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

중세아랍인이본 신라!

대동이 2007. 7. 25. 11:47
중세 아랍인이 본 신라
“돛배 띄워라, 동방의 이상향 신라로 가자”

△ 중세 아랍 상인들이 남해로에서 이용하던 돛배 (<이슬람세계>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 1996, 131쪽)

우리와 이웃하면서 한 문명권에서 살아온 중국이나 일본말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알고 찾아와서 교제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들일까? 그 동안 그 해답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서양사람들이 우리더러 세상과 동떨어진 호젓한 ‘은둔의 나라’라고 하니, 남들은 물론, 우리 마저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히 넘겨버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 정답은 중세 아랍사람들이 주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254년 경 프랑스 루이 9세가 원나라 헌종 황제에게 파견한 사신 루브루크가 돌아가 쓴 여행기에서 ‘섬의 나라 까우레’라고 한마디 한 것이 유럽에 알려진 첫 한국 소식이고,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스페인 선교사 더 세스페데스가 1593년 12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 웅천항(熊川港)에 도착한 것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의 한국행이며, 1627년 일본 나가사키로 항행하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우연히 표착한 네덜란드 상선 오우베르케르크호가 한국 해안에 나타난 최초의 서양 배라고 알려져 있다.


9세기 지리서 “중국동쪽 위치”

그러나 루브루크보다 4~5백년, 더 세스페데스보다는 무려 7~8백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인들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귀중한 사료들이 중세의 여러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요컨대, 한 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람들은 다름 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인들로서 그 역사는 자그만치 1천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으며, 그들은 어떻게 신라를 세계에 알리고 있었던 것일까 ? 그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화상이기도 하고, 세계 속에서 일찍이 우리 겨레가 누리던 드높은 위상이기도 하여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세 아랍인들에게 신라는 한마디로 ‘동방의 이상향’이었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세상에는 ‘행운의 섬’이나 ‘불멸의 섬’으로 알려진 이상향이 두 곳에 있는데, 그 하나는 서방의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대서양 상의 신비의 섬 아틀란티스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동방의 신라다. 그러나 같은 이상향이라도 아틀란티스는 무인도인데 반해, 신라는 사람이 사는 유인도로서 경작지와 과수원이 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아틀란티스는 전설 속의 한낱 이상향에 불과하지면, 신라는 속세의 살아 숨쉬는 이상향이라는 것이다. 물론, 문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는 신라가 동경과 선망의 대상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동경과 선망은 신라에 대한 그들 나름의 지견이나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 쇠사슬도 금붙이인 나라”

아랍인들은 지구상에서 신라가 어디에 있는가를 일찌감치 제대로 알아냈다. 섬과 산이 많은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에 있으며 바다(태평양)로 에워싸여 있다고 9세기 중엽에 나온 한 지리서가 지적한다. 이것은 중국보다 더 동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육지의 동단을 오로지 중국으로만 보아 오던 종래의 그리스-로마의 지리관을 타파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지식을 첨가한 엄청난 발견으로 평가된다.

신라의 지리와 관련한 아랍 학자들의 기술에서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가 자리한 사실이다. 그는 전래의 지리지식을 집대성하여 지은 <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년)이란 책 속에 한 장의 세계지도와 70장의 지역세분도를 그려 넣었다. 그는 아랍의 전통적 ‘7기후대설’에 따라 지구를 7개 지역으로 나누고, 매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다시 10등분하여 각기 지도 한 장씩을 제작함으로써 총 70장의 지역세분도를 완성하였다. 그 제1지역도 제10 세분도에 5개 섬으로 구성된 신라를 명기하고 있다. 이 지도는 이때까지 유럽의 세계지도에 처음으로 한국이 등장한 스페인의 벨호 세계지도(1562년 제작)보다 무려 408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아랍 지도야말로 한국 이름이 적힌 세계지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가 제작한 세계지도(1154년) (필자 제공)

원래 이드리시의 세계지도는 이라크 과학원이 1951년에 너비 2m, 폭 1m의 대형지도로 복원하였다. 필자는 1979년 바그다드박물관 전시실에서 벽에 걸려있는 이 지도를 목격한 바 있다. 그래서 지난해 취재차 이 박물관을 찾아가는 모 방송사 취재진에게 확인을 부탁했더니, 지도는커녕 박물관 전체가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반문명인들에 의해 저지러진 저주 받을 현대판 반달리즘(문명 파괴)에 그저 비분강개할 뿐이다.

중세 아랍인들은 이렇게 신라의 위치나 지형뿐만 아니라, 신라의 자연환경에 관해서도 놀라운 기록들을 남겨놓고 있다. 열사에 찌들고 풍랑에 지친 그들에게 산명수려한 자연경관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소기의 안주처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신라는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고 정착하고야 만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황금이 지천에 깔려 있는, 말 그대로의 ‘황금의 나라’다. 금이 너무나 흔해서 가옥은 금으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고 금제 식기를 쓰며, 심지어 개의 쇠사슬도 금으로 만든다는 것이 그들이 믿고있는 신라의 황금상이다.


비단·담비가죽·계피 등 풍부

이와 더불어 그들은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심정에서 신라인들의 유족한 생활상과 쾌적한 환경을 세심한 필치로 이모저모 묘사하고 있다. 지리학자 까즈위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의 나라이다. 그곳에서는 공기가 깨끗하며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해서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향유고래에서 나는 사향 못지 않은 향료)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이 이곳에 오면 곧 완치된다. .... 알라만이 시혜자이다.” 그 환경이 얼마나 정갈했으면 물 뿌린 집에서 용연향이 풍기고, 불구자도 없으며, 외지에서 온 환자는 금새 치유되겠는가 하는 극찬의 표현이다. 그러면서 이슬람적 세계관에 훈육된 사람답게 그는 신라의 이와 같은 윤택한 생활환경을 유일신 알라의 시혜로 돌린다.
그런가 하면 신라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찬사도 아끼지 않는다. 인종학적으로 인간 외모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또한 무모한 일이지만, 그들이 지적한 ‘가장 아름다운 외모’란 무구무병한 환경에서 사는 신라인들이야말로 그 외모가 준수할 수밖에 없다는 하나의 은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신라인들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대인관계에서의 친절성이나 유화성, 신뢰성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인들의 외모가 아름답다거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그들의 높은 문화수준과 윤리도덕성에 대해 아랍인들이 품고있는 일종의 선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해 바닷길 통해 물산 교류


△ 이드리시가 제작한 세계지도의 제1지역도 제10 세분도에 명기된 신라지도(5개 섬) (필자 제공)


동방의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신라에서 나는 물산이 아랍인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9세기 후반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신라에서 비단(하리르), (피린드), 사향(미스크), 말안장(수루즈), 흑담비(삿무르)가죽, 오지그릇(가돠르), 계피(다루쉰) 등 물품(그 밖에 몇 가지는 확인 안됨)을 수입해 갔다. 그 통로는 주로 중세 아랍 상인들의 활동 무대였던 남해의 바닷길로서, 여기에는 아랍 특유의 돛배가 이용되었다. 비단이나 , 오지그릇이 국제무역품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신라의 대외교류사에서 자못 의미있는 일이다.


‘은둔의 나라’는 왜곡된 시각

이렇듯 중세 아랍인들의 캔버스에는 윤색 같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신라의 넉넉하고 진취적인 자화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이런 것을 알 바 없는 서구인들은 19세기 말 우리를 ‘은둔’의 화신으로 곡필했고, 거의나 같은 시기에 일본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신라에 관한 중세 아랍문헌의 기술은 신라가 아닌 일본에 관한 기술이라고 아전인수하는 이른바 ‘신라일본비정설’을 들고 나와 반세기 동안이나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 여파는 우리네 학계까지 던져졌다. 나라가 힘이 약하고 학문이 뒤쳐지면 참 역사가 난도질 당한다는 뼈저린 교훈이다. 정수일 교수


신라에 파도처럼 밀려온 서역문물
서역문물 얼마나 넘쳐났기에‥
신라왕 “외래 사치품 엄금”


△ (위로부터) 사산(이란)계 무늬가 있는 8세기 입수쌍조문석조유물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상원사 동종에 있는 서역악기 공후와 생을 주악하는 비천상.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서아시아산 침향
버선·고름에 쓴 고급모직
공작새 꼬리와 비취새 털
공후, 횡적, 당비파
새 두 마리 새긴 석조유물
말 사료인 귀화식물 목숙
그리고 사자춤까지
그런데 그것이 사치였을까
신라인의 지혜는 겨레정서에 맞게
외래문물을 계승·발전시켰으니‥

지금도 우리는 심심찮게 민속축제 마당에서 사자의 탈을 쓰고 두 패로 나뉘어 굿거리장단에 맞춰 꼬리를 휘저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흥겹고 익살스러운 장면을 목격한다. 탈을 쓰고 추는 춤이라고는 하지만, 사자가 없는 이 땅에 과연 어떻게 사자춤이 생겨났을까. 그것도 천 몇 백 년 동안을 내려오면서 굳어질 대로 굳어진 우리의 한 민속놀이로 줄곧 이어져왔으니 말이다. 그 해답은 통일신라시대에 서역이란 새로운 세계와의 대면에서 찾게 된다.

6세기를 기해 일단 로마 문화의 영향이 시들해지자, 대신 서역문화가 한반도에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한다.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3국이란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한반도에 통일제국을 세운 신라인들에게는 새로운 문명세계와의 만남이었다. 이제 우리 겨레는 여명기를 벗어나 바야흐로 전개기에 접어든 동서문명교류의 큰 흐름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 첫 물결이 바로 중국이란 ‘큰 호수’를 사이에 둔 서역과의 교류였다.

서역이란 원래 중국인들이 막연하게 중국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서 우리를 포함해 한자문명권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줄곧 사용되어 왔다. 서역이란 정식 명칭은 기원전 60년 전한이 타림분지 중앙부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하면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는 주로 오늘의 신장·위구르자치주 영내의 수십 개 나라들이 포함되었다. 이것이 좁은 의미의 서역이다. 그러나 한대 이후 중국의 대외교섭과 교류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서역의 포괄 범위가 서쪽으로 더 넓어져서 7세기 당대에 이르러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뿐만 아니라, 멀리 페르시아(이란)와 대식(아랍)까지를 망라하였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서 근세까지의 개념이다. 통일신라가 상대한 서역은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서, 지역이 광대하고 민족이나 문화도 다양하여 교류의 폭도 그만큼 넓었다.

문호개방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한 당나라는 서역문물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수도 장안은 서역문물의 집산지와 중계지 역할을 하였다. 당시 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신라가 조공사나 구법승, 유학생 등 내왕자들을 통해 서역문물을 간접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그러나 당시 대식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직접 신라에 오가면서 교역도 하고 심지어 신라땅에 정착까지 하였다고 하니, 서역과의 교류는 중국을 통해서만 아니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 숱한 서역문물들이 신라에 밀려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 함경남도 북청군 일대에서 음력정월대보름에 행해지는 놀이로, 사자탈을 쓰고 잡귀를 몰아내어 마을의 평안을 유지한다는 북청사자놀음.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신라인들의 서역문물에 대한 호기심은 대단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귀족 사대부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도 앞을 다투어 서역에서 들어온 호화품들을 장만하고 남용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무분별한 사치풍조까지 일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지위 고하에 따라 서역문물을 사용하는 데 대한 세칙까지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흥덕왕은 834년 사치를 금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그 서문에서 일부 호화를 일삼는 사람들이 외래품만을 선호하고 국산품을 혐오하는 방자한 작태를 꾸짖으면서 사용금지세칙을 위반하는 자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도대체 어떤 물건들이 어떻게 쓰여졌기에 왕이 나서서 이러한 칙령까지 내렸을까. 우선은 각종 향료다. 금령에 따르면 진골은 타고 다니는 수레에, 육두품에서 백성까지는 가마와 침상에 향료인 동남아시아산 자단과 서아시아산 침향을 쓸 수 없도록 했다. 외래 향료로는 그밖에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아랍산 유향도 있다. 신라인들은 서역에서 들여온 침향 같은 향료를 일본에 재수출하는 지혜도 발휘했다.

금령에는 진골녀의 빗과 관을, 육두품녀의 빗을 슬슬(瑟瑟)로 꾸미는 것을 금한다고 했다. 슬슬은 투명하고 푸른색의 귀중한 보석인데, 8세기 중엽 고구려 후예인 고선지 장군이 7만 당군을 이끌고 그 유명한 탈라스 전쟁을 치르면서 원산지인 석국(현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에서 10여 석을 노획한 것이 동아시아에 전해진 첫 슬슬이다. 이래저래 슬슬은 우리의 민족사와 연을 맺고 있는 진귀한 보석이다. 이러한 보석으로 빗을 장식하는 것을 금했다고 하니, 당시 이 보석에 대한 신라인들의 소유욕과 애착심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말해준다.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서역문물들도 적지 않다. 육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서역산 고급모직 옷감인 ‘계’는 여인들의 바지나 버선, 신, 목수건, 옷고름에 장식하는 것을 금하였다. 목수건이나 버선 같이 수요가 적은 부분에까지 계의 사용을 금지시킨 것으로 보아, 그것은 필히 귀중한 물품이었음에 틀림없다. 인도를 비롯한 서남아시아에서 나는 공작새 꼬리와 진랍국(현 캄보디아) 특산인 비취새 털을 목수건 같은 장신구에 수놓을 수 없게 하였으니, 신라인들의 사치성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수용성이 더욱 돋보인다.

이렇게 신라인들이 폭넓게 서역문물을 받아들인 세태는 기록으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로도 남아 있어 그 실상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약 70년 전 경주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른바 ‘입수쌍조문석조유물’이 바로 그 일례다. 나무를 한가운데 두고 두 마리 새가 마주하고 있는 석조유물이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이 유물과 더불어 비슷한 무늬를 가진 직경 2.5cm의 ‘화수대금문금구’(꽃나무를 사이에 두고 날짐승이 마주보고 있는 무늬의 금제 기구)도 1966년 경주 황용사 목탑지사리구멍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두 유물의 공통적인 무늬는 평면이 원형이고, 중앙에 나무를 배치하고 좌우에 날짐승을 대칭시키며, 원 밖에 옥을 두른 연주대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대표적인 사산(이란)계 무늬로서, 신라가 그 새김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이렇게 세월의 풍상 속에서도 별로 변하지 않는 무언의 석조나 금제 유물이 있는가 하면, 비록 변모되어 거의 잊혀져 가는 사이에도 애잔하고 아름답게 그 긴 만남의 역사를 수놓는 들꽃도 있다. 목숙(일명 거여목 혹은 개자리)에서 피어나는 들꽃이 바로 그것이다. 콩과에 속하는 두해살이풀인 목숙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귀화식물이 되어 키가 겨우 30~60cm 밖에 안 되는 야생초로 퇴화되었다. 한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 누른빛 나비형 꽃이 피는 이 들풀의 부드러운 잎은 담백한 미각과 풍부한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어 외국에서는 소채로서 애용되며 해독제 같은 약으로도 쓰이고 있다. 본시 목숙은 남러시아의 코카서스 산맥 동남일대에서 말의 사료로 재배되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졌으며, 그것이 다시 아랍에 전해진 후에는 아랍 준마의 사료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던 목숙이 중국 전한 때, 서역에 사신으로 파견된 장건이 가지고 돌아와서 말의 사료로 곳곳에 재배하면서 동방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이 수백 년을 지나 국력의 신장과 목축업의 발전을 꾀하던 신라인들의 의욕을 자극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전국 4곳에 ‘목숙전’이라는 관변기구를 설치하고 전담 관료와 기록책임자까지 두어 목숙의 재배와 관리를 전담하게 하였다. 이 양마의 사료이자 약용식물인 목숙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져서 지금까지도 ‘우마고야시’(馬肥: 말을 살찌게하는 것)란 이름으로 약재에 쓰이고 있다.

목숙과 더불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몇 가지 악기나 잡기(놀이)에서도 유입된 서역문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기록과 상원사 동종 등의 유물에서 보다시피, 주로 신라 중대 이후에 고구려가 수용한 것을 재수용하였거나,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서역계 악기로는 피리, 횡적, 소, 박판, 요고, 동발, 당비파, 공후 등 8종의 호악(서역악)이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약간의 변용을 거쳐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가면무나 땅재주 같은 몇 가지 놀이도 신라 때 서역으로부터 들어와 우리의 전통놀이문화로 자리를 굳혔다. 9세기 중엽 문호 최치원이 저술한 <향악잡영오수>를 보면, 금칠한 공을 공중에 던졌다가 받는 ‘금환(金丸)’이나, 가면무로 술잔을 들고 겨끔내기를 하면서 추는 ‘월전(月顚)’과 역신을 구축하는 ‘대면(大面)’, 이색적인 무인들이 봉황춤을 추는 ‘속독(束毒)’, 그리고 ‘산예’, 즉 사자춤은 모두가 신라 때 쿠차나 호탄, 소그디아나 등 서역지방에서 들어온 잡기들이다. 그중 산예는 지금까지도 ‘북청사자놀이’와 ‘봉산탈춤’, ‘통영오광대’ 등 사자춤으로 전승되고 있다.

외래문물은 잘 활용하면 자양분이 되나, 자칫 남용하면 위해물이 된다. 흥덕왕의 칙령에서 보다시피, 신라인들은 국산품을 귀히 여기면서 서역문물을 호사가 아닌 수요를 위해 받아들였으며, 겨레의 정서에 걸맞은 전통문화로 굳혀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주고 있다.
정수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