광개토왕 이전에는 백제가 고구려보다 인구가 더 많고 사회가 훨씬 발전되었을 것으로 본다. 특히 벽화 고분을 보면 그렇다.

백제 무녕왕 사후에 고구려 대군이 황해도 오곡(五谷), 즉 황해도 복판 서흥(瑞興)으로 쳐들어온 것은 황해도가 백제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백제 성왕 때에 금현성(金峴城; 황해도 서흥의 대현산성)과 도살성(道薩城; 황해도 평산 태백산성) 부근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는데 난데없이 신라 장수 이사부(異史夫)가 둘 다 빼앗는다. 역시 [일본서기(日本書記)]를 보면 우두방(牛頭方; 金川郡; 예성강 동편)과 니미방(尼彌方)이라했는데 역시 그 위치다. 그리하여 진흥왕의 신라가 예성강에서 중국과 직접 교통하게 된다.

이후 백제 여창 왕자(후일의 위덕왕)가 552년에 평양을 한번 더 침공하여 고구려군을 동성산으로 쫓는다. 일본에서는 동성산을 대동강 대성산성으로 풀이하고 있다.

백제 위덕왕 여창은 북제(北齊)에서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고 하였다. 즉 중국 대륙에 심어진 백제 영토 중심이 동청주인 것이다. 청주의 동쪽 등주 부근이 될 것이다. 백제가 진(晉)나라 이래로 송나라, 남제국, 양나라까지 양자강 북쪽을 장악했었기 때문이다. (北史 참조) 북위(北魏)는 이 백제 땅을 뺏으려고 489년에 전쟁을 일으켰지만, 백제 동성왕 때에 이를 막아냈다.

고구려 고분이 압록강 집안에 수만개가 있다. 신라 고분도 수만개가 경주에 있다. 백제만 그 수만개의 고분이 없다. 서울 송파에 몇 개...공주에 몇 개...이건 사실이 아니다...역사가 왜곡 조작된 것이다.

그 잃어버린 수만 개의 백제 고분이 대동강 평양과 황해도에 널려 있었다.
아하, 그랬구나...낙랑 고분으로 알려진 수만개의 고분들이 100% 백제 고분이었구나.
아무렴 중국인들이 설령 한반도에까지 들어왔어도 자기들 무덤까지 여기 만들었을까? 절대 아니다.
그들은 시체를 일으켜 세워서라도 중국 고향 땅에 돌려보내서 묻히게 한다.

중국인들은 소정방의 백제 침략 이전에 아직 한반도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당나라의 백제 침략 이전에는 절대 없었다.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평양성은 언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지금 평양의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외성은 기자정(箕子井) 제도로서 성안 거리가 세워졌고, 이는 당나라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이 평양성은 당나라 장안성이 만들어진 다음에야 만들어졌고 고구려 평원왕 때 만들어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 보장왕이 당나라 장안성에 끌려갔다가, 다시 안동도호부 도독, 조선군왕으로 요동, 즉 고구려 텃밭에 복귀했었다.
그러나 곧 말갈과 내통한다는 반역의 의심을 받고 소환되어서 죽고 그 다음에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가 다시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요동에 오는데, 그는 소환당하지 않고 확실하게 독립해버렸다.
그가 당나라 장안에서 이 대동강 한성에 돌아와서 평양이라고 고쳐 부르면서 당나라 장안을 본 따서 평양성을 완성한 것이라고 보면 매우 타당하다.
일부에서 고구려 평양성을 본 따서 당나라가 장안성을 세웠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고덕무의 후고구려는 699년에서 819년까지 무려 120년을 존속했다.
산동반도의 평로치청절도사 이정기의 제국(齊國)보다 오래다.

지금의 단동 봉황산성과 대동강 평양성은 이 고덕무 후고구려 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반면에 반월형으로 대동강 강변에 세워진 청암동 토성은 의심할 바 없이 백제성이다.

11) 열한 번째 증거 [천남산 묘지문 (泉男山 墓誌)]

연개소문 차자로서, 형 천남생을 배반하여 대막리지가 되었다가 당나라에 항복한 [천남산 묘지문]에서는 "(천남생이) 현도지역을 당에 받쳐서 봉작을 받으니 (천남산은) 한성을 지키지 못해 왕의 신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라고 적었다.
(泉南生) 玄菟之域 屬唐封遠曁
(泉南山)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즉, 고구려가 패망한 대동강의 마지막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

역사 연구의 기본은 그 시대에 가장 가까운 기록과 그 지역의 후대 기록을 우선한다.

고구려의 땅을 잃었기 때문에 우리는 고구려 지역의 기록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500년이나 지난 뒤에 고구려의 귀퉁이 끝에서 쓰여진 고려시대 김부식의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 삼국사기 백제는 그래서 신빙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이다.

천남생, 천남산, 천헌성 묘지 등은 고구려 멸망 직후에 쓰여졌고, [삼국사기]보다 무려 500년 전에 쓰여진 것이다.
사대주의자 김부식도 고구려 졸본성을 요양시 서쪽, 요서(遼西)의 의주(醫州)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후 1000년이 지나서 컴퓨터 시대를 맞이하여서 김부식보다 똑똑하지만 김부식만큼도 생각이 없는
종속 국사학자들은 고구려 졸본성을 오늘도 압록강에서 찾는다.
환인 오녀산성이라나....

오녀산성은 공민왕 때에 이성계가 가서 놀던 올라산성(兀剌山城; 동국여지승람)이다. 이나라 백성들이 관광 가서 여기가 내 고향 땅이다, 싶은 것은 거기가 본래 백제 위례성이기 때문이다.

혼강 아래 있으니 북대한수(北帶漢水) 했던 비류 백제 위례성이 고구려 졸본성보다 훨씬 더 잘 맞는다.

환인현 오녀산성이 백제 위례성이라는 말이 그냥 농담이 아니다.
혼강의 지류인 부이르강은 비류강이라는 뜻이고 큰 줄기는 혼강(渾江)이라고도 했으니 백제의 한강이 맞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파저강(婆猪江)이라고도 불렀다. 백제강의 다른 말이 파저강이다.
그전에 금나라가 파사부(婆娑府)라고 했었다. 파사부라는 발음은 박작성(泊汋城)에 대한 중국식 발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백제성(百濟城)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녀성 북쪽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도 본래 백제왕조의 산성인 것은 두말 할 필요 없다.

김부식보다 많이 아는 현대 지식인도 아직 종속 역사 앞에 무력하다.

지금 고구려를 많이 안다고 주장하는 고구려 성터...사비성이 대련에 있고, 백암성이 요양에 있고,,,신성이 심양에 있고 이게 다 명나라 때 조작되어 나온 헛소리다.

그걸 [사서오경]쯤 되는 줄 알고 아직도 종속 국사학자들이 달달 외워서 우리 후예들에게 가리키니 다 ............................. 똥이다.


12) 열두 번째 증거 [천남생 묘지문(泉男生 墓誌)]

천남생 묘지(泉男生 墓誌)에서
천남생의 출생지(男生 出生地)를 요동군평양성(遼東郡平壤城)이라 하였다.

이는 대동강의 임시 평양 한성과 구별한 것이다.

요동군 평양성은 요양시 동경릉이고 (遼東郡平壤城= 遼陽市 東京陵)

본래 하평양성(下平壤-廣開土王碑文)이나 남평양성(南平壤城-桓檀古記高句麗)이라고도 부르던 고구려 한성(漢城)인 대동강 평양성과 다른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기(三國史記新羅記]에서 김유신(金庾信)은 황해도 수안을 거쳐 평양으로 공격해 가는데 그 평양은 장새현(獐塞縣)이었던 수안(遂安)으로부터 거리 36000보(步)로서 그 기록이 분명 지금의 대동강 평양이다.

또한 대동강 서북(大同江 西北) 함종현(咸從縣)은 고구려 왕과 백성들이 뱃길로 중국에 끌려간 곳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대동강 평양성에서 망했지만, 그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면, 언제부터 고구려왕이 대동강 한성에 피난하여 살게 되었을까?

[원사지리지]는 당나라 태종의 침입 이후라고 했다.

[천남산 묘지문]에서 천남산은 반정으로 맏형 천남생을 배반하고 668년에 태막리지가 되었다.

[삼국사기]<고구려전>에는 667년에 중형 천남건이 막리지가 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667년 9월경 현도 지역의 신성 전투 패배로 중형 천남건이 실각하고, 천남산이 태막리지가 된 것이다.

지금의 대동강 평양을 한성으로 기록한 천남산 묘지문은 이렇게 적혀있다.

관이지천(官以地遷) 총비왕서(寵非王署)

절풍삽우(折風揷羽) 영절(榮絶) 구려지향(句驢之鄕)

골적시금(骨籍施金) 총수(寵殊)

현도지역(玄菟之域) 속당봉원기(屬唐封遠曁)

한성불수 맥궁입헌 고시래왕(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이라고 했는데




왕서(王署)는 고구려 왕도(王都)를 낮춰서 부른 말이고, 전체의 뜻은

고구려가 왕궁(官署)을 (평양에서) 한성으로 옮겨가니 당나라 황제가 미워하고 절풍삽우(고구려 머리 장식)의 영예가 구려지향을 떠나서 끊기고 혈통을 금석에 새겨주던 은총도 끊겼다.
현도지역이 이미 당나라에 귀속하게 되니 (천남생이 항복하고, 현도군을 당에 받쳐서 현도군 개국남으로 작위를 받음.) (천남산이) 한성을 지키지 못하고 왕의 활을 들고 입조하여, 화살을 받치고 항복하였다.”고 적었다.

[원사지리지]와 [천남산 묘지]로 보아서 고구려가 요양시 평양에서 한성 남평양으로 옮겨간 것은 확실하다.
고구려 왕도가 평양에서 한성으로 옮겨간 시기는 당나라의 645년 침입 이후 660년 사이다.

(그림 1-1-15-1 참조)


고구려나 백제는 지방왕을 두었다.

백제 22담로는 왕이다.

백제 대방태수 장무이도 왕이다. 지방왕.

이는 [남제서(南齊書)]에 잘 나온다. 백제 사법명, 매라왕...찬수류 벽중왕 등

고구려 보장왕도 대양왕의 아들이었다.


고구려의 중앙왕은 호태왕이라 하였다.

한자로는 제(帝)로 짧게 써도 공식적으로는 호태왕(好太王)을 썼다.

이는 호, 홀, 한 등의 글자로 크다의 뜻으로 나타내는 몽고풍이다.

13) 열세 번째 증거 [관구검 기공비(毌丘儉紀功碑)]


길림성 집안 판석령(集安 板石嶺)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는 유주자사 관구검의 비장들이 환도성에서 동천왕을 쫓아 천리를 더 추격하여 옥저를 지나 숙신지계에 세운 것이었다.


[삼국지위지]<관구검전>에서 245년 양구대전(大戰梁口; 新民市)에서 승리하여 동천왕 위궁이 패주하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환도산성에 올랐다. 수천명의 목을 쳤다.

동천왕 위궁은 홀로 쥐처럼 도망쳤다. 관구검은 군사를 돌렸다.

[삼국사기고구려전]에서는

동천왕이 압록원<鴨淥原>으로 도주하였고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도륙하였고, 현도태수 왕기(王頎)가 동천왕을 추격하니 동천왕은 남옥저로 피했다.

246년 관구검은 다시 고구려를 쳤다. 동천왕은 매구(買溝; 吉林 梅河口市)로 도망쳤다.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추격시켜서 옥저 천여리를 지나 숙신지계에 달하여 각석기공(刻石記功)하였다.
또한 환도산에 돌아와(到丸都之山) 불내성(名不耐之城)이라고 새기고 돌아왔다.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界, 刻石紀功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還. 其後, 復通<中夏>

<동옥저전>에서는 숙신지계가 아니라 옥저동계라고 하였다.
魏志》曰, <毌丘儉>遣<王頎>追<句驪王><宮>, 窮<沃沮>東界


양구에서 패한 동천왕은 압록원을 거쳐 옥저로 도망갔고 양구에서 이긴 관구검은 환도산에 오르고 또 부하를 옥저로 보내 천리나 추격하게 하였고 부하들은 압록강 환도성 천리밖 숙신지계에 관구검기공비를 세웠고 다시 환도성에 돌아와 불내성이라고 새겼다.

그런데 바보같은 중국인들이 저들의 말인 중국말 기록조차 똑바로 읽지 못해서 압록강 환도성에서 무려 천리나 추격하여 [숙신지계(肅愼之界)]에 세워진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자 이를 천연덕스럽게 고구려 환도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나라 종속국사학자들도 그대로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있다.

한심한 일이다. 다시 읽어보라
肅 愼 之 界 아직도 저 네 글자가 환 도 성 이렇게 세 글자로 보이는가?

백년하청이다.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관구검 기공비]가 나온 집안에서부터 천리 떨어진 옛 압록강 요하에서 환도성을 찾으면 좋을텐데 이렇게 대놓고 가르쳐줘도 말귀를 알아먹는데 최소 10년은 걸릴 것이다. 저렇게 낫 놓고 기억자 배우는데 10년 이상 걸리는게 바로 이나라 종속국사학자들이다.
종속국사학자들은 상국에 물어보고, 물어보나마나 상국에서 감히 질문하지 말라고 불호령이 내리겠지만, 아무튼 상국에서 흔쾌히 허가날 때까지, 그러니까 영원히, 그들이 죽는 날까지, 끝까지 역사의 진실을 외면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 고구려 제자리 찾기 작업은 자주 역사 국가를 포기한 이씨 조선 600년래 대변환이 되는 사건이다.
아니 백제 위례성을 환인 오녀산성으로 완벽하게 밝혀내면 백제 멸망 1500년래 대사건이다. 백제사의 복권인 것이다. 환인의 장군분이 비류묘나 온조묘가 될 수도 있다.

[일본서기]를 통해서 복권해야 할 백제사도 아주 많다.

14) 열네 번째 증거 證14)
요사 아고지전(遼史 蕭敵魯 弟 阿古只傳)

요나라 장수 아고지(阿古只)는 북부재상이었고 발해 부여성을 함락하고 발해 노상의 삼만 군대를 기병 오백으로 앞장서서 무찔렀고 발해를 멸망시켜 동단국으로 바꾸고서 도적들이 일어나니 아고지는 강묵기(康黙記)와 토벌에 나서서 발해 압록부에서 온 유민 기병대 칠천과 만나서 한번 대전에 무찌르고 삼천의 수급을 벤 후에 추격하고 진군하여 회발성(回跋城)을 깨트렸다.
(그림 1-13-1 참조---이 아래 관구검 기공비 그림 지도에 동쪽에 회발성 있슴)

弟阿古只。阿古只,以功拜北府宰相,
攻渤海,破扶余城,独將骑兵五百,敗老相軍三万。
渤海既平,改東丹国。顷之,已降郡縣復叛,盗賊蜂起。阿古只与
康默記討之,所向披靡。会賊游骑七千自鸭绿府来援,勢張甚。
阿古只師魔下精銳,直犯其鋒,一战克之,斬馘三千余,遂進
軍破回跋城。以病卒。

회발성은 매하구시(梅河口市) 동쪽 휘남현(輝南縣)의 휘발성(輝發城)이다.
압록부 압록강에서 나와서 쫓긴 발해 기병대가 휘발성에 피신했다가 그나마 파해된 것이다.
압록부가 집안이라면 휘남에서 거기 집안의 제 집까지 내려가서 숨고 방어할 일이다.
압록부가 요하였기 때문에 거기서 밀려서 동쪽으로 피신한 발해 기병은 더 갈 곳이 없어서 휘발성에서 싸우다 옥쇄한 것이다.

그래서 발해 압록부는 휘발성의 서쪽 지금의 요하(遼河)에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동천왕이 도망친 매구는 대무신왕 때 복속했는데 길림의 매하구시이고, 주몽에게 망한 북옥저가 도망친 것이다.

이 동천왕이 압록원을 넘어 피신한 매구와
발해 압록부 기병이 피신한 휘발성은 같은 경로다.
동천왕 때 압록원이 발해 압록부 신주성이 되었었다.

요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에 거란군은 신의주가 아니라 집안 가까운 곳에서 청천강을 타고 쳐내려온 기록이 있었다.
지금 압록강 북쪽의 진강진(振江鎭)이 파사부로서 고대로부터 도강의 거점이다.
625 때도 중국인민군도 집안에서 압록강을 넘어 남진해왔다.
역사는 그렇게 자꾸 반복되니 미리 제대로 역사를 알고 올바로 대처해서 우리 미래를 굳게 지켜야 한다.

15) 열다섯 번째 증거 證15)
전요지 고적(全遼志 古蹟)

요양시 수산(遼陽市 手山) 남쪽 7리에 경관(京觀)이 있었다.
[전요지(全遼志)]의 4권 고적편에 이 경관(京觀)에 대하여 (요동국을 토벌한 진나라 황제인) 사마의(司馬懿)가 만들고 당나라가 훼손했다고 적었다.

위나라 장수 사마의(진나라 황제가 됨)가 도망치던 요동국왕 공손연을 목베고 나서 요동성 안에 들어가서 성민 7천명을 학살하고 만든 시체탑인 경관(京觀)을 당나라 사람이 훼손할 이유는 없다.
각 지방의 반란을 막기 위해 당나라는 그런 경관은 더 세워야 한다.

수나라가 살수 대첩을 당하기 직전에, 내호아(來護兒)를 따라 바다로 들어온 수병들 중에서 평양의 나곽(羅廓; 즉 외성 外城)에까지 들어와 결국 대오가 흩어져서 복병을 만나서 떼로 죽은 수나라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 고구려 전승비를 세웠던 것이 바로 수산(首山)의 경관(京觀)이고, 당나라 초에 고구려와 서로 화해하면서, 당나라 사자 장손사(長孫師)가 평양에 들어와 직접 경관을 허물고 수나라 전사자들을 제사 지내주고 돌아갔다. 아무튼 경관은 고구려 평양성 외곽에 높이 세운 것이다. (三國史記)

고구려가 뻗어나가려고 수도를 정하는데, 저 너른 세상 벌판 다 그냥 두고, 고구려 뒷마당 대동강 평양에 수도를 세웠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고가 극히 좁아서 전혀 확장되지 않는 신라적, 유아적, 노예적 발상이다.
신라가 보기에는 대동강 평양만 해도 크고 좋으니까...
유아가 보기에는 대동강 평양이면 놀기 충분하니까...
노예가 보기에는 대동강 평양도 지키기 힘드니까...

소위 이나라 국사학자는 중국에서 천년간 내려준 중국속국-고구려역사만을 읽고 외워서 우리 국민들을 완벽한 중국속국 노예로 세뇌 교육하고 있다.
그들 국사학자들은 조선말 이외에는 공부할 필요도 없다. 상국이 알아서 조선말로 다 고구려역사 만들어 내려준다. 그들이 철저한 노예 근성으로 국사하는 태도가 영원히 우리 국민 모두를 속국 노예로 만들고 있다.

자. 이제 그간의 고구려 생각을 업그레이드 할 것도 없이 그냥 다 뒤집어라.
일본서기, 요사, 금사, 원사, 명사, 청사를 공부하지 않고 함부로 고구려, 발해사를 말하지 말고, 까막눈 주제에 여기 감히 토달지도 마라.

16) 열여섯 번째 증거 證16)

발해국기(渤海國記)
발해국기 상편 국통 중 발해무왕 대무예 기록에서는 시무왕 장서경(謚武王 葬西京)이라하여 놀라게 한다. 시호를 무왕이라 하고 서경에 장사를 치렀다... 이제까지 어떤 역사 기록에도 없었는데 어찌 대무예황제가 발해 서경압록부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발해 2대 황제 대무예(大武藝) 묘비가 1900년 무렵에 흥경(興京)에서 발굴되어 사람들이 모여 그의 묘비문을 탁본하여 읽어보니 그를 발해 서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었었다고 전한다.
지금 그 묘비나 탁본이 어디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흥경(興京)이었던 무순시(撫順市) 신빈현(新濱縣)은 발해 압록부(鴨淥府) 소속이었고 이는 압록강의 가지변이 되어야 맞는데, 지금의 대요하로 들어가는 물이고 지금 압록강과 관련 없다.
(그림 1-1-15-1 참조)

17) 열일곱 번째 증거 證據17)

[유변기략(柳邊紀略)]과 [신당서 도리기(道里記)]

다음은 고구려 발해 역사 연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외우는 [신당서 도리기(道里記)] 구절이다.

“압록강구에서 배를 타고 백여리를 올라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삼십리를 가면 박작구이고, 발해 국경이며, 여기서 오백리를 올라가면 구도현성이고 고려 중왕도였다. 구도현성에서 다시 이백리를 가면 신주다. 신주에서 육로로 사백리를 가면 현주이고 천보때 발해 수도다.”

道里記/ 自鴨淥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 泝流 東北三十里 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 泝流 五百里 至 九都縣城, 故高麗王都
又 東北泝流 二百里 至神州 又 陸行 四百里 至顯州 天寶中王所都

그동안 이 압록강을 지금의 압록강으로 해석해 왔고
압록강 집안(集安)에서 육로로 400리를 가면 대충 길림 화전현(樺甸縣) 소밀성(蘇密城)인데, 이 소밀성을 천보(天寶; 당 현종, 발해 대무예 황제 때) 중의 발해 왕도인 현주(顯州)라고 치부해왔다.

신주(神州)는 [요사지리지]에서 녹주(淥州)로 바뀌었고, 고려고국(故國)이며 발해 압록부 서경성(西京城)인데 성둘레가 이십리라고 하였다.
淥州,鸭淥軍,節度。本高麗故国,渤海號西京鸭淥府。
城高三丈,廣輪二十里石城 都督 神、桓、丰、正 四州

그런데 집안 근처에는 고작 7000m인 산성이 남아 있는데 그나마 환주성이란다. 그동안 환도산성이라고 우리를 500년 동안 속여온 것이다. 압록강이 달라지니 고구려 환도산성조차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부터 200리 물길 위에 압록부 서경성, 광륜 20리 석성은 흔적도 없다.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에 서풍현 양천진 성자산성은 좌우 쌍성으로서 성둘레가 9000m에 이른다. 겹치는 부분을 고려하여 동성과 서성을 각각 구하여 더하면 10000m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현주(顯州)다. 그동안 중국과 속국 사학자들은 길림 송화강의 소밀성이라고 잘도 속여왔는데
엉뚱하게도 현주는 요하(遼河) 북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청나라 양빈(楊賓)이 지은 [유변기략(柳邊紀略) 卷1]에서
“요하투(遼河套)는 개원의 서북에 있고 在開原西北 구현주의 남쪽에 있다 舊顯州城下“ 라고 하였다.
요하투(遼河套)는 요하(遼河)의 만곡부(彎曲部)를 의미한다.
(套: 河流 或山脈 轉折 彎曲的地方。예: 하투 河套; 황하의 만곡부, 음산산맥 아래...)

요하투(遼河套)는 지금 동요하가 이수현(梨水縣)을 통과하는 만곡부다.
이 부위를 개원(開原)의 서북이라 한 것이 맞는데 또 구현주(舊顯州)의 남쪽이라 한 것을 보면
발해 현덕부(顯德府) 현주(顯州), 천보(天寶)때 발해 왕도는 요하의 북쪽에 있었다.
즉 공주령시(公主嶺市)- 장춘시(長春市) 부근인 것이다. 결코 길림시 화전현(樺甸縣)의 소밀성(蘇密城) 부근이 아니다.

여기서 구현주(舊顯州)라고 적시한 것은 요나라가 지금의 북녕시(北寧市)로 발해 현주를 옮겼기 때문에 그 이전의 발해 현주를 구현주(舊顯州)라고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주에서 육로로 400리 앞의 고구려, 발해 압록수는 지금의 요하일 수밖에 없고, 지금의 압록강은 절대 될 수 없는 것이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