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

[스크랩] 신라가 대륙에 설치한 귀덕주 귀의현

대동이 2007. 8. 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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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찾아서 |2007/08/13 (월)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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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대륙에 설치한 귀덕주 귀의현>


※ 신라가 설치한 귀의주 및 귀덕군, 귀의현의 위치(당서지리지)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고 합니다. 한반도 안에서...과연 이러한 사건이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옛 기록을 보면 신라가 서기 732년에 귀의주 또는 귀의주 귀덕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의 해설대로 귀의현 또는 귀의주가 하북성에 있었을 경우에는 신라의 영토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삼성 지역 일부 및 하북성 지역까지 강역권으로 했었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릴 것이며,
이 귀의주 또는 귀의현 또는 귀덕군의 위치가 녕하성 북부 황하 연변에 있었다면 신라의 영토는 중원 대륙의 오충지에 있었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릴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신,구당서 지리지 및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서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당서지리지 (하북도편을 보면) ; 龍山(용산) : ➜<歸義州(귀의주)>總章中置(총장중치),處海外新羅(처해외신라),隸幽州都督(례유주도독)。舊領縣一,戶一百九十五,口六百 二十四。

용산 : 귀의주는 해외신라처에 당 총장중에 설치했으며, 유주에 속해 있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래 자치통감을 인용 합니다>

(2) 192-133) 卷213唐紀29. 玄宗(현종) 開元二十年
(당현종개원20년)(서기 732년입니다)

  信安王禕帥裴耀卿及幽州節度使趙含章分道擊契丹,含章與虜遇,虜望風遁去。平盧先鋒將烏承玼言於含章曰:「二虜,劇賊也。前日遁去,非畏我,乃誘我也,宜按兵以觀其變。」含章不從,與虜戰於白山,★[注:白山,後漢時烏桓所居,在五阮關外大荒中]果大敗。承玼別引兵出其右,擊虜,破之。己巳,禕等大破奚、契丹,俘斬甚,可突干帥麾下遠遁,餘黨潛竄山谷。奚酋李詩瑣高帥五千餘帳來降。禕引兵還。賜李詩爵歸義王,充歸義州都督,徙其部落置幽州境內。[注:高宗總章中,以新羅降戶置➜歸義州於良鄉縣廣陽城,後廢,今復置以處李詩部落]。

󰁾 자치통감에 이러한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자치통감은 편찬된 후에 교정 또는 재발간이라는 이름하에 일부 기록이 왜곡되었거나 조작된 글자가 있다고 보는데 왜 이러한 기록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인가 ? (해설자들의 注에 기록되어 있다)

<당 고종 총장 중에 신라 降戶(항호) (奚族이 신라에게 항복해 오자))들을 모아 <귀의주>를 설치했는데 이곳은 <량향현>의 광양성이다. 후에 폐되었으며, 지금 다시 설치했는데 <이시(이시는 추장)>부락민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 <신라>에 항복한 戶들을 모아 신라에서 <귀의주>를 설치했다는 말이다. (다른 사서의 기록에도 있음).

① 량향현 ; 경조 방산형 동에 있다. 漢나라 때의 廣陽城(광양성)이다. 문제는 현 하북성에 있었던 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위의 기록을 보면 이들과 당군이 한바탕 벌인곳이 <백산>이다. 백산은 후한때 오환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오완관(대군의 북쪽에 있다고 함)의 북쪽 대황의 땅이라고 해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산서성 서북변 또는 섬서성 북변 대막 주위에 있었다.이곳에서 패한 이시를 위시한 돌궐들이 신라에 항복해 왔다는 것은 신라 중원에 땅을 갖지 않고는 불가능한 사건이다. 문제는 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하북도가 현 하북성 지역을 말하지 않고 섬서성 북변 및 녕하성, 감숙북변들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북성이 됐든 산서성 또는 섬서성 서북변이 됐든간에 쇼킹한 기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② 歸義州 ; (중국고금지명대사전) 당 나라 때 설치, 하북성 량향현 북쪽에 있다.  당나라 때 설치, 감숙 경에 있다고 하였다. 역사서의 전체 맥락으로 보아 감숙境(경)에 있다는 것이 올바른 기록이다. 본시는 하서절도사였으나 歸義軍(귀의군)이 감숙성의 량주에 설치되었으며, 이곳은 감숙 무위현이다. 아래 당서를 더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러한 여러 기록으로 볼 때 당나라는 황하의 서쪽지방에 있었으며, 고구려는 황하의 동쪽에 있다가 당에 의해 망하게 되고, 당은 또 신라에게 중원의 땅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개연성이 많다.

󰁾 아래에 당서지 본문을 계속 보자. 귀의현에 대해서 ;

(3) 歸義(귀의), 在良鄉縣(재 량향현)之古廣陽城(고광양성),州所治也(주소치야)。

귀의현은 량향현의 옛 광양성이며, 이곳의 주에서 다스렸다.

(4) 幽州大都督府(유주대도독부) 隋為涿郡。武德元年,改為幽州總管府,管幽、易、平、檀、燕、北燕、營、遼等八州。幽州領薊、良鄉、潞、涿、固安、雍奴、安次、昌平等八縣。二年,又分潞縣置玄州,領一縣,隸總管。四年,竇建德平,固安縣屬北義州。六年,改總管為大總管,管三十九州。七年,改為大都督府,又改涿縣為范陽。九年,改大都督為都督。幽、易、景、瀛、東鹽、滄、蒲、蠡、北義、燕、營、遼、平、檀、玄、北燕 等十七州。貞觀元年,廢玄州,以漁陽、潞二縣來屬。又廢北義州,以固安來屬。八年,➜ⓐ又置歸義縣(우치 귀의현)。

유주대도독부 : 수나라 때 탁군이다. 무덕원년에 유주총관부로 바꿨다.(중략). ⓐ정관 8년에 또 귀의현을 설치했다.

(5) 寧州上(녕주.상) 隋北地郡(수북지군)。義寧元年,領安定、羅川、襄樂、彭原、新平、三水六縣。ⓑ二年,分定安置(분정안치)➜歸義縣(귀의현),以新平、三水屬新平郡。武德元年,改北地郡為寧州。其年,以彭原縣屬彭州。三年,分彭原置豐義縣,枕彭州。又分定安置定平縣。貞觀元年,廢彭州,以彭原、豐義二縣來屬。仍於寧州置都督府。四年,罷都督府。ⓒ十七年,➜廢歸義縣(폐귀의현)。 天寶元年,改為彭原郡。乾元元年,復為寧州。舊領縣七,戶一萬五千四百九十一,口 六萬六千一百三十五。天寶,領縣六,戶三萬七千一百二十一,口二十二萬四千八百三 十七。在京師西北四百四十六里,至東都一千三百二十四裡。

녕주. 상 ; 수의 북지군이다.(중략). ⓑ 의녕 2년에 정안을 나누어 귀의현을 설치했다.(중략). ⓒ정관17년 귀의현을 폐했다.

귀의주 귀덕군을 신라에서 설치했다니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아보십시다.

(6)128) 신당서 지리지7,하편의 귀의주에 대하여 알아보자 ;

하북도편을 보면 : 奚州(해주)九,府(부)一:

鮮州武德五年析饒樂都督府置。僑治潞之古縣城。縣一:賓從。崇州武德五年析饒樂都督府之可
部落置。貞觀三年更名北黎州,治營州之廢陽師鎮。八年復故名。後與鮮州同僑治潞之古縣城。一
昌黎。順化州縣一:➜懷遠(회원)。ⓓ➜歸義州歸德郡總章中以新羅戶置(귀의주귀덕군,총장중,이신라호치),僑治良鄉之廣陽城。縣一:歸義(귀의)。後廢(후폐)。開元中,信安王禕降契丹李詩部落五千帳,以其眾復置。

ⓓ 귀의주 귀덕군은 총장중에 신라가 설치했으며, 옮겨서(이동시켜서) 임시로 량향현의 광양성에서 다스렸다. 현 하나가 있다. 귀의현이다. 후에 폐했다(없앴다). 개원중에 글란 <이시>부락 5천장이 항복해 그 무리들이 다시 설치했다.

위의 기록은 신당서 지리지 하북도 편에서 해주(奚州:해족들이 있던 곳에 주를 설치한 곳)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에 나오는 지명을 더 알아보면 ;

❶ 歸義州(귀의주)-1)唐置(당치),甘肅境(감숙경). 2)唐置河北良鄕縣北(당치하북량향현북).
❷ 懷遠(회원) - 漢(한) 富平縣地(부평현의 땅:녕하성 황하지대)
❸ 歸德州(귀덕주) - 唐置(당치),當在寧夏東南境(당재 녕하 동남경)
❹ 歸德縣(귀덕현) - 甘肅慶陽縣 東北(감숙경양현 동북) 이렇게 설명이 된다. 지명대사전 및 지리지를 참고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가 설치한 귀의주 귀덕군 및 귀의현은 현 하북성 지역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회원은 漢나라때 부평현의 땅이다. 이곳 주위에 新羅(신라)가 귀의주 귀덕군을 설치했다면 신라는 어디에 있었는가 문제이다. 귀덕현은 감숙성 경양의 동북 황하의 남안에 있으며, 이곳을 흐르는 황하를 귀덕수 또는 귀덕하라고도 칭한다. 즉 현의 북쪽에 황하=귀덕수가 흐른다. 新羅(신라)가 감숙성과 경계를 이루는 내몽고, 영하성 접경지대까지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면 唐(당)나라는 그 남쪽지대 일부 또는 서쪽지역과 사천지역 및 청해성에 있었을 것이다. 新羅(신라)는 秦(진)의 후국이므로 중원지역을 벗어 날수 없다.

당서 본기 및 지리지를 보면 “하북도”란 결코 현 하북성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식아래 해설 또는 해석을 해야지 “하북”하면 무조건 현 하북성으로 해설 해석하다보니 원문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역사가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127-1) 구당서지,제18,지리1

⑴ 平盧軍節度使(평노군절도사),鎮撫室韋、靺鞨,統平盧、盧龍二軍,榆關守捉,安東都護府。平盧軍節度使治,在營州,管兵萬七千五百人,馬五千五百疋。平盧軍,在營州城內,管 兵萬六千人,馬四千二百疋。盧龍軍,在平州城內,管兵萬人,馬三百疋。榆關守捉,在營州城西四百八十裡,管兵三百人,馬百疋。安東都護府,在營州東二百七十裡,管 兵八千五百人,馬七百疋。

󰁾 평로군절도사는 실위 및 말갈을 진무키 위해 설치된 것이다. 따라서 하북성 동쪽지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이다. 평노군 절도사 관내에는 평노, 노룡2군 및 유관수착, 안동도호부가 있으며, ❶평노군 절도사는 영주에서 다스렸으며, 관병이 17,500인 및 마 5,500구가 있었다. ❷평노군은 영주성내에 있으며, 관병이 16,000인 마 4,200구가 있다. ❸노룡군은 평주성내에 있으며, 관병 10,000인 마 300구가 있었고, ❹유관수착은 영주성 서 480리 있었으며, 관병 300인, 마 100구가 있었다. ❺안동도호부는 영주성에서 동쪽으로 270리에 있으며, 관병 8,500인 마 700구가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관수착>이다. 유관은 楡關(유관)=渝關(유관)이며, 산해관이기 때문이다. 이 유관이 있는 곳은 현 하북성 남쪽지대가 아니라 섬서성 서북방 지대의 勝州(승주)지역에 있다는 옛 기록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평노군 절도사 관내는 녕하성 북부를 흐르는 황하 주위를 말하는 것이다.

⑵ 唐土東至安東府,西至安西府,南至日南郡,北至單于府。 南北如前漢之盛,東則不及,西則過之。☞漢地東至樂浪、玄菟、,今高麗、渤海是也。 ☞今在遼東,非唐土也。漢境西至燉煌郡,今沙州,是唐土。又龜茲,是西過漢之盛也。 開元二十八年,戶部計帳,凡郡府三百二十有八,縣千五百七十有三。羈縻州郡,不在此數。戶八百四十一萬二千八百七十一,口四千八百一十四萬三千六百九,

 당의 땅은 동쪽은 안동부에 이르고, 서쪽은 안서부에 이르고, 남쪽은 일남군까지, 북쪽으로는 선우부에 이른다. 남과 북은 전한시대 강성할 때의 것과 같다. 서쪽은 옛 한의 땅을 초월했고, 동쪽은 옛 한의 영토에 미치지 못한다.

漢나라의 땅은 동으로 낙랑, 현토에 이르렀으며, 지금의 고려, 발해의 땅이다. 지금(今) 요동(遼東)은 非唐土 즉 당의 땅이 아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나라의 서쪽 지역은 돈황군에 이르렀으며, 지금의 사주다. 역시 당의 땅이다. 또 한나라가 강성할 때 서쪽으로 구차까지 이르렀다.

동쪽으로는 낙랑.현토에 이르렀다는 한의 영토는 낙랑, 현토가 어디에 있었느냐는 문제를 낳고, 지금의 고려, 발해 강역이라 했으므로 당시 고려와 발해가 어디에 있었는가가 또 중요한문제로 대두되는 것입니다.

당 개원 28년, 호부에서 집계를 보면 ; ①郡 및 府는 328곳이며, ②縣은 1,573개이고 ③戶는 8,412,871호이며, ④ 口는 48,143,609명이다.

이는 1현당 5,348 호이며, 인구는 30,606 명이다. 1호당 인구는 5.7226 명이다(평균). 또한 1개 군 및 1부에 속했던 평균 현수는 4.8 縣이다. 따라서 1개 군 및 1개 부의 인구수는 147,000 명 정도가 된다.(평균으로 계산한 것이다).(중간 중간 경어가 빠져 있읍니다. 설명을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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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1500년" >-김성호

8-10세기 경의 통일신라시대 아시아의 무역은 신라가 주도하였다. 신라배가 아시아의 바다를 뒤덮었으며, 신라는 대규모의 해상무역을 했다. 신라의 해상활동에 대한 언급이 없이는 중세초기 세계해운사를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전 세계 전문가들이 모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장보고는 그 가운데 나왔다.

이상의 신라무역에 관한 기록은 중동상인의 항해일지, 중국측 기록, 일본측 기록(예: 圓仁일기)등 모두 제3자에게만 있다. 정작 당사자인 삼국사기 신라기의 기록에는 약간의 항해기록만 있고 대규모 무역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당시 중동상인들이 기록한 항해일기를 보고 대규모 무역품을 싣고 내리던 신라항구를 추적한다. 울산인가? 부산인가? 목포인가? 아니면 군산인가? 그들의 항해일기는 신라를 5개의 섬으로 구성된 나라라고 하는 등 한반도에 집어넣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반면에 항해일지에 기록된 지리적 위치와 동식물의 자연적 환경까지 당시의 신라는 주산군도를 비롯한 중국 동남해안과 완전히 일치한다.

즉, 중세초기 아시아의 무역을 주도한 신라인은 한반도의 신라가 아니라 중국 동남해안에 있었던 대륙신라, 즉, 해상신라였다.(인용자주: 오늘날 중국의 중심은 북경과 상해 등 해안교통에 유리한 지점이다. 그러나 중국의 왕조는 당나라때까지도 해상교통에 유리한 바닷가로 나올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동해안이 자신들의 세력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륙신라는 한반도의 신라와 사이가 나빴다. 원인일기를 보면 원인이 타고가던 신라배가 한반도를 지날 때는 마치 적국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장보고의 청해진도 바다가 아니라 육지쪽으로 진을 치고있다. 즉, 청해진의 주적은 한반도의 신라였다. 김성호선생은 매우 괴로와 함

(인용자주: 이상의 사실을 모두 감추려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중국학자들은 당시 중국 동해안이 당나라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부담감을 느끼고, 한국의 학자들은 당시 아시아의 무역을 주도하던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신라였다는데에 부담김을 느낌.)

중국 동남해안의 해상신라는 대륙백제의 후손이며, 통일신라기에는 신라인으로, 고려시대에는 고려인으로 불리었다. 그 이후 고려말인 원나라때까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명나라의 건국과 함께 없어진다. 명나라의 토벌에 의하여 생긴 난민이 고려말 조선초의 왜구이다.

한반도로 들어온 이들은 완전히 한국인이 된다. 반면에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들어간 이들이 동남아 및 인도의 화교사회의 시작이다.(인용자주: 단, 현재의 아시아 화교는 그 주축이 근대 이후의 이주민임)



<대륙신라의 영토>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 역시 대륙에 존재했었다는 학설은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발표한 바 있으며, 다만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을 뿐이다. 백제와 신라의 대륙존재설은,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여러 문헌에 기록된 내용들 가운데 기

상과 기후, 중국과의 거리, 고대의 지명, 특산물, 삼국의 인구, 일식과 월식의 관측지, 지리적 한계 등이 모두 삼국이 대륙에 있어야만 설명이 가능하며, 따라서 백제와 신라 역시 대륙에서 존재했다는 주장이다.

먼저, 25사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신라가 어디에서 처음 건국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당나라의 정사인 <구당서>는 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서 끝나고 서로는 백제와 접했으며 북으로는 고구려가 있다. 동서로는 천리이며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대로 옛 번한에 속한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변한이란 다름아닌 번한(번조선)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역시 25사를 인용하여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신당서>와 <구당서>에 모두 이르기를 “변한의 후예들이 낙랑 땅에 있다.”하였다.

-양한지(전한서.후한서)를 살펴보건대 낙랑군은 낙양에서 동북으로 5천리에 있으며, 주에 말하기를 유주에 속하며 옛 조선국이라 한다(삼국사기).

낙랑은 하북성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유주에 속하며, 이곳 역시 옛 번조선의 강역이었으니 옛날의 조선국이라 한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단군조선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으로, 이쯤 되면 낙랑과 대방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은 저절로 빛을 잃는다.

그들의 주장대로 지금의 평양이 옛 낙랑이라면 낙랑의 동쪽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며, 나아가 황해 건너 머나먼 한반도에 있는 평양을 두고 굳이 낙양을 기준으로 설명할 까닭도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낙양에서 동북쪽이라면 실제로도 정확히 하북성의 북경 근방, 즉 옛 유주가 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다만 이 시기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이므로 신라가 하북성 남단에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가 대륙에서도 남쪽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구당서>에서 동과 남이 바다로 막혔다고 한 것도 대륙 동남부의 지형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이후 고구려, 백제가 망한 뒤에 대륙의 일부는 물론 한반도에 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강역까지 모두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를 동신라와 서신라로 구분하는 견해도 있다.

-신라는 변한의 후예이며, 한나라의 낙랑 땅에 있다(신당서/구당서).

<구당서>와 <신당서>의 ‘변한묘예’라는 기록은 ‘변한과 묘족의 후예’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묘족도 고대 동이족의 일파로, 중국의 문헌 중에는 치우 천왕을 묘족의 군주라고 묘사한 책도 있다. 묘족은 일명 삼묘족이라 하여 지금도 양자강 일대의 여러 지역에 소수민족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도 신라가 대륙의 남단에서 존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남사>에는 백제의 동남 5천여 리에 신라가 있다고 했으며, <수서>에는 백제의 남쪽에 신라가 접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이 모두 거짓이 아니라면 백제와 신라는 모두 대륙에 있어야만 한다. 이제 이와 같은 점을 단편적으로나마 몇 가지 정황을 통해 확인해 보자.

앞에서 고구려의 21대 문자명왕이 백제의 요서군과 백제군을 폐하면서 신라의 백성을 복건성 천주라는 곳으로 옮겼다는 <태백일사>의 기록을 살펴본 바 있다. 신라의 백성들을 대륙의 남단인 복건성 천주까지 이주시켰다는 것은 신라가 대륙에 있지 않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당시 고구려가 복건성 천주 일대로 신라의 백성을 옮긴 사실은 25사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즉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복건성에 있는 천주를 진나라 때에는 진안군이라고 했는데, 그 진안군(천주)에 소속된 8개 현가운데 신라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진안군에 신라현이 있다는 <진서>의 기록은 고구려의 문자명왕이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겼다고 한 <태백일사>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며, 중국의 역사지도 역시 천주의 서북쪽에 신라현을 표기하고 있다(다음쪽 그림 참조). 그런데 현재 발행되고 있는 중국 지도에는 '신라'라는 명칭을 없애버리고 그 일대에 대신 나방이라는 지명을 두 곳에 표기하고 있다.

이는 곧 신라방이라는 의미로, 신라방이 산동성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륙의 남단에도 존재했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대륙의 남단은 동북쪽과는 달리 옛 지명의 흔적이 대부분 남아 있는 곳이다.

또 신라방이란 뜻의 나방이 있는 곳에는 현재 신교라는 지명도 있는데, 이 역시 '신라의 다리'라는 의미가 아닐까? 또 지도에서 보듯이 현재 복건성에는 나교, 나원은 물론 대전이라는 지명도 있다.

그리고 복건성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광동성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라방(羅陽), 라부산(羅浮山), 한강(韓江), 조주(潮州), 조양(潮陽) 등과 같은 지명들은 결코 우리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 광동성 서쪽에 있는 광서장족 자치구에는 아직도 라성(羅城), 전주(全州), 백제(百濟)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백제 및 신라와의 관련성을 말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태백일사>에서 고구려가 복건성 천주로 신라의 백성을 옮겼다고 한 기록과 <진서>에서 그곳에 신라현이 있다고 한 기록은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다. <진서>는 서진(265~316)과 동진(317~420)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당나라 태종때 편찬된 문헌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덕왕 2년에 김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 태종으로부터 그 당시에 막 편찬된 <진서>를 하사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는 아직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으로, 이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가 중원대륙의 남단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고도 남는다.

즉 <삼국사기>의 이러한 기록에 따르자면 <진서>에 신라현이라는 지명이 기록된 것을 당시 신라의 조정과 당나라에서 모두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며, 만일 그것이 사실과 달랐다면 바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기록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으니 이는 그곳에 고구려와 신라가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며, <태백일사>의 기록이 모두 사실임을 입증해 준다.

-신라성이 정주부(복건성)의 동남에 있다(진서)

정주(汀州)는 신라현이 표기된 곳 바로 서북에 있는 현 복건성 장정(長汀)을 말한다. 그 동남에 신라성이 있었다는 말이며, 실제로 그곳에는 신라현이 있었고 지금도 신교(新橋)와 라방(羅坊)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원사>지리지에 의하면 이곳에 있는 신라를 당나라가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 기록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곳에 신라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청나라 때에 편찬된 <대청일통지>에도 정주부에 신라성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후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자 한반도와 대륙의 삼국 영토는 발해와 말갈, 신라와 당나라가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다. 이 중 고구려가 설치했던 신라현은 당연히 신라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훗날 이곳에 신라성이 생겨난 것이며, 혹 보통명사로 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광개토경호태왕의 비문에도 신라성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 이곳이 신라에 귀속되었다면 당연히 신라의 역사도 등장해야 하는데, 과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이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니 신라 54대 경명왕(제위 917~924) 8년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봄 정월에 사신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으며, 천주절도사 왕봉규도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삼국사기)

서기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한 뒤 혼란기가 계속되던 50여 년 사이에 중원과 변방에 들어섰던 나라들을 5대 10국이라고 하는데, 그 5대 중 하나가 바로 후당(923~936)이다. 그런데 신라에서 이 후당에 조공할 때 천주절도사 왕봉규도 조공했다는 사실이 왜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인가?

이는 그가 대륙신라의 천주절도사였기 때문임이 분명할진대, 삼국의 대륙역사를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고의로 부정한 김부식이 모호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지리지에서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하여 팽개쳐 놓은 360여 개의 지명 가운데 泉州도 들어 있었음을 상기하라.)

이 무렵 어느덧 신라도 기울어 경명왕 이후 경애왕과 경순왕을 거쳐 고려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직전 경애왕 때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당(후당)의 명종이 권지강주사 왕봉규를 회화대장군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지강주사 왕봉규가 임언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명종은 중흥전으로 불러 물품을 하사하였다(삼국사기)

신라의 천주절도사로 있던 왕봉규가 신라의 강주를 관할하는 권지강주사가 되어 있었는데 후당의 명종이 다시 회화대장군으로 임명했다는 내용이다. 천주가 속한 복건성의 서쪽에 광동성이 있는데 강주는 바로 이곳에 속해 있던 지명이며, 현재의 지도에는 광녕이라 표기되어 있다. 또한 회화는 호북성에 있었던 지명으로, 지금도 회화시로 남아 있다.

생각해 보면 당시 중국에서 인사발령을 냈던 사안까지 <삼국사기>에 기록될 이유가 없고, 실제로 그러한 기록의 예도 없다. 그런데도 천주절도사 강봉규가 후당에 입조한 사실과 후에 강주와 회화로 이어지는 인사이동의 내용까지 모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것은 결국 그곳에 신라의 영토가 있었음을 말해주며, 김부식을 비롯한 당시의 학자들이 신라를 비롯한 삼국의 대륙역사를 간과 혹은 무시하고 모호하게 기록했을 뿐이다.

한편 방향을 돌려 복건성 북쪽으로 올라가면 양자강 하류의 남쪽에 해당하는 절강성에 닿는데, 이 일대도 신라의 강역이었음이 역사상 존재했거나 현존하는 여러 지명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우선 중국의 고지도에는 절강성 임해현 북쪽에 신라산이라고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는 대륙의 남단인 이곳 절강성 일대가 신라의 영토였음을 말해주는 물증이며, 청나라 때 편찬된 <대청일통지>에도 "임해현 서쪽 30리에 신라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산이 있는 절강성의 임해는 신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라 21대 소지마립간 때의 기사이다.

-15년 가을 7월에 임해와 장령 두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왜적을 방비하게 하였다(삼국사기)

그리고 신라 30대 문무왕 15년에 당나라로부터 임해군공이라는 봉작을 받았다는 기사도 있다.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임해가 경주 월성군 동쪽이라며 반도사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경주 월성군 동쪽 어디에 임해라는 지명이 있었으며,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작은 고을의 지명을 따서 신라왕에게 임해군공이라는 작위를 내린다는 것인가? 당시 중국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의 왕들에게 내린 봉작은 대부분 그 나라를 대표하는 지명들로 되어 있다는 상식도 모른단 말인가? 다시 30대 소성왕 2년의 기사를 보자.

-여름 4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꺾이고 기와가 날아갔으며...임해와 인화의 두 문이 무너졌다.
(인화-현재 광동성 북쪽에 인화라는 곳이 있다.)

-46대 문성왕 9년 봄 2월, 평의와 임해의 두 전을 중수하였다(삼국사기).
-47대 헌안왕 때 4년 가을 9월, 왕이 임해전에서 신하들과 회동했다(삼국사기).
-48대 경문왕 때에도 임해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49대 헌강왕 때의 기사에는 임해전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상 임해와 관련된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보더라도 신라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중국의 고지도에서 임해현에 신라산을 표기하고 있는 것은 대륙신라설을 확증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이렇게 보면 앞서 고구려가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겼다고 하는 내용도 당시 대륙의 절강성 일대에 있던 신라의 백성을 그 남쪽인 복건성 천주로 옮겼다고 설명하면 극히 자연스럽다. 한편 신라산이 표기된 임해는 절강성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곳이 신라의 강역이었다는 사실 역시
<삼국사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신라 41대 헌덕왕 8년 때의 기록이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려 절강 동쪽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나 되었다.

신라에 흉년이 들자 절강성 서쪽에 있는 복건성과 강서성 일대의 주민 170여 명이 동쪽에 있는 절강성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는 정확한 기록이다. 혹 한반도에 있는 신라 백성이 뱃길을 이용해 수백리 이상 떨어진 절강성까지 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소설 같은 얘기로,

굳이 대륙으로 간다면 가까운 요녕성. 하북성.산동성.강소성 등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멀리 양자강 이남의 절강성까지 간단 말인가. 앞서 절강성 서남에 있는 복건성의 천주에 대해 설명했는데, 대륙에 신라가 있었다면 천주에만 있었겠는가.

한편 <명사> 지리지에는 절강성 임해 앞바다에 高麗頭山이라는 섬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과 동시대인 청나라 때 편찬된 사서에 고구려 혹은 고려와 관련된 지명이 임해 앞바다에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은 이곳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재의 중국 지도에는 임해 앞바다에 高島와 頭門山이라는 두 섬이 나란히 표기되어 있는데, 모두 <명사>에서 말한 고려두산에서 비롯된 지명들이다. 현재 그 북쪽에는 牛頭山과 檀頭山이라는 지명도 절강성 내에 표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절강성 남쪽에는 평양이라는 지명도 있는데, 이는 대륙신라의 평양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는 신라 18대 실성이사금 12년 8월의 기록에서 "평양주에 큰 다리를 새로 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륙에 있던 신라의 평양에 다리를 새로 놓았다는 말이며, 만일 이를 한반도에 있는 평양에 다리를 놓는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다면 만인의 웃음을 살 일이다.

이 무렵은 고구려가 건재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편 고구려가 절강성 서남쪽의 복건성 천주로 신라의 백성을 옮겼다면 당시 신라와 백제의 남쪽까지도 진출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양서>와 <남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나라(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에 있다. 그 땅은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고 남과 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 접해있다.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에 신라가 있다는 기록이 한반도의 지리의 조건으로는 결코 성립될 수 없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실제로 절강성 동쪽에는 동지나해라는 큰 바다가 있으며, <양서> 제이전도 "바다 남쪽에 동이가 있다."고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위의 기록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의 북쪽과 남쪽에 도 있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절강성 서남쪽의 복건성 천주를 고구려가 차지한 뒤 신라의 백성을 옮겼다는 기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삼국의 영토가 '개의 이빨(犬牙)'처럼 얽혀 있다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그 때문인지 복건성 서쪽 광동성에는 조양과 한강이라는 지명이 있다. 한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부여(북부여) 제실 출신의 파소라는 여인인데, 이 파소는 훗날 선도산의 신선이 되었다는 것이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삼국유사>는 "선도산의 신모"라 하였고, <태백일사>는 "선도산의 성모'라 하였으며, <삼국사기>는 "선도산의 지선"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선도산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선도는 대륙의 여러 곳에서 사용된 지명으로, 현재에는 양자강 북쪽의 호북성에 선도시라는 지명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지만 중국의 고대 지도에는 선도산과 음이 같은 선도산이라는 산이 양자강 남쪽에 표기되어 있다.

그 위치는 신라의 임해전과 신라산이 있는 절강성 남쪽과 복건성, 강서성의 경계 지점이다. 이곳에 표기된 고대의 선도산을 현재의 중국 지도는 무이산맥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무이산이란 곧 동이의 산이라는 뜻으로, 이 역시 우리 역사의 잔영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대륙 지명들>

주지하다시피 현재의 한국 사학자들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삼국의 지명들을 거의 모두 좁은 한반도 땅에 끼워맞추면서 이것이 삼국의 전부인 양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삼국의 일부였을 뿐, 결코 전부가 될 수 없다. <삼국사기>지리 편에서 대륙과 관련된 지명들 중 대표적인 몇 곳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등주.우이현.임치현.동래군-이들은 모두 산동성에 있었던 지명임은 상식에 속한다. 특히 등주와 동래를 일명 등래라고 했다. 고대 산동성 일대에 있는 동이족을 우이 혹은 래이라고 했는데 우이현과 동래현은 이에서 비롯된 지명이며, 또 임치현은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의 도읍지였다는 것 역시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명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제.노.오.월 등지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2. 한양군.장사현-한양은 현재까지도 호북성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며, 고대에도 호북성에 한양이 있었다. 장사현 역시 호남성에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다. 지금은 모두가 시가 되었다.

3. 봉화현-한반도에도 봉화라는 지명이 있으나, 옛부터 현재까지 절강성 임해현의 동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삼국사기>에서 "이름만 있고 자세히 알 수 없는 삼국의 땅"이라 하여 소재를 밝히지 않고 지명만 기록해 놓은 것이 무려 360여 개에 이르는데, 이들 역시 대부분 대륙에서 사용하던 지명들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몇 곳만을 골라 그 소재를 밝혀보기로 한다.

1. 역산-현재 하북성 남쪽에 역현이 있고 이곳에 역수도 있으므로 역산 역시 이곳에 있었다. 옛 연나라가 있던 곳이다.

2. 래산.대산군-옛 제나라 땅인 산동성 일대에 있던 지명들이다. 래산은 동래군과 마찬가지로 래이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보이며, 대산이 산동성에 있는 태산을 말하는 것임은 상식이다. 현재의 지명으로는 안휘성에 대산이라는 곳이 있으며, 절강성 동쪽바다에 떠 있는 섬에도 똑같은 지명이 있다.

3. 임해진-임해 역시 신라와 관계가 깊은 절강성에 있는 옛 임해현을 말하며, 그 임해현 동쪽바다에 설치한 진영을 말하는 것이다.

4. 천주-앞서 살펴본 대로 현재 복건성에 있는 지명으로, 고대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지명 가운데 하나이다.

5. 악양성-호남성에 있는 유명한 동정호의 동쪽에 악양시라는 지명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산서성에도 똑같은 지명이 있었다.

6. 강릉향-이것이 한반도에 있는 강릉을 말하는 것이라면 김부식이 어찌 모를 수 있었겠는가? 강릉은 지금도 호북성에 남아 있는 지명이다. 그래서 김부식도 그 소재를 차마 밝히지 못했던 것이며, 앞서 고구려 편에서 설명한 사비성과 백암성의 위치도 밝혀놓지 않았다.

한편 현재 절강성에서는 임해시라는 지명뿐만 아니라 동양이란 지명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소지마립간 10년의 기사에 "동양에서 눈이 여섯 개 달린 거북을 진상했다."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또 절강성과 경계하고 있는 안휘성에는 황산이라는 지명도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진성왕을 황산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모든 증거와 정황들로 보아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 역시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활동했었다는 사실에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세 나라 모두 그 무게중심은 대륙에 있었다.



<신라의 자연현상>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인 문무왕의 왕릉 비문을 보면 신라김씨의 出自와 관련, 투후지윤이란 문구가 나온다. 풀이하면 투후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면 투후는 누구인가?

기원전 120년 한무제는 곽거병을 표기장군으로 삼아 흉노를 쳤는데 이때 흉노의 우현왕인 휴도(休屠)의 아들 김일제(당시 14세)와 그의 어머니가 포로로 잡혀왔다. 처음 김일제는 말기르는 노비가 되었으나 전공(戰功)을 세워 투후로 봉해졌다. 그러니까 김일제는 지금 산동성 투현을 식읍으로 삼았을 만큼 출세했던 것이다.

한무제의 임종시 부마도위 김일제는 봉거도위 곽광, 태복 상관걸과 더불어 어린 소제(少帝)를 보필하는 유촉까지 받은 3인 실력자 중 1인이 되었다. 김일제의 후손은 그 후 7대에 걸쳐 투후의 영예를 누렸다. 그런 김일제의 후손이었지만 그들은 흉노족 전한을 찬탈한 왕망이 신나라를 세울때 협조적이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15년 후 광무제 유수가 일어나 신제국을 토멸시키고 후한을 세웠다. 이런 왕조 교체기에 김일제의 후손들은 주살을 당하거나 유랑민이 되었다. 왕망이 바로 흉노 김일제의 후예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아무튼 유랑민이 되었던 김일제의 후손들 중 일파인 김알지가 기원후 65년 한반도 동남방 서라벌의 시림에 나타났다. 김알지, 그가 바로 신라김씨의 시조가 된다는 것이 문무왕릉 비문으로 유추해 본 내력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김알지가 굳이 먼길을 달려 한반도, 그것도 가장 모퉁이로 올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중국에서 발달된 곳은 겨우 황하 유역, 산둥반도 등의 장성이남이 고작이다. 역적의 후예라는 멍에를 쓴 유랑인들이 굳이 춥고, 험한 북쪽을 거쳐 다시 한반도의 동남부로 왔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의 남부 즉 양자강 유역으로 도망하지는 않았을까? 양자강 유역은 개발이 덜된 지역임과 아울러 기후도 좋은 곳이었다. 김알지가 고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이 통치하고 있던 지역을 통과하여 경주까지 내려가지는 못했을 것이며 아마 양자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나라의 기초를 열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륙신라의 건국 테마다.


삼국이 대륙을 근거지로 했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바로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홍수기록이다. 먼저 신라의 홍수기록을 살펴보면 2세기에서 4세기까지는 음력 4~5월에, 5세기 이후부터는 음력 6~7월에 큰물(홍수)이 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마와 같은 기상현상은 1백 ~ 2맥년 사이에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기록 역시 지구상에서 위치가 다른 두 곳에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음력 4~5월에 큰물이 나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강우량이 적은 곳이 어디인가.

동아시아에 산재한 기상측후소가 최근 50년 ~ 1백년간 축적한 강수량 자료를 분석해본 결과 양자강 유역과 그 이남으로 드러났다. 같은 방법으로 음력 6~7월에는 산동반도와 한반도 지역에 강우량이 많았고 이 시기 양자강 유역과 그 이남 지역은 강우량이 많지 않음도 확인됐다.

한편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와 고구려 본기에는 큰물 기록이 각각 7회와 6회만 나와 통계적 분석이 신라보다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백제의 경우 큰물이 발생한 달이 5월에 3회, 6월에 4회가 있었고, 고구려의 경우 5월에 3회, 6, 7, 8월에 각각 1회씩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백제는 신라보다 큰물이 한달정도 늦고, 고구려는 백제보다도 약간 늦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또 홍수와 가뭄에 대한 삼국시대 기록을 살펴보자. 삼국기에는 `신라 파사왕 29년에 홍수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도로 사신을 보내 정부의 양곡을 풀어 구제하였고'로 기록돼 있다. 파사왕 29년은 서기로 108년. 바로 이 해는 백제 기루왕 32년인데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 엉뚱하게도 백제에서는 `봄, 여름에 가뭄이 있어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같은 계절에 둘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빠져있는 상황은 마찬가지인데 신라쪽은 홍수 때문이라고 하고 백제는 가뭄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한반도에 삼국이 있었다고 할 때, 신라지역인 경상도와 강원도는 홍수로 난리가 났고, 백제 지역인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는 약 6개월 동안 가뭄이 들어 민심이 흉흉했다는 뜻이다.

기상관측 전문가이면서 재야사학자인 정용석씨는 이 기록은 한반도의 기상원칙으로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지구의 자전원칙과 전향력을 볼때 북반구에서는 기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상식이며 따라서 한반도에서 위와 같은 상황이 되려면 대륙에서 이동한 습기가 많고 규모가 큰 저기압이 황해를 건너오는 도중에 바다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공급받아 일단 백제 땅을 껑충 뒤어넘은 뒤 경상도와 강원도 땅에서 포화상태가 된 수분에너지를 뿌릴 때 신라지역에서는 홍수가 발생한다.

그럴경우 같은 시기 6개월 동안의 긴 가뭄을 일으킨 큰 고기압 덩어리는 한반도에 있을 자리가 없게 된다. 이렇게 오랜 기간 지속적인 가뭄 현상을 일으키는 공기 덩어리는 그 규모가 최소한 수백㎞에서 수천㎞의 반경을 유지하며 요지부동이거나 이동속도가 아주 느린 특성이 있다. 기상학 용어로는 블로킹 기단이라고 하는데 강수현상을 일으키는 공기 덩어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범위가 크고 넓다. 즉 백제뿐 아니라 홍수상황에 있는 신라와 고구려까지 가뭄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기록 자체가 잘못 됐거나 아니면 삼국의 위치가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삼국의 기후현상이 현 한반도쪽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기상 증거는 더 많이 나타난다. 다음 기록을 보자.

신라 벌휴왕 9년(서기 192년) 여름 4월에 눈이 3자나 내렸다. (삼국사기)
신라 눌지왕 41년(서기 457년)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삼국사기)
백제 기루왕 23년(서기99년)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콩을 죽였다. (삼국사기)

먼저 여름 4월은 지금으로 말하면 양력 5월 6일 입하가 지난 때이다. 한반도의 신라지역은 대체로 12월 하순을 전후해 첫눈이 내리고 늦어도 3월 초순이면 눈이 그치는 곳이다. 또 지금의 경주는 3, 4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에만 눈이 내릴수 있는 따뜻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곳이다. 그런데 벌휴왕 9년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눈이 34자(76㎝ 추정)나 내려 극심한 피해를 주었다면 보통의 기상이변이 아니다.

옛날 제왕들은 때아닌 계절에 눈이나 서리가 내려서 곡식을 해치는 일이 생기면 정사를 잘못 처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판결한 죄인을 다시 심사하거나 가벼운 죄인은 석방하는 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사서에서도 기상이변을 비중있게 다루는 것이다.

문제는 신라에 기상이변이 발생했다면 홍수 때의 공기 이동처럼 백제땅에도 더 많은 눈이 내려야 한다는 점이다. 백제의 기상현상은 신라지역보다 대개 1개월 이상 빨리 내리고 또한 경주보다는 늦게 까지 내리게 된다. 그런데 백제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서리현상은 더욱 그렇다. 눈의 경우 간혹 한반도 백제에 많이 내리고 신라에 적게 내릴수는 있어도 서리는 그렇지 않다. 대륙에서 찬 공기가 이동해 와 한반도에서 그 성질을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서리는 신라 따로, 백제 따로 구분해서 내리지는 않는다. 특히 곡식을 해칠 정도의 무서운 서리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곡식을 망가뜨릴 정도의 서리가 백제 지역에 내렸다면 경상도와 강원도 산악지방에 서리가 내리지 않을 확률은 0%에 가깝다.

그러나 백제에 피해를 준 서리가 신라에는 나타나지 않고 반대로 신에 피해를 준 서리는 백제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역시 삼국이 한반도에서 인접해 있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번에는 화산활동 기록에 대해 살펴보자.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천4백여년 전에 신라국에서 화산 폭발과 화산 활동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와 고구려에는 지진 기록만 있을 뿐이고 화산 기록만큼은 신라가 유일하다.

-신라 진평왕 31년(서기 509년) 봄 3월에 모지악산의 땅이 탔다. 구덩이 너비가 4보, 길이가 8보, 깊이가 5척이나 되었고 10월 15일에 꺼졌다.
-신라 무열왕 4년(서기 657년) 가을 7월에 동악 토함산의 땅이 타서 3년 만에 꺼졌다.

국내 사학자들은 모지악 산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했고, 토함산은 현재 그대로 경주에 있는 산으로 보았다. 또 토함산의 화산활동에 대해 일부 사학자는 LNG나 LPG의 천연가스 폭발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들 화석연료가 생기는 층이 경주 일대에 있어야 하는데 세계지질학계 보고에 의아면 한반도는 석탄 이외에는 화석연료가 없는 지층이라고 판정하고 있다.

또 만약에 경주 함산에서 천연가스가 3년 동안이나 뿜었다고 한다면 최소한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해발 7백 50m의 평범한 화강암석으로 이루어진 경주 토함산은 천연가스가 나올 수 있는 산도 아니고 더더욱 화산폭발에 의한 휴화산도 아니다. 한반도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토질과 석질의 산인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은 분명히 토함산이 화산활동을 했음을 보여준다.

먼저 화산활동에는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지진이 따라붙는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열왕때 토함산이 불기둥을 뿜기 2백41년전인 실성왕 15년(서기416년)에 토함산이 무너져 샘물이 솟았고 물기둥의 높이가 3장이나 되었다는 기록과 1백 86년전인 자비왕 14년(서기 471년)에는 신라의 서울 땅이 갈라져 동서남북 넓이가 20장이나 되는 대규모 강진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토함산은 화산활동을 하기 전에 전주곡으로 지진현상까지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토함산은 어디에 있을까. 중국 안휘성 소호시 합비라는 곳에 있는 함산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토함산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화산으로 용암을 뿜어내는 활화산일 때는 토함산이 되지만 요즘 말하는 휴화산일 때는 토(吐)하지 않기 때문에 함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대륙의 지형지리지인 중국지에 의하면 함산은 화산활동을 한 적이 있는 휴화산이고, 그 인근의 합비지역은 화산활동의 여파로 토질이 좋아 작물이 잘자란다고 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천문학고 박창범 교수는

「삼국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삼국사기에 나타난 일식현상의 기록을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최적관측지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에서, 그것도 서로 지역을 달리해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라의 경우 일식 기록이 있는 2세기 까지는 최적관측지가 중국 양자강 유역으로 표시된 반면, 7세기 이후즉 후기 신라(통일 신라)는 한반도로 나타났다. 또 백제는 발해만 유역, 기록횟수가 가장 적은 고구려(11회)는 백제보다 더 북방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증거로 볼 때 고대 삼국의 무대는 중국대륙이라는 결론이 나오고 만다.
이에 대해 박창범 교수는 다음의 두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한반도의 삼국 사람들이 중국 대륙에 있던 특정 집단들과 연관을 맺어 천문학적 기록 혹은 역사기록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었을 가능성이다. 즉 한반도의 백제는 백제대로, 신라는 신라대로 중국대륙의 인연있는 집단 혹은 국가들과 교류를 맺어 이같은 자연과학적 현상을 자기것으로 만들었으리라는 점이다.

둘쩨는 삼국시대 초기에 삼국은 중국대륙을 주무대로 한반도를 변방 정도로 취급해 활동하다가 여러가지 정치 사회적 이유로 나중에 한반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 이같은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 천문학적 현상으로도 나타난다. 신라의 일식기록은 서기전 50년경에서 서기 200년경 사이에 집중적으로 보였다가 이후 4백년간 기록의 공백상태를 거친 다음 서기 600년경에서 943년 사이에 다시 관측기록이 보인다는 점이다.

즉 신라의 주세력이 중국에 머물다가(이때는 최적관측지가 중국 양자강 유역) 4백년간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7세기에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최적관측지가 한반도로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증거자료들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신라가 개국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이 또한 문제점이 많다. 왜냐하면 한반도 내에 위치한 고고학 자료나 비문 같은 데서 기반한 사료도 적지 않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고대사의 난해한 수수께끼 중 하나다.

중국에서도 (토)함산이 있고 한반도에도 토함산이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고대 신라인에게 있어서 한반도, 특히 남부지방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신개척지가 아니었을까? 영국의 York 지방사람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모여살게 된 지역을 New York이라 했던 것처럼 중국에서 자신들이 살았던 지역의 이름을 그대로 한반도에 가져와 이름 붙였던 것은 아닐까?

신라는 신라(新羅)라는 국명을 처음부터 가졌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새라, 서라, 서라벌, 계림등으로 불리다가 국명을 한자화 하면서 신(新)과 라(羅)로 이름을 정하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나라'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과연 신(新)자가 뜻하는 바는 단순한 새로움일까? 나라(수도)의 위치를 이동한 새로움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중국남부에 한국문화(언어포함)가 동심원을 그리며 넓게 분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즉 점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쪽을 답사하신 분들이 쓰신 책이 나왔는데, 일부지역에 가셔서는 너무나 놀라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부에서 말하는 삼국의 재중국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한국문화의 집중적이며 불균일한 분포를 설명하여야 합니다. 국내 사학자들이 언어학자들의 견해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주 이유가 이것이기도 합니다.

중국에는 백제계, 고구려계, 신라계 명칭이 상당수 있습니다. 물론 백제계 이름이 가장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백제계 명칭은 바로 "백제"입니다. 이것을 첫 번째 이론으로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중국사서에 백제라는 단어가 최초로 나오는 것은 4세기입니다.(그 최초의 백제가 한반도의 백제가 아니고 중국대륙의 백제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것은 일본학자들이 온조왕부터 계왕까지는 조작이며, 4세기 근초고왕이 실제적인 건국자라는 주장을 할 때마다 쓰입니다. 이에 대해 국내 재야 사학계는 본래 백제가 중국대륙에(예: 발해만 연안) 건국했던 나라이며, 나중에(4-5세기) 한반도로 중심이 옮겨 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중국사학계는 침묵이 원칙이나, 백제가 중국동남부를 지배했었다는 의견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고 봅니다(이 경우 중국인의 침묵은 동의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중국의 일부에서 아주 혁신적인 의견이 나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중국대륙에 우연히도 한반도의 백제와 이름이 같았던 백제라는 또 하나의 나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중국대륙의 백제사는 중국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구려사를 뺏어가려고 기도하던 저들이 백제사 마저 뺏어가려고 술수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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