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

"가야는 천축국이다!"

대동이 2007. 7. 30. 14:46
[단독보도] "가야는 천축국이다!"
"조선의 천축국은 아세아 각국을 불국정토를 이루었다 "
박병역 위원
[제 12편] 중국의 황하 문명은 BC 3500년경부터 황제가 등장하여 황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궁궐을 짓고 찬란한 황금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현행 국사는 중국과 이웃한 고조선의 단군은 석기시대의 부족장이며, 우리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음을 말해 준다.고 기술돼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국조 단군왕검이 개국한 BC 2333년부터 BC 108년까지 무려 2천여년의 역사는 공백 상태이며, 기원전 194년 위만이 준(準)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고부터 비로소 철기문화가 확산되었다. 라고 어처구니없는 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 © 박병역 위원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일왕의 충견(忠犬:똥개) 이병도가 거짓 가짜로 만든 국사교육에 무려 62년 동안 세뇌되어 분별력을 상실하여 “고증에 의한 역사적 진실”도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얼빠진 한국인이 어찌 [가야는 천축국이다]를 믿을 수 있겠는가? 본 주제를 이해하고 납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조선 삼한의 역사부터 약술합니다.

[1],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

[중학교 국사] 고조선은 만주 요령지방과 한반도 서북지방에는 족장(군장)이 다스리는 많은 부족들이 나타났다. 단군은 이러한 부족들을 통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리하여 기원전 4세기경에는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잇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2세기경, 서쪽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년). [고조선]은 이때 비로소 철기 문화가 확산되면서 위만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한반도 남부 지방에 위치한 진(辰진한,마한,변한)의 여러 나라와 중국의 한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어 부강해졌다. 고조선이 강성해지면서 한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커 가자, 한은 대군을 보내어 수도인 왕검성(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은 막강한 한의 대군을 맞아 1년 동안 버티면서 잘 싸웠으나, 결국 한무제(漢武帝)의 막강한 군사들에게 왕검성(평양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한무제는 북한 지역에] 한4군(낙랑, 진번,임둔, 현도)을 설치하고 조선을 속국으로 삼아 식민지로 다스렸다.) (중학교 국사 18쪽)

[2]. 우리나라의 국조는 단군인가? 위만인가?

[고등국사 36쪽 도움글] (연(燕)나라 사람 도적 괴수) 위만은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후략)


고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있다. 라고 기술하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은 국사에서 삭제하고, 연나라에서 도망쳐 조선으로 망명해 온 후 왕검성에 쳐들어와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194년 위만이 고조선의 왕이 된 후부터 고조선이 강성해 졌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도적 위만을 우리나라의 국조로 받들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현행 국사는 지금 북한지역은 한4군을 설치했기 때문에 기원전 2세기경은 한반도 남부 지방에 위치한 진(辰진한,마한,변한)만이 우리나라의 영토이기 때문에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은 허구가 아닙니다. 특히 고조선은 나라가 아니고 부족이며, 제사장(祭司長)의 단군(壇君)은 부족장입니다. 도대체 교육인적자원부, 국사편찬위원회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배우는 국사교과서에서 첫 장부터 고조선은 멸망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식민지가 되어 고조선 백성들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중학생들은 중국의 역사를 배우고 있는가? 한국의 국사를 배우고 있는가? 어찌 패배의식의 망국적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삼한이 멸망한 역사부터 기술”하여 우리민족을 철저한 “패배의식과 사대주의적 식민지의 역사를 특별히 강조”하여 대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 시켰던 것입니다.

[3].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삼한(진한,마한,변한)

(1). 제 1세 진한왕 단군왕검

단군왕검은 BC 2357년부터 BC 2333년까지 24년간 황제헌원의 유웅국을 섭정하고 9이의 추대로 BC 2333년 제위에 올라 조선을 삼한으로 나누었다. 진한은 단군이 직접 다스리고, 웅백다를 마한왕으로 봉하고 치우천왕의 후손 치두남을 변한왕으로 동시에 봉했기 때문에 9이국(九夷國)의 영토가 곧 조선이며 또한 삼한입니다. 따라서 고조선과 삼한은 다른 시대가 아니라 단군왕검이 삼한(三韓)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고조선은 세계적 대국이었다.

진한왕 단군(壇君)은 삼신(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이며, 삼한의 영토를 관리하고 삼한의 왕위를 임명하는 왕권을 갖고 있었다. 단군은 진한왕으로 93년을 제위하고 BC 2239년 3월 15일 130세로 봉정(蓬亭)에서 돌아가셨다. 고조선 삼한의 진한은 제1세 단군왕검부터 제 47대 고열가(BC 295~BC 238)임금까지 2096년의 역년이 있습니다.

(2). 제1세 마한왕 웅백다

단군왕검은 熊伯多(웅백다)를 마한(馬韓)왕으로 봉하고, 옛 환웅천왕의 신시(紳市:천산)지방을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월지국(月支國=목지국(目支國)에 정했다, 일명 백아강(白牙岡)이라 한다. 마한은 제 1대 웅백다부터 35대 맹남까지 1385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3). 제 1세 변한왕 치두남

단군왕검 원년 무진(BC 2333년)에 치우천왕의 후손 치두남을 번한 왕으로 임명하고 虞(우)의 정치 감독을 겸하게 하였다. 치두남은 경자(BC 2301년)에 요중(遼中:요녕성)에 험독(險瀆), 영지(令支),탕지(湯池), 통도(桶道), 거용,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장령(長嶺),갈산(碣山),여성(黎城)의 열두 개의 성을 쌓았다.

변한은 제1대 치두남부터 제30대 기자(箕子) 성군(聖君)을 지나 제74대 기준(箕準)왕까지 2138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輿地勝覽(여지승람)에서 이르기를 변한의 제 74세 애왕 휘(諱) 준(準=武康王(무강왕:애왕)은 秦始皇(진시황) 27년 신사(B.C 220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정미(B.C 194년) 燕(연)나라 사람 衛滿(위만)이 침략해 오자 佐右宮人(좌우궁인)을 거느리고 海城(해성:요녕성)에 들어가 후 마한을 건국하고 그해에 돌아가셨다.

▲ ©박병역 위원



1. 북부여 제 1세 시조 해모수[45년 (BC 239-195년)재위.]

진한의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7년 임술(BC 239년) 4월 8일 북부여 해모수가 백악산 아사달(녹산)에서 일어나 진한의 법통을 계승하고, 해모수가 왕권을 갖게 된다. 원년 임술(BC 239년)에 천제 해모수解慕漱(BC 239-195년)의 자태는 영웅적 기질로서 용맹한 神人(신인)이며 사람이 바라보면 몸에서 빛이 발사되어 사람들은 天王郞(천왕낭)이라 불렀다. 그의 나이 23세에 하느님의 명에 따라 세상에 내려오시니 이때 진한의 단군 고열가 재위 57년 임술(BC 239년) 4월 8일 이었다.

웅심산에 의지하여 蘭邊(난변:길림성 서란)에 궁전을 건축하였다. 항상 까마귀 깃털을 의관에 꽂고 허리에 용을 새긴 빛나는 칼을 차고 오룡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다녔다. 따르는 500명의 시종들과 아침에 政事(정사)를 듣고 저녁에 하늘로 올라갔다. 2년 계해(BC 238년) 3월 16일에 하늘에 제사하고 烟戶法(연호법:선조의 묘를 지키는 법)을 제정하여 5가의 병사를 나누어 주둔하고 밭을 만들어 자급하게 하고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셨다.

8년 기사(B.C.232년)에 해모수 단제께서는 무리를 이끌고 진한의 옛 도읍으로 가시어 5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진한의 5가(五加)들은 공화정치(共和政治)를 철폐하였다. 이에 만백성들이 해모수를 추대하여 제사장의 단군(壇君)이 되었다. 겨울 10월 사람의 교육은 반드시 어머니 태교부터 가르치도록 명하시고 양태모법(養胎母法)을 공포하였다.

11년 임신(B.C.229)년 北漠(북막)의 추장 山只喀隆(산지객융)이 寧州(영주)를 습격하여 巡察使(순찰사) 穆遠登(목원등)을 죽이고 큰 약탈을 하고 달아났다. 19년 경진(B.C.221년)에 箕丕(기비)가 죽으니 아들 箕準(기준)이 父王(부왕)의 후계를 세습하게 하고 조선의 변한왕으로 봉하고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 나라의 침공에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도록 하였다. 연 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西鄙(서비)를 침략하고 滿番汗(만번한)까지 국경으로 삼았다. 20년 신사(B.C 220년)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7월에 336간의 궁궐을 지어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해모수 재위 B.C.219년 한(韓)나라 張良(장량)은 한이 진시왕에게 망하자 그 원수를 갚는 다고 가재를 털어 자객을 구하고 역사를 구하였다. 이때 자객으로 선발된 창해(滄海)역사 黎洪星(여홍성)은 120근의 철퇴를 만들어 하남성 동남쪽의 박랑사를 유람 중인 진시왕정을 습격했으나 빗나가 부차만 박살냈다. 장량은 거사가 미수에 그치자 그 뒤 수배자 몸이 되어 숨어오다가 한나라 시조 유방과 함께 진시왕정을 타도하고 한나라 창업공신이 된다.

해모수 재위 31년 임진(B.C.209년), 진승(陳勝:진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지도자)이 군대를 일으키니 秦(진)나라 사람들의 생활이 크게 어려워졌다. 이에 연, 제,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조선의 변한 땅으로 수만명이 귀순해 왔다. 이들을 雲障(운장) 지방에 상하로 나누어 살도록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하였다.

38년 기해(B.C.202년), 연 나라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 浿水(패수 지금의 난하:이병도 대동강)를 경계로 삼았다. 45년 병오(B.C.195년), 연 나라 노관이 漢(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자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은 [북부여 해모수 천제]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B.C.194년 조선 삼한 중 변한의 기준왕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雲障(운장) 땅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연(燕)나라의 도적 괴수 위만(衛滿)은 준왕의 은혜를 배반하고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왕검성(王儉城)에 쳐들어 와 준왕을 몰아내고 조선의 변한왕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 현행 국사는 위만에게 패한 준왕이 해남(海南)으로 들어가 강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9세왕이 무려 202년을 존속한 후마한 세계(後馬韓 世系)가 뚜렷이 전하고 있습니다.

2. 기준(箕準) 후마한(後馬韓) 건국

후마한 세계(後馬韓 世系)

1世 武康王(一云 哀王) 諱準 丁未(B.C 194年)

移都馬韓其年薨哀王己入於都平壤 四十一世 則馬韓王位八世.

2世 康王 諱卓 惠帝二年 戊申(B.C 193年)立 在位 四年 --☞-公孫卓(공손탁)

3世 安王 諱龕 惠帝六年 壬子(B.C 190年)立 在位 三十二年

4世 惠王 諱寔 文帝後元七年 甲申(B.C 157年)立 在位 十三年

5世 明王 諱武 景帝十三年 丁酉(B.C 144年)立 在位 三十一年

6世 孝王 諱亨 武帝二十八年 戊辰(B.C 113年)立 在位 四十年

7세 襄王 諱燮 宣帝本始元年 戊申(B.C 73年)立 在位 十五年

8세 元王 諱勳 宣帝神爵四年 癸亥(B.C 58年)立 在位 二十六年

9世 稽王 諱貞 成帝建始元年 己丑(B.C 32年)立 在位

후 마한세계(後馬韓世系)

후마한 1세 武康王(무강왕, 哀王(애왕)의 諱(휘)는 準(준)이다. 정미(B.C 194년) 마한의 땅이었던 해성(海城:요녕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해 돌아가셨다. 즉 위만에게 패한 조선 의 변한왕 準(준)은 도읍을 해성으로 옮긴 후 마한을 재 건국하였던 것이다. 후마한의 제 8세 元王(원왕)의 諱(휘)는 勳(훈)이고 계해(B.C 58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는 26년이다.

신라왕 박혁거세는 조선 삼한 유민(遊民)들의 추대로 甲子(BC 57년:후마한 원왕 22년)에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은 갑신(B.C 37년)년에 졸본천에서 건국하여 진한과 마한지역에 두 나라가 나란히 다시 일어셨다.

후마한의 8세 원왕(元王)과 9세 계왕(稽王)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후손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의 鮮于氏(선우씨)는 黃龍國(황룡국)에서 들어왔고 한 사람은 韓氏(한씨)라 칭하고 한 사람은 奇氏(기씨)라 칭했다. 수유족(須臾族)은 원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다. 마한왕의 후손 중 일부는 수유족(須臾族:변한왕 기자족)의 우두머리를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다 하여 성을 선우씨(鮮于氏)로 하였다.

또한 조선의 변한왕 기준(箕準)이 마한(韓) 지역으로 이동하여 후 마한을 재건하고 한왕(韓王)이라 칭하여 성을 한씨(韓氏)라고 불렀다. 기자족(箕子族)은 원래 수유족(須臾族)이라 하며 箕子(기자)의 성은 기씨(奇氏)이며 箕(기)와 奇(기)는 같이 쓰인다. 9세 稽王(계왕)의 휘는 貞(정)이다. 기축 B.C 32년에 왕위에 오르고 갑진(B.C 17년)에 백제의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계왕 16년(B.C 17년), 只保圓山(지보원산:요동), 錦峴城(금현성:요동성) 新莽(신분) 두 성이 백제의 온조왕에게 항복하므로서 후마한은 결국 멸망하였다. 제 1세 武康王(강왕)부터 8세 稽王(계왕)까지 202년을 계승하였다.

후 마한의 1세 무강왕(애왕) 휘 준은 정미(BC 194년) 마한 땅에 도읍을 옮기고 그 해 죽었다. 마한세계는 처음 조선왕 준은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海南(해남:해성:평양성:요녕성)으로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마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 대가 끊어지고 마한 사람들이 다시 진왕을 세웠다. [후한서 한전.] 라고 돼있다.

[후조선 1세 箕子(기자)부터 [제 37세 가색(可索)왕(BC 375~341년)까지는 조선 삼한은 태평했으나 [제 38세 해인(解仁)]왕은 일명 산한(山韓)이며, BC 341년에 즉위하여 1년 간 재위 중에 자객에게 시해 당했다. 아들 수한(水韓)이 BC 340년 [제 39세 왕위에 즉위하여 17년 간 재위했다. BC 339년 연(燕)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 와서 안촌홀(安寸忽)을 공격했다. 또 험독(險瀆)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須臾)의 사람 기후가 자제들과 병사 5000명을 거느리고 전투하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였다. 곧 계성의 남쪽을 공격하자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대신을 사신으로 보내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년에 수한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 이에 기후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군사를 이끌고 변한의 궁에 들어가서 스스로 조선의 변한왕이라 칭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允許)를 청하자 진한의 보을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연나라 침략에 굳게 대비하라 하였다.

[제 40세 기후(箕詡)]왕은 무술(BC 323)년에 즉위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기후왕 즉위를 축하했다.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이 즉위했다. [제 41세 기욱(箕煜)왕]이 죽고 신미년에 아들 기석이 즉위했다. [제 42세 기석(箕釋)왕]은 신미(BC 290)년에 즉위하고 39년 간 재위하였다. 각 주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였더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명이었다. 재위 10년(BC 281)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介)가 공격해 들어오니, 막아 싸웠으나 패하여 서비(西鄙:돌궐)까지 천리의 땅을 잃었다.

연은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의 5군을 설치하여 연과 번한은 만번한(滿番汗:하북성)이 국계가 되었다.

▲ © 박병역 위원


3. 5가들은 월지(月支)에 중 마한 건국

[진한의 47세 고열가 단제 재위 58년(BC 238) 3월 오가(五加)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옛날 우리나라는 개국하고부터 여러 聖人(성인) 선조님이 대통을 계승하고 임금은 솔선수범하며 백성을 잘 다스려 그 덕이 멀리까지 미치었으나 지금 세상은 법과 王道(왕도)는 다 없어지고 여러 제후들은 힘으로 다투는 전투장이 되었도다. 짐은 덕이 없어 제후들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민심이 떠나 백성들이 흩어지니 나라를 편안히 통치할 방책이 없도다. 너희 5가(五加)들은 어진 임금을 천거하라 하고 옥문을 활짝 열고 사형수이하 모든 포로들을 다 석방하고 이튿날 드디어 왕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서 수도(修道)하여 신선이 되었다. 이에 조선 3한의 오가들이 함께 6년 동안 공화정치로 국사를 다스렸다.

북부여 해모수 천제가 BC 194년 돌아가자 이윽고 북부여의 5가들은 대장군 탁(卓)과 함께 산을 넘어 탁이 태어난 고향의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여 중마한(中馬韓)이라 칭했다. 이때 5가들은 각자가 받았던 땅 백리를 받아 수도로 정하고 변한, 진한의 두 한도 재 건국 되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고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은 없었다. 즉 본래 진한왕에게 왕권이 있었으나 이때부터 마한왕이 왕권을 갖고 제사장이 되었던 것이다. 북부여의 5가들은 마한의 제1세왕 웅백다의 도읍이었던 월지국(月支國=달지국(達支國=일명 백아강(白牙岡)으로 들어가 중마한을 건국하였던 것이다. 한전(漢傳)의 마한 54국과 진한과 변한의 각각 12 제후국의 78국은 이때의 국명이라 사료된다. 상기의 본문 고증(考證)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오늘날 우리 앞에 선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는 이미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니 어찌 고질병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삼한은 세계적 대국입니다.

1. 삼한은 무려 78국이 있었다.(통한의 한국역사 97쪽)

삼국지 漢傳(한전)에 기록된 마한 54국은 원양국(爰襄國), 변수국(弁水國:牟襄水國), 상외국(桑外國:桑水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신분활국(臣濆活國:臣濆沾國),백제국(伯濟國),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고탄자국(高誕者國), 고리국(高離國),노남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目支國)이 있었다. 중국 서부지역을 옛날에 月支國(월지국)이라 칭하였다. 조선의 후 삼한(천축국) 중의 마한은 54개의 제후를 거느리고,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의 제후국이 있었다.

◆ 월지국(月支國)의 역사적 진실

1.마한 54개 제후중의 월지국을 월씨국이라 한다.

月支國(월지국)은 西域(서역) 말로 또는 月氏國(월씨국:)이라고도 하며, 서역의 큰 왕국이다. 이 종족은 원래 중국의 감숙성 돈황과 祁連(기련) 사이에 살다가 BC 174년에 흉노에게 쫓겨 伊犁川(이리천)과 悉陀犁耶川(실타리야천)의 상류인 熱河(열하)의 남방으로 옮겼으나 BC 158년경 다시 烏孫(오손)의 침략을 받아 지금의 samarkand(사마르칸트) 지방에 근거를 정하고 塞種(새종:현 인도)을 征伐(정벌)하고 위水(위수) 연안의 大夏國(대하국)을 정복하여 대왕국을 건설하였다. 오손(烏孫)은 신강성(新疆省) 천산 산맥 일대에 있다.

제3세 迦泥色迦王(가니색가왕) 때에 세력이 크게 떨쳐 서쪽으로는 페르샤(이란)의 동부에서부터 중앙아세아 인도에 걸친 乾陀羅(건타라) 왕국이 되자 불교의 外護者(외호자)가 되고 500명의 阿羅漢(아라한)을 모으고 大毘婆沙(대비파사)를 편찬함. 그 후 불교가 大成(대성)하여 支婁迦懺(지루가참)등 많은 스님들이 중국에 불경을 전하고 支亮(지양), 支謙(지겸), 法護(법호), 支法度(지법도), 支道根(지도근),支施崙(지시륜) 또는 支姓(지성)의 著者(저자) 모두 月支國(월지국) 사람들이다. 이 나라가 멸망한 것은 미상이나 5C경으로 보고 있다.
<불교 사전 참조>

2. 중 마한의 5가들은 5天竺國(천축국)으로 발전했다

중마한의 5가들은 BC 158년 오손(烏孫)의 침략을 받고 다시 남하하여 5천축국으로 번성했다. 인도, 베트남,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일대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후한(後漢서기 25~220년)때는 청해성, 감숙성, 서장성, 운남성까지 확장하여 국토는 약 3만리가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천축국은 진한의 5가들이 세운 나라이며, 5천축국은 각각 수십 개의 제후를 거느린 소천축국(小天竺國)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 천축국은 인도가 아니고 고조선이다.

[산해경(山海經)의 海內經(해내경)],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1, 동해(東海) 안쪽과 北海(북해:청해, 바이칼호)의 모퉁이에 나라 이름이 朝鮮(조선)이 있는데 天毒(천독)이라 했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안사고(顔師古)는 연독(捐毒)은 곧 신독(身毒)이며, 신독(身毒)은 천축(天竺)이라 칭했다.

(나). 신라, 가야(伽倻)를 동천축이라 불렀다

감숙성은 蒙新(몽신) 靑藏(청장)과 황토고원의 접속지대로서 해발 1,000m이상이다. 烏 嶺(오초령), 北山(북산) 산맥과 祁連(기련)산맥 사이에 길이 1200km 되는 河西走廊(하서주랑)이 있는데 옛 비단길이 이곳을 지났다. 감숙성 蘭州(난주)를 金城(금성)이라고 불렀다. 이곳이 바로 이른바 실크로드 지역이며, 신라 혁거세왕의 초기 건국지이다.

통전(通典)에 의하면 동서남북 위치에 따라 5천축국(五天竺國)이라 칭했다. 천축국 사람들은 만신(萬神)을 거느렸으며, 天理(천리)를 거역하는 자는 항복을 받아 正道(정도)로 교화하여 바른 사람으로 돌아오게 했다. 왕은 단정한 차림으로 아침 해를 맞아 절하고 엄숙하였으나 인자(仁慈)하였으며, 성현(聖賢)의 업적을 이어받기 위해 힘쓴다. 라고 했다.

천축국은 전한(前漢 B.C.206∼AD.220년) 때는 신독국(身毒國)이라 칭했으며, 신독국이 곧 천축국이라 칭했다. 후한(後漢 A.D.25∼220년) 때부터 조선을 천축국이라 칭했다. 당(唐)의 요사겸(姚思廉)이 지은 양서(梁書)의 중천축국(中天竺國)편을 살펴보면 대월지국(大月支國)의 동남쪽으로 수천리 떨어져 있으며, 남부의 서장성(西藏省), 사천성(四川省), 운남성(雲南省) 동남까지 광범위한 지역까지 확산돼 있었으며, 그 지역은 3만리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7천만 대한국인아! 위치상 가야와 신라는 확실히 천축국이 틀림없지 않는가?

▲ © 박병역 위원

조선의 천축국은 아세아 각국을 불국정토를 이루었다

고조선 삼한 중의 진한왕은 제천단(祭天壇)에서 옥황상제(삼신,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祭司長)을 단군(壇君)이라 칭했다. 제사장의 진한왕은 반드시 천리(天理:진리의 정법, 無爲法(무위법:4상8괘법)에 통달한 부처(佛, 聖人)만이 단군(檀君)이 될 수 있었다. 하느님을 숭배하고 성불(成佛)한 부처의 나라 고조선을 천축(天竺)이라 불렀습니다.

당시 춘추전국시대(BC 475~221)에 한(韓),위(魏),조(趙),제(齊)의 신흥국과 진(秦),초(楚),연(燕)의 7국을 '전국7웅'이라 한다. 이 7국들 간의 전쟁 끝에 BC 223년 마침내 진이 초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2년 후에 한족(漢族)은 최초의 통일왕국을 수립했다.

즉 제천단에서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이 되기 위한 봉국쟁탈(封國爭奪)의 전국시대를 맞아 고조선 삼한은 거의 멸망에 이르자 하느님은 제사장의 나라 고조선에 성인(聖人, 佛(부처)을 탄강(誕降)시켜 본래의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 불법(佛法) 교화시대가 이루어졌다. 당시 아세아 각국은 불교를 숭상한 부처의 나라 천축국(후 삼한)의 제후이었다. 즉 조선의 천축국은 중국 본토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하고 아세아 전체를 조선의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이루었던 것이다. 중국의 각처와 인도, 태국, 베트남 등의 불교 유적물이 대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조선의 5가들이 아니고 어느 나라 누구가 불법을 전수했겠는가?

우리나라는 성인(聖人)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2천여년 전 우리나라의 후 삼한시대는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아들 신라의 박혁거세(BC 57년)와 고구려의 동명성제(고주몽:BC 37년)를 비릇하여, 가야의 김수로왕(서기 42~198년)과 신라의 제4대 석탈해왕은 모두 다 일체지혜(一切智慧)에 형통한 성인(聖人)이시다. 세계 각국에서 성인(聖人)이 왕위를 계승한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 밖에 없었다. 국왕이 친히 제천단(祭天壇)에서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한 제사장(祭司長)이기 때문에 당연하였다.

우리나라는 지혜에 형통한 성인(聖人), 혹은 인자(仁慈)하고 덕성(德性)을 겸한 어질은 임금이 왕위를 계승하고, 도리(道理:음양5행:천리)와 6예(六藝)로 백성을 교화(敎化)하여 동이(東夷)를 군자(君子)국 혹은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중국을 비릇하여 다른 나라는 투쟁에 의한 무력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백성들에게 도리(道理) 교육이 없었다.


중국의 요(堯) 임금은 도당(陶唐)씨의 추장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다수의 군주(君主)들은 소부족을 이루어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약탈(掠奪)을 일삼던 도적 추장이나 혹은 무력(武力)에 의한 투쟁으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보통 1~2년을 재위하고 망하거나 길어야 5~10년을 넘지 못하고 망한 나라가 수없이 많았다.

중국은 오랑케를 올량합(兀良哈)이라고 쓴다.

오랑케는 1명의 추장 밑에 수십 호의 소부락을 이루어 깊은 산골에 살면서 지나가는 유랑객의 보물과 금전을 빼앗거나 혹은 남의 부락을 몰래 들어가 재물을 약탈한 산적(山賊)을 오랑케족이라 불렀다. 중국의 군주들은 날마다 전투를 일삼았기에 오죽했으면 공자(孔子)는 동이(東夷)에서 살고 싶어 했을까? 중국이 올량합(兀良哈)인가? 동이(東夷)가 오랑케인가?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침략자 들이 거짓 가짜로 만든 국사지식의 왜독에 넋을 잃은 한국인아! 우리나라는 진실로 성군(聖君)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보통 700~1천년을 존속한 반면 중국은 서기 9년 왕망이 신(新)나라를 건국하고 서기 220년까지 역대왕은 1~5년 재위하고 다 망하였다. 중국의 역대왕은 성군(聖君)이 아니고, 중국은 결코 대국이 아닙니다.

다음은 [수로왕능은 강소성 회계군 산음현에 있다]가 연재됩니다.

박 병 역 위원 프로필

△ 종합인터넷 日刊 플러스코리아 역사문제 자문위원
△ 한국정신문화선양회 대표


✦--> 저서(著書)
1. 통한의 한국역사(소송진행문)
2. 인류의 기원역사
3.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4. 3황5제의 역사적 진실
5. 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6. 격암유록의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