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한족과 조선이 구분된 것은 한무제때부터.....

대동이 2007. 11. 13. 12:34
("漢武帝伐滅朝鮮分其地爲四郡自是之後胡漢稍別")

한족과 조선과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한무제가 역사를 새로 정리하면서 이다




(서양식 민족개념이 아닌 시조중심으로 민족사를 쓰자)



우리는 우리말 우리글을 쓰고 풍습을 같이 하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민족이라고 한다.

특히 우리말을 쓰고 조선시대 이주한 조선인후예까지 우리민족이라고 한다.

그런데
조선이전 고려나 발해 고구려후예로 우리말 우리글을 못하고 한반도인과 다르다 하면서
여진족이라고 한다.

우리말 우리글을 사용해야 우리민족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이 되어서 해외입양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수요일 아침 KBS 아침마당에 해외입양아가 부모를 찾아오고 만나기는 하는데
우리말을 못하여 부모와 자식이 만나도 눈빛과 마음을 다른언어의 통역으로 감정을 말하는데
서양식 민족개념이며 현재의 민족개념으로는 그들은 우리민족이 아니다.

가족은 되는데 민족이 아니라는 기막힌 사연이 될 수 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시조중심의 민족사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시조의 후예는 어디에 살던 어떤말을 하던 시조중심의 민족이다.

아시아인은 일찍이 시조중심의 민족사관이 있었다.
한국인은 단군을 한족은 헌원을 유태인은 아브라함을 시조로 하고 민족을 말하고 있다.


이중에서 유태인만이 시조중심사관을 잘 정리하였고
나머지는 불안전하여 서양식민족개념과반도사관이 합하여진 사관으로
우리역사를 나타낸 옛 기록들을 보고 사상을 정리하다 보니
현재와 같이 한반도에 일치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옛 기록들이 취사선택되는 불행을 계속하고 있다.

삼국의 후예가 하나되지 못하는 역사는 역사로 인정할 수가 없고 민족사로 인정할 수가 없다.

이제 우리는 옛 기록이 있는 데까지 밝혀서 시조중심의 사관을 정립해야 한다.
우리가 단군을 민족 국조로 하고 있는 사이에 사서는 죽어 버렸다.


왜냐하면 국조 이전을 나타내는 사서는 있는데도 밝히려고 하지를 않는다


삼국사기에서는 단군 이전 인물로

- 신라의 선조는 소호금천씨로
- 고구려의 선조를 고신씨로 기록하고 있고
- 九黎의 백성인 苗가 삼국의 선조이고
= 苗의 후예가 삼국을 세웠다고 하고 있다.


삼국유사도

- 국가는 고조선으로 하고
- 건국자는 단군으로 하고 있으나
- 단군 이전 환웅시대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고
다른 사서에서 14대 환웅에 치우가 있다고 하였다.


중국25사에서는 단군 이전을 나타내고 있다.

소위 야사에서 치우환웅이라고 부르는 치우천자시대 국호를 九黎라 하였다.

우리는
삼국사기와 중국25사 그리고 야사에 나타난 공통부분으로 치우가 있으므로
치우천자시대 국호 九黎를 기준으로 하는 민족사를 정립해 보자는 것이다

기록이 없으면 몰라서 못하지만
아시아에 풍부한 기록이 있음에도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현재의 국가를 기준으로 민족사를 할 수는 없다.


민족이란 오랜 역사속에서 정립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오랜역사속에서 바른 가치관을 가진 역사를 정립할수 있기 때문이다.

九黎에서 현재까지 역사를 정립하고 바른 가치관을 찾아내어서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밝혀야 한다

이것이 시조중심사관으로 민족사관을 찾아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한국인은 민족의 기준을

- 강역은 한반도로,
- 국조를 단군으로,
- 나라는 고조선으로,
- 말은 한국어로,
- 글은 훈민정음으로 민족을 말하고 있다.


중국인은 민족의 기준을

- 강역은 중국으로,
- 국조는 헌원으로,
- 나라는 "하"나라를,
- 말은 중국말을,
- 글은 한자로 민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화국 이후에는 중국민족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족이 대부분이고 55개의 소수민족이 중국이라는 나라로 뭉쳐저 있다.

그래서 2000명정도의 "도바족"이 민족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족이 시작된 것은 한나라가 건국되고 무제가 장안중심의 역사를 정립하여 사기를 편찬하고부터
한족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족과 다른민족이 구분된 것을 한마디로 기록한 곳이 삼국지인데
"漢武帝伐滅朝鮮分其地爲四郡自是之後胡漢稍別"라고 하였다.
(한무제벌멸조선분기지위사군자시지후호한초별)

분명히 한무제 이후 차차로 구별이 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 한무제 이후에 구별이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무제때 편찬된 사기를 보면

- 사람의 기준은 헌원으로
- 나라의 기준은 하로 하고 있고
- 장안중심의 역사를 서술하고 가르쳐왔다.


한편 우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 1947년 이후에는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 한국인은 한민족이라고 하며
- 강역은 한반도를 기준으로 하고
- 국조는 단군으로 하였다.


1402년부터 1946년까지 근세조선은

- 조선인을 조선족이라 하고
- 강역은 조선팔도로 하고
- 국조는 단군으로 하였다.


918년부터 1402년까지 고려는

- 고려인을 기준으로 하고
- 강역은 고려땅을 기준으로 하고


삼국사기는 苗를 기준으로 하는데

- 신라는 소호금천씨를
- 고구려는 고신씨로 하였고


삼국유사는

- 강역은 고려땅을,
- 국조는 단군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 단군이전 "고신"과 "소호"를 삭제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및 여러 동이전은 동이기준을 "단군"이 아닌 "치우"로 하고 있다.
헌원과 치우는 동시대 인물이고 소호는 헌원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와 사기를 따르면 한민족이라는 한국인과 한족이라는 중국인은
같은 뿌리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치우를 우리는 14대 환웅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사기에서는 九黎 천자가 치우라고 하였다.
그리고 헌원은 소전이라는 제후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천자가 제후보다는 높다고 하는 것이 아시아의 사상이니
당연히 우리의 선조 치우는 아시아의 시초인 것이다

예기에서는 국호 九黎때의 백성을 苗民이라고 하였다.

남방에서는 漢나라는 苗의 후예라고 하였고,
弁韓과 신라도 苗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북방에서는
고離(고리) 고離卽高句驪合音(고리즉고구리합음) 라 하여 九黎의 국호를 계승하고 있다.

바로 남북 대결인 셈이다


우리는 사서를 통해서

- 기준은 九黎로 하고
- 국조는 단군이 아닌 치우천자 또는 환웅시대로 하고
九黎의 후예가 하나되는 아시아사를 쓰고 우리의 민족명칭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후예를 여진족이라고 하고
신라의 후예를 한민족 또는 조선족이라고 하는 삼국의 후예가 하나되지 못하는데
그래도 현재의 사관으로 민족사를 옳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정사를 통하여 국조의 기준을 치우로 九黎시대후예는 하나의 민족으로 하는 역사를 써야 할 것이다

한국인을 민족으로 본다면 철저하게 해야 한다.
요중심의 동쪽 기록인 동이전과 공통부분을 우리것이라고 우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상을 버릴수도, 사서를 모른체한다고 기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정사와 야사를 종합하고 공통부분의 최초 구리와 치우를 기준으로 하여 민족사를 정립해야 할것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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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비교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