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東 夷 · 동이족 · 東夷 이해를 위한 중국 고대사 · 은왕조는 동이족 · 은왕조가 동이족이었다는 고증 · 상황오제는 모두 동이족 · 은왕조 그 이후 · 순임금이 동이족이었다는 근거 · 루시엘이 밝히는 동이족의 조상 욕단 · 황화문명의 주역은 고조선 · 천문학으로 고조선사 증명 · 한 민족의 뿌리사상 · 한민족의 일만년 역사 · 친일사학계비판 ·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우리겨레 · 실로 강대하였던 동이족 · 동이족이 아니라 동철족 · 금문신고 · 중국인의 역사뒤집기
東夷란?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에서) 은나라 때 인방(人方)이라는 이족(夷族) 집단이 있었고, 《죽서기년(竹書紀年)》을 비롯한 선진시대(先秦時代)의 문헌과 금석문에서 ‘동이’를 뜻하는 다양한 명칭이 발견된다. 여기에 표현된 이족과 동이족은 산둥성 ·장쑤성 북부 일대에 거주한 족속을 말한다. 이들은 단순한 이민족(異民族)이 아니라, 뒤에 중국민족을 형성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한(漢)나라 이후 쓰여진 사서에 나오는 동이는 전국시대까지 중국의 동부지방에서 활약한 ‘동이’와는 전혀 별개의 존재였다. 한(漢)나라 때의 중국인은 변방의 종족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불렸는데, 동이는 바로 동쪽에 있던 종족을 가리킨 말이다. 이 시기의 동이족에는 예(濊) ·맥(貊) ·한(韓) 계통의 우리 민족과 읍루와 왜족이 속하였다. 종래 동이의 범위와 개념에 혼란이 초래된 것은 《후한서(後漢書)》 동이전 서문에서 은 ·주와 춘추전국시대의 ‘동이’와 한나라 이후 사서에 등장한 동이를 구분하지 않고 썼기 때문이었다. 한편, 과거에 상고시대 중국 북방에 거주한 동이족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 줄기는 산둥 방면으로, 다른 한 줄기는 랴오둥과 한반도지역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견해가 있었다. 이러한 동이족 이동설에 근거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실체를,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건국한 나라로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이족 이동설은 고고학적인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많다.
다른문헌에서 동이족(東夷族) 우리 한민족의 조상은 고대 동이족(東夷族)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이족의 "夷"라는 글자를 우리는 "오랑캐 이"라고 배웠으며, 또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 오랑캐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변방에 살던 미개한 부족들이라고 나와 있지요. 한국사람들이 한번씩 "오랑캐 이"하고 소리낼 때마다, "우리는 동쪽 오랑캐들이다!"하고 광고하는 셈이지요. 그런데 다음에 보이는 구절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夷는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며, 활궁(弓)자와 큰 대(大)에서 따온 글자로, 그 사람들은 어질고 오래 살며,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 -설문(說文):자해(字解)- .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순리(順理)를 따르는 성향이 있으나, 오직 동이(東夷)만이 큰 것을 따르니 대인이다. (惟東夷從大大人也) 이(夷)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살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곳은)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 (夷俗仁仁者壽故有君子不死之國) 살펴보면 그곳은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사람 역시 크다. (按天大地大人亦大) " - 설문(說文): 대부(大部) -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 夷는 곧 뿌리이며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고들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道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의 나라이자 죽지 않는 나라(不死國)가 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은나라의 (건국)시조 설은 동이족이다." -사기(史記) 사마천 著 "중국 민족의 조상은 바로 동이족이다." -<고사변> ***자료출처-(맥이:박문기 著),(고구려 본기-박영규 著)*** 만약 한단고기를 비롯한 우리측 고문서에서 위와 같은 기록을 찾아냈다면, "단순한 애국심에서 나온 자화자찬"이라고 무시를 당해도 논박할 길이 별로 없겠지요. 그러나 위의 기록들은 모두, 동이족들이 남긴 기록이 아닌 바로 중국인들이 남긴 중국의 기록들입니다. 위의 설명 어디에도 "오랑캐"라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뿌리이고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며, 군자의 나라이고 불사국"이라 했지요. 동이족이 사는 모습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 유명한 공자님도 춘추시대 말기 중국의 혼란상을 한탄하며 "구이(九夷-우리나라를 말함)에 가서 살고싶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던 대로 "미개한 동쪽 오랑캐"들이 사는 땅이었다면 공자님이 살고 싶어했을까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살펴보겠지만, 사실 공자님 또한 동이족입니다. 결국 조상의 나라를 그리워한 것이지요. 한편 "이(夷)"라는 글자 자체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활 궁(弓)자와 큰 대(大)자를 합한 글자입니다.(弓+大=夷) 그것은 민족을 나타내는 이름에 활 궁(弓)자와 큰 대(大)자가 들어갈 정도로 활쏘기의 명수들이었고, 체격과 기상이 큰 사람들이었음을 말해주며, 앞에서 살펴본 중국의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활을 잘 쏘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외공), 호흡을 가다듬고(단전호흡), 정신통일(명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한단 시대 우리 조상들은 신선도(神仙道)로 몸과 마음을 닦았으며, 그러한 신선도 수행방법 중 하나가 바로 활쏘기였습니다. 그리하여 말을 타고 대륙을 질주하던 고대 동이족들에게 활쏘기는 체력뿐 아니라 정신과 자세를 바로잡는 아름다운 풍속과 전통이 되어버렸지요(고구려 무용총의 고분벽화를 연상해 보실 것). 세계 양궁계에서 한국은 그 경이적인 성적 때문에 "연구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옛날 동이족의 기질이 우리의 혈통 줄을 타고 내려온 것일 뿐, 한국인들에게는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요. 콩 심은 데 콩 나듯, 세상에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찬찬히 앞서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중국의 기록들이 남겨질 당시만 해도,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살던 나라는 정신적으로나 국력으로나 풍요로운 대국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큰 활든 사람"이, 언제부터 "오랑캐"로 변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동이족의 터전인 단군조선이 문을 닫고 난 이후부터이지요.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에 너무나 인색한 성향이 있지요. 자기자랑 하는 것을 천박하게 여기는 고고한 성품이 우리 핏줄에 남아 있어서 일까요? 그러나 어느 도인께서도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는 만큼 하늘도 그 사람을 인정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고 업신여기는데, 남들이 나를(우리를) 인정해 줄 까닭이 없지요.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이 "오랑캐 이"하는 것은 별 것 아닙니다. 그러나 동이족의 정통후손들이, 아직도 그 뜻도 내력도 모른 채 "오랑캐 이"해서야 되겠습니까? 이(夷)"는 "활 잘 쏘는 큰 사람 이"입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바로 그 東夷族의 정통 후예들입니다. 동이를 이해 할려면 중국 고대사(사실은 동이의 역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중국고대사 중국의 창조 신화 반고-->三皇-->五帝-->夏-->商(殷)-->周 □ 반고(盤古) 반고는 1만 8천년을 잠만자다가 도끼로 잠자던 우주의 껍질을 깨었다. 가벼운 물질은 위로 올라가고, 묵직한 것은 아래로 가라앉았다. 서로가 붙으려고 하는 것을 반고가 가벼운 물질을 손으로 쳐들고, 무거운 것을 발로 밟아 자기의 키를 하루에 1장(丈,약 3m)씩 키워 자기 키를 1만 8천년을 늘려 천지간의 거리가 9만 리가 되었다. 그리고는 반고가 쓰러졌다. 그가 헐떡거리는 입김은 하늘의 구름이 되고, 그가 지른 고함은 뇌성벽력, 번갯불을 만들었다. 반고는 죽으며, 왼쪽 눈알로 태양을 만들고, 오른쪽 눈알로 달과 별로 변화시켰다. 피는 큰 바다와 호수의 물이 되었고, 뼈다귀는 산맥, 털은 식물이 되었다. 그의 땀과 눈물은 아침 이슬이 되었다.
□ 여와 반고가 천지를 창조하고 많은 날이 흘렀다. 여와라는 신이 심심해서 땅에 내려와 봤더니, 인간만이 없더라는 것이다. 물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래, 저런 걸 만들어 주자'하고 누런 진흙을 빚어서 애를 낳았다. 몇 개를 더 만들었으나 성이 안찼던지, 한가닥 칡넝쿨을 잘라 그것으로 진흙을 휘갈겨 진흙방울이 사방으로 튀어나간 그것이 죄다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물의 신 공공(共工)과 불의 신 축융(祝融) 간에 시비가 붙어 싸움이 벌어졌는데, 공공은 제 성질을 못 참아 부주산(不周山)에 박치기 했다.그로인해 땅이 기울어져 난리가 났다. 물이 들끓어 홍수가 나고, 덩달아 흥분한 괴수들이 사람들을 해쳤다. 사람을 만든 여와가 분주히 물을 퍼내어 인명을 구출하는 한편 괴수를 퇴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고장난 하늘 구멍에 오색 돌을 갈아 메워서 고치고, 기울어진 땅을 바로잡기 위해 바다에 사는 거북이에게 네 다리를 얻어 그것으로 사방의 땅을 고여 바로잡아놨다. 좀 서두르는 바람에 중국의 서북쪽은 높고 동남쪽은 우묵하게 낮은 이유가 되었다.
□ 신예(神 ) 세상의 동쪽 끝에 아주 높은 뽕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나무 그늘에 천제(天帝)의 아들 열 명이 있었다. 그들은 다리가 셋 달린 황금 새였다. 하루에 한 놈씩 번갈아 가며 하늘에 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태양이라 하였다. 천제의 아들들이 장난기가 발동해 열 명이 한꺼번에 날아버렸다. 하늘과 땅이 펄펄 끓고, 농작물은 타죽고, 괴물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지상의 성왕인 요(堯)가 천제께 빌어 천제는 천신(天神) 예에계 특명을 내렸다. 신예는 자기아내 상아와 함께 지상에 내려와 황금새를 사냥하기 시작하였다. 화살 열개중 하나를 요임금이 감춰 다행히도 하나의 태양은 남게 되었다. 괴조.요괴.구렁이를 죽였다. 천제는 그의 아들들을 죽였다고하여 신(神)의 자격을 박탈하고, 인간이 되게 하였다. 상아와 신예는 사람이 되었고, 곤륜산 서왕모에게 불사약을 구하였다. 그러나 불사약은 두알 밖에 없었고, 하나를 먹으면 죽지 않고, 두알 다 먹으면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하였다. 아내 상아는 남편 신예가 잠든 틈에 두알은 다 먹어버렸다. 그러나 천제의 벌을 받아 한 마리 추한 두꺼비가 되어 보름달 속에 뚜렷이 엎드려 있게 되었다.
<자료출처 : http://www.chinainkorea.co.kr/>;
三皇 복희 - 포락과 문자를 만든 신 수인씨는 화식하는 방법의 발명자로서 알려져 있으나, 복희씨 또한 그와 무연 하지는 않다. 그의 이름은 포희(暑羲) 또는 포희(敍羲)라고 쓴다. 이런 이름은 [희생을 길러서 포주(敍廚)에 가득 채운다]라든가 [희생을 포락(暑烙 - 굽고 지짐)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니까 인간들에게 동물의 고기를 지지고 볶고 익혀서 먹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또한 역(易)의 8괘를 만들어 인간사회의 길흉을 점치고 문자를 발명했으며 그물을 짜서 생선이나 짐승을 잡는 기술을 고안했고 다시 여와를 아내로 삼아 둘이서 혼인의 예를 정했다고도 전한다.
수인 - 집과 불을 만든 신 수인씨(燧人氏)의 이름은 삼황(三皇)의 하나로 헤아려지고 있으나, 여기에 유소씨(有巢氏)를 선행시켜서 인간생활의 진보를 설명하려는 합리적 신화도 있다. [한비자]를 보면, 상고시대에는 인간이 적어서 금수충사(禽獸蟲蛇)의 해로 많은 괴로움을 받고 있었다. 이때 유소씨가 출현해서 나무 위에 집을 짓고 그 재해를 피하게 해주었다. 또한 백성이 날것으로 초목의 열매나 조개 등을 먹어서 위장을 해쳐 병에 잘 걸렸다. 수인은 다시 부싯돌을 사용하여 불을 일으키고, 먹을 것을 익혀서 비린내를 제거하는 방법을 발명했다. 말하자면 인간의 소거생활(巢居生活), 화식생활의 개시를 상징하는 신들이다.
신농 - 농상업과 의약의 신 신농(神農)도 삼황의 한 사람으로 헤아려진다. 즉 염제(炎帝)인 신농씨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우선 농업의 신이 다. 염제 즉 태양의 신이기도 한 그는 인간들에게 괭이를 만들어서 땅을 일구는 방법을 가르쳤다. 태양의 광열에 의해서 오곡을 풍요롭게 결실시켜서 인간의 식생활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태양이 중천에 오르는 한낮을 눈금으로 해서 사람들을 시장에 모이게 하여 교역을 하는 길을 가르쳤다. 이 점에서의 그는 상업의 신이기도 하지만 게다가 또 의약의 신으로서도 받들어졌다. 태양은 원래 건강의 원천이므로 태양신인 그가 건강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의약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산야를 헤메다가 신통력을 갖춘 붉은 채찍으로 약초를 때리면서 각자의 풀이 지닌 독성의 유무 라든가 각종 효능을 분별해서 인간의 병치료에 소용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에는 맹독이 있는 단장초(斷腸草)를 핥아보았기 때문에 장(腸)에 탈나서 그 생명을 회생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신농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운명은 서로 엄청나게 달랐다. 한 딸은 다만 [신농의 소녀]라고만 불리었을 뿐 그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비를 관장하는 관리노릇을 하다가 뒤에 지극한 수련을 닦고 선인이 된 적송자(赤松子)의 선술(仙術)에 반해서 자신도 그 뒤를 쫓아 여선인(女仙人)이 되었다고 한다. 또 한 딸은 여와(女와)라 했다. 나이가 아직 젊었던 그녀는 어느 날 동해에 목욕하러 나갔다가 그만 큰 파도에 쓸려 물에 빠져 죽어버렸다. 너무도 억울했던 그녀의 영혼은 정위(精衛) 라는 작은 새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하여 발구산 (發鳩山) 이라는 산에서 살았다. 정위는 자기 명을 앗아버린 동해에 대해 원한을 품고, 가련하게도 끝까지 동해에 대한 보복에 큰 뜻을 품었다. 날마다 서쪽 산에서 조약돌이나 작은 나무가지를 입에 물고 와서는 큰 파도가 밀려오는 동해의 물결 사이에 떨어뜨리며 동해를 메워 버리려고 결심하는 것 이었다. 이것이 정위전해(精衛塡海), 즉 정위가 바다를 메우려한다는 고사이다. 일반적으로 무모한 일을 기도하여 헛된 고생을 되풀이하는, 소위 도로(徒勞)로 끝나는 일을 비유하는 말이다. 또 다른 견해로 보자면 일의 성부(成否)를 도외시하고 오직 자신이 세운 뜻밖에 굳건히 매진하다가 죽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도 한다. 신농씨의 또 한 딸은 요희라고 했는데, 여와(女와)와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정열적인 소녀였다. 나이가 차서 처녀티가 날 무렵, 아직 이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즐거움을 알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고요산이라는 산 중턱에 예쁘고 가련한 노란꽃이 피어 열매를 맺었다. 이 한 그루의 요초(瑤草) 야 말로 그녀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이 풀꽃의 열매를 따먹은 자는 누구나 반드시 이성으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어린 나이에 죽어간 요희의 운명을 가엾이 여긴 천제가 이윽고 그녀를 사천성에 있는 무산(巫山)으로 보내어 구름과 비의 신으로 봉했다. 그로부터 그녀는 아침에는 아름답고 화려한 구름으로 화하여 산마루 위를 넘나들고 저녁 무렵에는 구슬픈 비가 되어 골짜기와 산기슭을 적셨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품었던 자신의 애달픈 정열을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전국시대의 말엽에 초나라 회왕(懷王)과 또 그 뒤의 그의 아들 낭왕(囊王)이 운몽택이란 연못에서 놀다가 고당대(高唐台)에서 잠시 쉬며 잠들었을 때, 그 꿈속에 환영처럼 나타난 무산의 여신 요희가 타는 듯한 정열을 바쳐 사랑을 맺었다는 이야기가 초나라의 궁정 시인 송옥(宋玉)에 의해서 세상에 전해내려오고 있다.
<자료출처 : http://galaxy.channeli.net/gomeisa/history/china/cpage07.htm>;
五帝 1.五帝란 누구인가? 간단히 말하면 중국 고대의 전설에 나오는 다섯명의 제왕(帝王)을 가리킨다.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記)와 세본(世本)의 오제x(五帝x), 대x예기(大X禮記)의 오제덕(五帝德)에서는 황제(黃帝), 전욱, 제곡, 요(堯), 순(舜)을 들고, 제왕세기(帝王世記)에서는 소호, 전욱, 제곡, 요, 순을 들고, 그리고 주역(周易)에서는 복희, 신농, 황제, 요, 순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사기를 따라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으로 가정한다.
2.황제(黃帝) 황제는 소전(少典)이라는 부족의 자손으로, 성(姓)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 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소전국의 왕비가 들판에서 기도를 올리다가 큰 번개가 북두칠성의 첫째 별을 감싸도는 것을 보고는 그를 잉태하여 24개월 만에 수구에서 황제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헌원의 시대는 신농씨(神農氏 : 고대 제왕의 하나 그가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신농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염제(炎帝)라고도 한다.)의 세력이 쇠해져가는 시기였으므로 제후들은 서로 침탈하고 백성을 못살게 굴었으나 신농씨는 이들을 정벌할 힘이 없었다. 이에 헌원은 창과 방패 등 무기의 사용을 익혀서 신농씨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는 제후들을 정벌했다. 그 결과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 복종했으나, 다만 치우(蚩尤)만은 가장 포악하였으므로 헌원도 그를 토벌할 수가 없었다. 염제가 제후들을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로 귀순했다. 헌원은 이데 덕을 닦고, 병사를 정비했으며, 오기(五氣 : 木, 火, 土, 金, 水)를 연구했고, 오곡(기장, 피, 벼, 보리, 콩)을 심어 백성들을 사랑으로 돌보았고, 사방으 토지를 측량, 정리하였다. 또한 곰, 범등의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서 판천의 들에서 염제와 싸웠는데, 여러번 싸운 후에야 드디어 뜻을 이루었다. 치우가 다시 난을 일으키자 황제는 제후들로부터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에서 싸워서 결국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아 염제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제이다. 황제는 하늘로부터 보정(寶鼎 : 제위를 상징하는 보배로운 솥)과 신책(神策 : 점칠 때 쓰는 자잘한 나뭇가지)를 얻었고, 풍후(風后), 역목(力牧), 상선(常先), 대홍(大鴻)을 등용하여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바로잡기 황제헌원과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치우천왕간에는 수차례의 전쟁이 있었으며 <사기>를 비롯한 중국의 문헌에는 황제헌원이 치우천왕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이 자신들의 뿌리와 관련하여 황제헌원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어서이며 이는 왜곡된 주장이다. 사실은 전쟁에서 패하여 치우천왕에게 귀의한 뒤 청구국(배달국 14대 환웅인 치우천왕에 이르러 중원을 개척하며 옮겨와 나라이름을 청구국이라 함) 고유의 천부인 3개에서 유래한 신선도의 길을 걸었다. 이로부터 헌원에서 노자로 이어지는 도교의 근원이 배달국에서 유래되었다. <사기>는 헌원의 호가 유웅씨有熊氏라 하여 그가 웅씨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먼 조상인 소전이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헌원이 자신의 군대를 '운사雲師'라고 부른 것은 그가 배달국의 후손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그리고 그를 '황제黃帝'라 일걷는 것은 그가 오행五行에서 중앙에 해당하는 흙(土)의 기운으로 제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3.전욱 고양(전頊高陽) 황제는 헌원의 언덕에 살면서 서릉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 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유조(처음으로 양잠을 가르침)이다. 유조는 황제의 정실로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의 후손들은 모두 천하를 얻었다. 큰 아들은 현효(玄효), 즉 청양(靑陽)으로서, 청양은 강수(江水)의 제후가 되었다. 둘째는 창의(昌意)라고 했는데 약수(若水)의 제후가 되었고, 그는 촉산씨의 딸을 아내로 얻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창복(昌僕)이었다. 창복은 고양을 낳았는데, 고양은 성스러운 덕성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가 붕어하자 교산에 장사를 지냈고, 그의 손자이자 창의의 아들인 고양이 제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전욱이다. 그는 침착하여 지략에 뛰었났고, 사리에 통달했다. 또한 그는 적지를 골라 곡물을 생산하였고, 우주의 운행에 따라서 계절에 맞는 일을 하였으며, 귀신의 권위에 의지하여 예의를 제정하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신령에 제사를 지냈다. 그는 북쪽으로는 유릉, 남쪽으로는 교지, 서쪽으로는 유사, 동쪽으로는 반목에까지 다다랐다.
4.제곡 고신(帝곡 高辛) 전욱은 궁선이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전욱이 붕어하자 현효의 손자인 고신이 제위에 올랐다으니 이 이가 바로 제곡이다. 제곡 고신은 황제의 증손자인데, 고신의 부친은 교극이며, 교극의 부친은 현효이고, 현효의 부친이 바로 황제이다. 고신은 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또한 널리 은덕을 베풀어 남을 이롭게 했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았으며, 귀가 밝아 먼 곳의 일까지도 잘 알았고, 눈이 밝아 자잘한 일들도 잘 관찰하였다. 그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였고 백성을 절박한 요구를 잘 알았으며, 인자하면서도위엄이 있었고 은혜로우면서도 신의가 있었으며, 깨끗하게 자신을 수양하였으므로 천하가 그에게 순종하였다. 그는 토지의 산물을 얻어 아껴서 사용하였고, 백성을 정성으로 가르쳐서 그들을 이롭게 이끌었으며, 해와 달의 운행을 헤아려서 역법을 만들어 영송하였고, 귀신으 권위를 이해하여 그들을 공손히 섬겼다. 그의 모습은 매우 온화했고, 덕품은 고상했으며, 행동은 천시에 적합했으며, 의복은 보통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제곡은 대지에 물을 대주는 것처럼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은덕을 천하에 두루 미쳤으므로, 해와 달이 비치고 비바람이 이르는 곳이면 다 그에게 복종하였다.
5.요(堯) 제곡은 진봉씨(陳鋒氏)의 딸을 아내로 맞아 방훈(放勛)을 낳았고, 또 추자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지(摯)를 낳았다. 제곡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지가 제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지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므로 동생인 방훈이 대신 제위를 계승했으니, 그가 바로 요이다. 그는 하늘처럼 인자하고 신처럼 지혜로웠으며, 사람들은 마치 태양에 의지하는 것처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만물을 촉촉히 적셔주는 비구름을 보듯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는 부유하였으마 교만하지 않았고, 존귀했으나 거드름 피거나 오만하지 않았으며, 황색의 모자를 쓰고 검은 색의 옷을 입고서 흰 말이 끄는 붉은 마차를 탔다. 그는 큰 덕을 밝히어 구족(九族)을 친하게 하였다. 구족이 화목하게 되자 백관의 직분을 분명히 구분하였고, 백관이 공명정대하니 모든 제후국이 화합하였다. 요는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춘분, 하지, 추분, 동지를 정하였다. 1년을 366일로 정하고, 3년에 한 번씩 윤달을 이용하여 사계절의오차를 바로잡았다. 요는 백관들을 계칙하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업적이 다 올라갔다.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아들 단주(丹朱)가 덕이 없음을 알고, 적당한 후계자를 찾았다. 결국 순을 찾았고 그에게 두 딸을 시집 보내었다. 순은 등용된 뒤, 요를 대신하여 정치를 하였다. 순은 계절과 한 달의 날짜를 바로 잡았고 하루의 시각을 바르게 정했고, 음률과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오례를 제정하였다. 또한 십이주(십이주 : 기, 연, 청, 서, 형, 양, 상, 양, 웅, 방, 유, 관)를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물길을 잘 통하게개수하였다. 요는 제위에 오른지 70년 만에 순을 얻었고, 순에게 천자의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스스로는 은거한 지 20년 만에 순을 하늘에 추천하였다. 요는 은거한 지 28년 만에 붕어하니, 백성들은 마치 자신들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요는 아들 단주가 불초해서 천하를 이어받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에 권력을 순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순에게 제위를 넘겨주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얻고 단주만 손해를 보지만, 단주에게 제위를 넘겨주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단주만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요는 "결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하고 한 사람만 이익을 얻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며 결국은 천하를 순에게 넘겨주었다.
6.순(舜) 요가 붕어하고 삼년상을 마치자, 순은 단주에게 천하를 양보하고 자신은 남하의 남쪽으로 피했으나, 제후들이 조근할 때 단주에게로 가지 않고 순에게 왔으며, 소송을 거는 사람들도 단주가 아니라 순에게로 해결해달라고 왔으며, 소송을 거는 사람들도 단주가 아니라 순에게로 해결해달라고 왔으며, 송덕을 구가하는 자들은 단주가 아닌 순의 공덕을 구가하였다. 그러자 순은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하며 도성으로 가서 천자의자리에 올랐으니 이 이가 순임금이다. 우순(虞舜)의 이름은 중화(重華)이다. 중화의 부친은 고수이고, 고수의 부친은 교우이며, 교우의 부친은 구망, 구망의 부친은 경강, 경강의 부친은 궁선, 궁선의 부친은 전욱, 전욱의 부친은 창의이니, 순에 이르기까지 일곱 대가 흘렀다. 궁선부터 순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지위가 낮은 서민이었다. 순의 부친 고수는 맹인이었다. 순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고수는 다시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 상(象)을 낳았는데, 상은 매우 오만하였다. 고수는후처가 낳은 아들을 편애하여 항상 순을 죽이고자 하였으므로 순은 이를 피해서 도망 다녔고, 순이 어쩌다가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게 되면 곧 벌을 받았다. 그러나 순은 언제나 아버지와 계모에게 순종하며 잘 모셨고, 동생에게도 잘 대했으며, 날마다 날마다 독실하고 성실하며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순임금은 우를 천거 받았고, 우는 전국 아홉 개의 산을 개간했고, 아홉 개의 호수를 통하게 하였으며, 아홉 개의 강의 물길을 통하게 했고, 전국 구주를 확정하였다. 순은 스물 살 때 효자로 명성이 자자하였고, 서른 살에는 요임금에게 등용되었으며, 쉰 살에는 천자으 일을 대행하였다. 그의 나이 쉰여덟 살 때 요임금이 붕어하자, 예순한 살에 요임금을 이어서 제위에 올랐다. 순임금은 제위를 이어 받은 지 39년 만에 남쪽을 순수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어하였다. 그를 강남의 구의산에 장사 지냈으니, 이곳이 바로 영릉이다.
오제시대 가계도
夏 1.우(禹) 하(夏 : 우임금이 봉해진 나라의 이름)나라 우는 이름이 문명(文命)이다. 우의 부친은 곤이며, 곤의 부친은 전욱이다. 전욱의 부친은 창의이고, 창의의 부친은 황제이다. 우는 황제의 현손이며 전욱의 손자이다. 우의 증조부 창의와 부친 곤은 모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다. 우가 순에게 등용되었을 때, 익, 후직과 함께 순임금의 명을 받들어서 치수공사를 맡게 되었다. 그의 부친은 치수사업에 실패하여 처벌받았고, 우는 이것을 슬퍼하였기때문에 노심초사 부지런히 일하느라 밖에서 13년을 지내면서도 자기 집 대문 앞을 지나가며 감히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총명하고 의욕이 왕성하며 매우 부지런하였다. 그 덕은 어김이 없었고, 인자하여 친애할 수 있었으며, 말은 신용이 있었다. 말소리는 음률처럼 화기애애하였고, 행동은 법도에 맞았으며, 사리판단을 잘하여 일을 처리하고, 부지런하고 엄숙하여 백관의 모범이 되었다. 우는 구주(九州)를 개척하고, 구도(九道)를 소통시키며, 구택(九澤)을 축조하고, 구산( 九山)에 길을 뚫었다. 기주에서부터 시작하여, 연주, 청주, 서주, 양주(揚州), 형주, 예주, 양주(梁州), 옹주를 개척했다. 견산, 호구산, 지주산, 태행산, 서결산, 웅이산, 파총산, 내방산, 문산을 소통시켰다. 약수, 흑수, 황하, 양수, 장강, 연수, 회하, 위수, 낙수를 소통 시켰다. 순임금은 하늘에 우를 천거하여 계승자로 삼았다. 70년이 지나 순임금이 붕어하였다. 삼년상이 끝나자 우는 제위를 사양하고 순의 아들 상균을 피하여 양성으로 갔다. 천하의 제후들은 모두 상균을 떠나서 우를 알현하러 왔다. 우는 그제서야 천자에 즉위하고 남면하여 천하 신민의 알현을 받았으며, 국호를 하후(夏后)라고 하고, 성을 사씨라고 하였다. 우임금은 즉위하자 고요를 하늘에 천거하여 정권을 그에게 넘겨주려고 하였으나 고요가 죽었다. 그는 고요의 후손을 영(英)고 육(六)에 분봉하고 혹은 허(許)에 봉하였다. 그후에 익을 천거하여 정사를 맡겼다.
2.계(啓) 우가 즉위한지 10년이 지난 후 동쪽을 순시하다가 회계에 이르러서 붕어하였다. 우는 천하를 익에게 넘겨주었다. 삼년상이 끝나자 익은 우임금의 아들 계에게 제위를 양보하고 자신은 물러나서 기산의 남쪽에서 살았다. 우의 아들 계는 현명하여 천하가 모두 그에게 마음을 돌렸다. 우임금이 붕어하며 익에게 천하를 넘겨주었지만, 익은 우임금을 보좌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천하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제후들은 모두 익을 떠나서 계를 알현하고 "우리의 왕 우임금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계가 천자에 즉위하였으니, 이 이가 바로 하나라의 계임금이다. 유호씨(有扈氏)가 불복하자 계는 그를 토벌하려고 출전하여 감(甘)에서 크게 싸우게 되었다. 전쟁에 임박하여 계는 감서(甘誓)를 짓고 육군(六軍)의 장수들을 소집하여 훈계하였다. 마침내 계가 유호씨를 멸망시키자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와서 알현하였다.
3.태강(太康) 하나라 계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태강이 즉위하였다. 태강임금은 사냥과 음악에 탐닉하여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유궁씨(有窮氏)의 왕에게 쫓겨나 돌아오지 못하여, 나라를 읽어버리게 되었다. 그의 다섯 형제들은 낙수의 북쪽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오자지가(五子之歌)를 지었다.
4.중강(仲康) 태강임금이 붕어하자 동생 중강이 즉위하였으나 이 이가 바로 중강임금이다. 중강임금이 제위에 있을 때 사시(四時)를 주관 하는 희씨와 화씨가 지나치게 음주에 빠져서 계절과 일력을 어지럽혔다. 이에 윤(胤 : 중강의 대신)이 그들을 정벌하고 윤정(胤征)을 지었다.
5.상(相) 중감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상이 즉위하였다.
6.소강(少康) 상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소강이 즉위하였다. 좌전(左傳) 등의 기록에 의하면, 소강은 하나라 중흥기의 임금이다. 후X(后X)가 집권할 때, 상임금은 상구(商丘)로 도망가서 동성인 제후 짐관씨와 짐심씨에게 의탁하였는데, 한X이 후예를 죽여서 제위를 탈취하고 요와 희를 낳았는데, 요는 짐관씨와 짐심씨를 멸하고 상임금을 시해했다. 이에 상임금의 부인이 친정으로 도망가서 소강을 낳았으며, 소강은 각고분투하여 요와 희를 멸하고 다시 하나라를 부흥시켰다.
7.여(予) 소강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여가 즉위하였다.
8.괴(槐) 여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괴가 즉위하였다.
9.망(芒) 괴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망이 즉위하였다.
10.설(泄) 망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설이 즉위하였다.
11.불항(不降) 설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불항이 즉위하였다.
12.경 불항임금이 붕어하자 아우 경이 즉위하였다.
13.근 경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근이 즉위하였다.
14.공갑(孔甲) 근임금이 붕어하자 불항임금의 아들 공갑이 즉위하였다. 공갑임금은 즉위한 후 귀신을 좋아하였으며 음란하였다. 하후씨의 덕망은 이때부터 쇠퇴해져서 제후들이 배반하기 시작하였다. 하늘이 두 마리의 용을 내려보냈는데 각각 암수 한 마리였다. 공갑임금은 용을 기를 줄 몰랐으며, 용을 기를 줄 아는 환룡씨도 구하지 못했다. 도당씨가 쇠망한 후에 유루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환룡씨에게서 용을 길들이는 법을 배웠으며 이로써 공갑임금을 섬겼다. 공갑임금은 그에게 어룡씨라는 성씨를 주고 시위(豕韋)의 후손의 봉지를 받게 하였다. 암컷 용 한마리가 죽자 유루는 공갑임금이 먹도록 하였다. 공갑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다시 용을 구해오라고 하자 유루는 두려워서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15.고(皐) 공갑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고가 즉위하였다.
16.발(發) 고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발이 즉위하였다.
17.이계(履癸), 걸왕(桀王) 발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이계가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걸왕이다. 공갑임금 이래로 제후들이 대부분 하나라를 배반하자 걸왕은 덕행에 힘쓰지 않고 무력으로 백성들을 해쳤으므로, 이때부터 백성들은 더욱 견딜 수 없었다. 걸왕은 상족(商族)의 수령인 탕(湯)을 소환하여 하대(夏臺)에 가두었다가 얼마 안 되어 석방하였다. 탕은 덕을 수양하였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귀순하였다. 탕은 마침내 군사를 거느리고 하나라의 걸왕을 공격하였다. 걸왕은 명조(鳴條)로 도주하였으나 결국은 추방되어 죽었다. 걸왕은 사람들에게 "나는 하대에서 탕을 죽이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탕은 천자가되어 하나라의 천하를 차지하였다. 탕왕은 하나라의 후손을 제후에 봉하였으며 주나라에 이르러 하의 후손은 기(杞)에 봉해졌다.
夏의 세계표 商(殷) 1.은(殷)나라의 시조 설 은나라의 시조인 설의 어머니는 간적이다. 그녀는 유융씨 부족의 딸이며 제곡의 둘째 부인이었다. 간적 등 세 사람이 함께 목욕을 갔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하여 낳은 아이가 바로 설이다. 설은 장성하여 하나라 우의 치수산업을 도와서 공을 세웠다. 순이 설에게 "백관이 화친하지 않고 오품(五品)이 화목하지 못하니, 그대가 사도를 맡아서 오교(五敎)를 정중히 전파하고, 백성들을 너그럽게 감화시켜주시오"라고 명하였다. 순은 설에게 상(商)을 봉지로 내리고 자씨(子氏)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설은 요, 순, 우 시기에 등용되어 백관을 위해서 일했으므로, 그의 공적은 백관들 사이에 칭송되었고, 백관들은 안정을 얻게 되었다.
2.설에서부터 탕(湯)까지의 계보 설 - 소명(昭明) - 상토(相土) - 창약(昌若) - 조어(曹어) - 명(冥) - 진(振) - 미(微) - 보정(報丁) - 보을(報乙) - 보병(報丙) - 주임(主壬) - 주계(主癸) - 천을(天乙), 성탕(成湯)
3.성탕(成湯) 하나라의 걸왕이 포악한 정치를 하며 주색에 빠져 지내자, 제후국인 곤오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탕이 군대를 일으키고 제후들을 인솔하니 이윤(탕의 신하)도 함께 따라나갔고, 탕은 직접 도끼를 들고 곤오를 정벌하고 나서 걸왕까지 정벌하고자 하였다. 탕은 탕서(湯誓)를 지었는데, 그 때 탕이 "나는 무용(武勇)이 뛰어나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를 무왕(武王)이라고 칭했다. 걸왕이 유융의 허(虛)에서 패하여 명조로 달아나자 하군이 지리멸렬해졌다. 탕이 삼종(당시 걸왕에게 충성하던 제후국)을 정벌하여 많은 보물들을 획득하자 탕의 신하인 의백과 중백이 보전(寶典)편을 지었다. 탕이 하를 정벌한 다음, 하의 신사(神社)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하사(夏社)편을 지었다. 이윤이 바른 정치를 공포하자 제후들이 모두 복종하였고, 드디어 탕이 천자의 지위에 올라 전국을 평정하였다. 탕이 역법을 개정하고, 복색을 바꾸어 백색을 숭상하였으며 조회를 낮에 하기로 결정하였다.
4.외병제(外丙帝) 탕이 붕어했을 때 태자(太子)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서, 태정의 동생인 외병이 즉위하니, 이 이가 바로 외병제이다.
5.중임제(中壬帝) 외병제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외병제의 동생 중임이 즉위하여 중임제가 되었다.
6.태갑제(太甲帝), 태종(太宗) 중임제가 즉위한 지 4년 만에 붕어하자 이윤(탕의 신하)은 태정의 아들 태갑을 즉위 시켰다. 태갑은 성탕의 직계 장손으로 태갑제가 되었다. 태갑제가 즉위한 지 3년이 되니 포악해져 탕의 법령을 지키지 않고 도덕을 문란하게 하자,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내쫒고 3년 동안 섭정하면서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태갑제가 3년 동안 동궁에 머물면서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훌륭한 인물이 되자, 이윤은 태갑제를 영접하여 그에게 정권을 되돌려주었다. 태갑제가 덕을 수양하니 제후들이 모두 은에 복종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평안하게 되었다. 이에 이윤이 태갑제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서 태갑훈 3편을 지었고, 태갑제를 기리어 태종(太宗)이라고 칭했다.
7.옥정제(沃丁帝) 태종이 붕어하자 아들 옥정이 즉위하였다.
8.태경제(太庚帝) 옥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태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경제이다.
9.소갑제(小甲帝) 태경제가 붕어하자 아들 소갑이 즉위하였다.
10.옹기제(雍己帝) 소갑제가 붕어하자 동생 옹기가 즉우하니, 그가 바로 옹기제이다. 은 왕조의 국세가 쇠해지자 제후들 가운데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 이가 생겼다.
11.태무제(太戊帝), 중종(中宗) 옹기제가 붕어하고 동생 태무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무제이다. 태무제는 즉위하여 이척을 재상으로 삼았다. 박에서 뽕나무와 닥나무가 함께 자라기 시작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한아름이 넘게커지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서, 태무제가 두려워서 이척에게 그 영문을 물어보았다. 이척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자니 요사스러움도 덕행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옵니다. 임금께서 행하신 정치에 잘못은 없었는지요? 임금께서는 덕행의 수양에 힘쓰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태무제가 이척의 말대로 하자 불길한 징조인 뽕나무가 말라서 죽었다. 이척은 무함에게 모든 공을 돌려서 그럴 칭찬하였다. 무함은 왕가의 사무를 잘 처리하였으며 함애와 태무를 지었다. 태무제가 태묘(太廟)에서 이척을 칭송하면서 그를 신하 이상으로 대우하려고 하자 이척이 사양하고 원명을 지었다. 태무제의 대에 와서 은나라가 다시 흥하게 되어 제후들이 은나라에 복종하게 되었기에 태무제를 중종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12.중정제(中丁帝) 중종이 붕어하자 아들 중정이 즉위하였다. 중정제는 오로 천도하였다. 중정제 이후로 적자계승제가 폐지되고 형제와 형제의 아들로 제위를 계승하니, 제위계승 문제로 서로 다투게 되어 이후 구세(九世)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에 제후들이 조회하러 오지 않게 되었다.
13.외임제(外壬帝) 중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외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외임제이다.
14.하단갑제(河亶甲帝) 외임제가 죽자 동생 하단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하단갑제이다. 그는 상(相)으로 천도하였다. 하단갑제 시기에 은의 정치는 다시 쇠락해졌다.
15.조을제(祖乙帝) 하단갑제가 붕어하자 아들 조을이 즉위했는데, 조을제가 즉위하자 은 왕조는 다시 부흥하였다. 형(刑)으로 천도하였다.
16.조신제(祖辛帝) 조을제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조신이 즉위하였다.
17.옥갑제(沃甲帝) 조신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옥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옥갑제이다.
18.조정제(祖丁帝) 옥갑제가 붕어하자 옥갑의 형 조신의 아들이 조정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정제이다.
19.남경제(南庚帝) 조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옥갑제의 아들인 사촌동생 남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남경제이다.
20.양갑제(陽甲帝) 남경제가 붕어하자 조정제의 아들인 양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양갑제이다. 양갑제 때에 이르러 은나라가 다시 쇠퇴하였다.
21.반경제(盤庚帝) 양갑제가 붕어하자 동생인 반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반경제이다. 반경제 시기에 은 왕조는 이미 하북에 도읍했는데, 반경제는 다시 하남으로 천도하여 성탕의 옛 도읍에 거주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은 왕조는 이미 다섯 처례나 천도하면서 정해진 거처가 없었기에 은의 백성들은 모두 걱정하고 원망하며 또다시이동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경제가 제후와 대신들을 타일렀다. "예전 고후이셨던 성탕과 그대들의 선조들께서 함께 힘을 모아 천하를 평정하셨는데, 그분들이 제정한 법도는 따를 수 있는 것이었소. 그런데 지금 선왕의 법도를 저버리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정을 이룰 수 있겠소?" 이에 하남으로 옮기어 박을 정돈하고 탕의 법령을 시행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고, 은 왕조의 국운이 다시 흥하게 되었다. 제후들이 모두 입조하게 된 것은 반경제가 성탕의 덕정을 따랏기 때문이었다.
22.소신제(小辛帝) 반경제가 붕어하자 동생 소신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신제이다. 그러나 소신제가 즉위한 후 은나라가 다시 쇠락해지자 백성들은 반경을 사모하며 반경 3편을 지었다.
23.소을제(小乙帝) 소신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소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을제이다.
24.무정제(武丁帝), 고종(高宗) 소을제가 붕어하자 아들 무정이 즉위했는데, 무정제는 부열을 등용하고, 정사를 바로잡으며 은덕을 베푸니 천하으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 하고, 은나라 국운이 다시 흥하게 되었다.
25.조기제(祖己帝) 무정제가 붕어하자 아들 조기가 즉위하였다. 조기는 무정제가 꿩이 정(鼎)의 손잡이에 날아들어 울었던 일을 계기로 삼아 덕정을 베푼 일을 기리기 위하여 그를 고종이라고 칭하고 고종융일과 고종지훈을 지었다.
26.조경제(祖庚帝) 조기제가 붕어하자 동생 조경이 즉위하였다.
27.갑제(甲帝) 조경제가 붕어하여 동생 조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갑제이다. 갑제는 음란한 행동을 일삼았으므로 은왕조가 다시 쇠하게 되었다.
28.늠신제(凜辛帝) 갑제가 세상을 떠나니 아들 늠신이 즉위하였다.
29.경정제(庚丁帝) 늠신제가 붕어하자 동생 경정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경정제이다.
30.무을제(武乙帝) 경정제가 죽자 아들 무을이 즉위했는데, 이때 은은 다시 박을 떠나서 하북으로 천도하였다. 무을제는 무도하여 우상을 만들고 이를 천신(天神)이라고 불렀다. 그는 우상과 도박을 하면서 옆 사람에게 심판을 보게 하고는 천신이 지면 천신을 모욕하였다. 또한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피를 가득 채우고 높이 매달아 활로 쏘고서 이를 사천(射天)이라고 명명하였다. 무을제는 황하와 위수 사이를 수렵을 갔다가 갑자기 천둥이 치자 그 소리에 놀라서 죽고 말았다.
31.태정제(太丁帝) 무을제가 죽자 아들 태정이 즉위하였다.
32.을제(乙帝) 태정제가 붕어하자 아들 을이 즉위하였다. 을제가 즉위하자 은 왕조는 더욱 쇠퇴해졌다.
33.신제(辛帝), 주제(紂帝) 을제의 큰아들은 계(啓)였으나, 계의 모친이 정후(正后)가 아니었기 때문에 태자가 되지 못했다. 작은 아들은 이름이 신이었 는데, 그의 모친이 을제의 정후였기 때문에 그가 태자가 되었다. 을제가 붕어하자 아들 신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신제이고, 세상에서는 그를 '주'라고 부른다. 주제는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말재간이 뛰었났을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신속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지혜는 신하으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으며, 말재주는 자신의 허물을 교묘하게 감출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과시하여 천하에 그의 명성을 드높이려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 못하다가 여겼다.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했으며, 여자를 좋아하였다. 특히 달기를 총해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는 사연에게 음탕한 악곡을 작곡하게 하고, 북리(기녀원)에서 추는 것 같은 저속한 춤고 음탕하고 퇴폐적인 가락을 새로 만들도록 하였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녹대(조가성에 쌓은 높은 단)를 돈으로 채우고 거교(지명)를 곡식으로 채우게 하였다. 게다가 여기 저기서 개와 말, 기이한 애완무을 수집하여 궁실을 가득 메웠다. 사구(지명)의 원대를 크게 확장하여 여러가지 야수와 새들을 자아다가 이곳에 풀어놓았다. 주는 귀신도 우습게 알았다. 또한 사구에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들이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처럼 고기를 매달아 놓고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이새도록 술을 마시며 놓았다. 주가 포악해지자 제후들이 그를 떠났고, 주(周)의 무왕(武王)에 의해 정벌당하고, 스스로 불 속으로 뒤어들어 자살하였다. 무왕은 달기를 처형하고, 주에 의해 갇힌 기자를 풀어줬으며 주의 아들 녹보무경에게 봉토를 나누어주어 주어 은나라의 제사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에 주나라의 무왕이 천자가 되었고, 후세 사람들은 군주를 제(帝)라고 부르지 않고 왕(王)으로 낮추어 불렀다.
商(殷)의 세계표
周 1.주(周)의 시조 후직(后稷) 이름은 기(棄). 그의 어머니는 유태씨(有邰氏)의 딸로 강원(姜原)이라고 불렸는데, 강원은 제곡의 정비(正妃)였다. 강원이 들에 나가서 거인의 발자국을 보았는데, 갑자기 마음이 기뻐지면서 그것을 밟고 싶어졌다. 그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으니 마치 아기를 가진 듯 배 안이 꿈틀거렸다. 달을 다 채워서 아들을 낳았는데 불길하게 생각되어 비좁은 골목에 버렸으나 말이나 소가 지나가면서 모두 피하고 밟지 않았다.(주몽설화와 비슷..) 다시 아이를 수풀 속에 옮겨놓으니, 마침 산속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또다시 장소를 옮겨서 도랑의 얼음 위에 버렸으나 날짐승들이 날개로 아이를 덮고 깃을 깔아주었다. 그러자 강원은 신기 하게 여겨 아이를 데려다가 잘 키웠다. 처음에 아이를 버리려고 생각하였으므로 '기(棄:버리다)라고 불렀다. 기는 어린 시절 출중하여 큰 인물의 기개가 있는 듯했다. 그는 놀이를 하면서도 삼과 콩을 잘 심었는데, 그가 심은 삼과 콩은 모두 잘 자랐다. 성인이 되자 더욱 농경에 힘써 토지의 특성을 살펴서 곡식을 심어야 할 곳에 농사를 지으니, 백성은 모두 본받았다. 요임금이 이러한 소문을 듣고 기를 농사(農師:고대의 관직 이름으로 농사를 관장하는 벼슬)로 등용하자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유익한 공을 세웠다. 요임금은 기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이라고 칭했으며 따로 희씨(姬氏) 성을 하사하였다. 후직이 흥성한 시기는 요, 순, 우 의 시대였고, 모두 미덕을 지녔다.
2.후직에서부터 고공단보까지의 계보 후직 - 부줄(不茁) - 국(鞠) - 공류(公劉) - 경절(慶節) - 황복(皇僕) - 차불(差弗) - 훼유 - 공비(公非) - 고어 - 아어 - 공숙조류(公叔祖類) - 고공단보(古公亶父)
3.고공단보(古公亶父) 고공단보가 후직과 공류의 사업을 다시 익히고 덕을 쌓고 의를 행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훈육(薰育) 융적(戎狄)이 고공단보를 공격하여 재물을 요구하자 그들에게 재물을 내주었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이 다시 공격하여 땅과 백성을 요구 하자 백성들은 모두 분개하여 싸우고자 했다. 그러자 고공단보는 "백성이 군주를 옹립하는 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오. 지금 융적이 우리를 공격하는 까닭은 우리의 땅과 백성 때문이오. 백성이 나에게 속하든 그들에게 속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소? 백성들이 나를 위해서 싸우고자 한다면 이는 그들의 아버지나 아들을 죽여가면서 그들의 군주가 되는 것이니, 나는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사병을 거느리고 빈을 떠나서 칠수, 저수를 건너고 양산을 넘어서 기산 아래 정착했다. 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고 다시 기산 아래 고공단보에게 모두 귀순했다. 그 이웃나라의 사람들도 고공단보가 인자하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순했다. 이때 고공단보는 융적의 풍속을 개량하고 성곽과 가옥을 건축하고 읍을 나누어 그들을 살게 했으며, 오관유사(五官有司)를 설치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두 노래하며 그 덕을 칭송했다. 고공단보에게는 장남인 태백(太伯)과 차남인 우중(虞仲)이 있었다. 그의 아내 태강이 낳은 막내아들 계력(季歷)은 태임(太任)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태강과 태임은 모두 어진 부인이었다. 태임이 창(昌)을 낳았을 때 성스러운 길조(전설에 의하면 창이 출생할 때 붉은 새가 단서(丹書)를 물고 방으로 날아들었다고 한다.)가 있었다. 그러자 고공단보는 "나의 시대에 큰 사업을 일으킬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창에게 해당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태백과 우중은 고공단보가 계력을 옹립하여 창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것을 알고는 둘이서 형만(荊蠻)으로 달아나서 문신을 하고 머리털을 짧게 자르고서 왕위를 계력에게 양보했다.
4.공계(公季) 고공단보가 죽고 계력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공계이다. 공계는 고공단보가 남긴 정도를 잘 닦고 성실하게 의를 행했으므 로 제후들이 그에게 순종했다.
5.문왕(文王), 서백 창(西伯 昌) 공계가 죽자 아들 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서백으로, 서백은 후에 문왕이라고 불렸다. 서백은 후직과 공류의 사업을 따르고 고공단보와 공계의 법도를 본받아 오로지 어진 정치를 행하고 늙은이를 공경하며 어린이를 사랑했다. 그가 어진 사람에게는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고 낮에는 재사를 접대하기에 식사할 겨를도 없었으므로 재사들은 대부분 서백에게 몰려들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고죽(孤竹)에서 서백이 노인을 우대한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서백을 따랐다. 태전, 굉요, 산의생, 육자, 신갑대부등이 모두 가서 그를 따랐다. 숭후호(崇侯虎)는 은나라의 주(紂)에게 서백을 모함하기를 "서백이 선과 덕을 쌓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기울어지니, 장차 임금께 불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는 마침내 서백을 유리에 가두었다. 굉요 등이 이 일을 거정하여 유신씨의 미녀, 여융의 문마, 유웅의 구사를 다른 여러 특산물들과 함께중의 총애를 받는 비중을 통해 주에게 바쳤다. 주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한 가지 물건 만으로도 서백을 석방시키기에 충분한데, 게다가 이토록 많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서백을 사면 시키고 그에게 궁시(큰 활과 작은 활)와 부월(큰 도끼와 작은 도끼)을 하사하여 서백에게 주변 제후국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리고는 " 서백을 비방한 자는 숭후호이다"라고 말했다. 서백이 낙하 서쪽의 땅을 바치며 주에게 포격형(기름 바른 기둥 아래 불을 질러놓고, 죄인에게 그 위를 걸어가게 하여 미끄러지면 불에 타죽게 하던 형벌.)을 없애주도록 청원하자. 주는 그것을 허락했다. 서백이 남몰래 선행을 하였으므로 제후들은 모두 그에게 와서 공정한 판결을 청했다. 이때 우(虞)와 예(芮)의 사람들에게 송사가 있었는데, 양자가 해결하지 못하자 주나라로 찾아갔다. 그들이 주나라 경내에 들어서보니 농부들이 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하고, 백성들의 풍속은 모두 연장자에게 양보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우, 예의 사람은 채 서백을 만나기도 전에 부끄러워하며 "우리처럼 싸우는 것은 주나라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바이니, 가서 뭐하겠는가? 부끄럽게만 될텐데..."라며 그냥 되돌아가서 서로 양보하고 헤어졌다. 제후들이 이 소문을 듣자 "서백은 아마도 천명을 받은 군주인가보다"라고 말하였다. 이듬해 서백은 견융(犬戎)을 정벌하고, 그 다음해 밀수(密須)를 정벌했다. 다음해에는 기국(耆國)을 쳐서 무찔렀다. 은의 조이가 이러한 소식을 듣자 두려워 주에게 고하였다. 그러나 주는 "내게 천명이 있지 않은가?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다음해 서백은 우를 정벌했다. 그 다음해에는 숭후호를 정벌하고 풍읍을 건설하여 기산 아래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서백은 약 50년간 왕위에 있었다. 아마도 그가 유리에 갇혀 있을 때 '역(易)'의 8괘를 더하여 64괘로 만든 것 같다. 시인들은 서백이 천명을 받아 왕으로 칭해진 때는 바로 우와 예의 송사를 해결한 해라고 말하였다. 그후 10년이 지나서 그가 붕어하자 시호를 문왕이라고 했다. 서백은 법도를 개정하고 정삭을 제정했다. 그는 고공단보를 추존하여 태왕(太王)이라고 했고, 공계를 높이어 왕계(王季)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개 주(周)의 왕업이 조부인 태왕 고공단보로부터 흥했기 때문이다.
6.무왕 발(武王 發) 서백이 붕어하고 태자 발이 즉위하였으니, 이 이가 바로 무왕이다. 무왕이 즉위하자 태공망(太公望 : 성은 강(姜), 씨(氏) 는 여(呂), 이름이 상(尙), 민간에서는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부른다. 제(濟)에 봉해졌다.)을 사(師 : 군사참모)로 삼고 주공( 周公 : 이름은 단(旦), 문왕의 아들, 무왕의 동생, 곡에 봉행져 노공(魯公)이 되었으나, 임지로 가지 않고 무왕을 보좌하였다.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했다. )을 보(輔)로 임명했으며 소공(召公 : 문왕의 서자, 召에 봉해져 소공이라고 불린다. 연(燕)의 시조.)과 필공(畢公 : 이름은 高, 문왕의 아들. 필에 봉해짐)등은 왕을 보자하며 문왕의 위업을 배우고 확대하게 하였다. 문왕 9년(문왕이 9년에 붕어하였으나 무왕은 문왕의 연호를 계속 채용하였다.), 무왕이 필에서 제사를 올리고 동쪽으로 가서 군대를 사열하고 맹진(盟津)에 이르렀다. 그는 문왕의 목주(나무로 만든 위패)를 만들어 중군(中軍)의 수레에 실었다. 무왕은 자신을 태자(太子) 발이라고 칭하고서 문왕의 명을 받들어 정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무왕은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 제절(諸節)에게 "우리 모두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일합시다. 성실하게 노력합시다! 나는 무지하지만 선조께서 덕이 있으시어 미천한 이 몸이 선조의 공적을 받았소. 상벌제도를 바르게 세워 공적을 보장하겠소"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일으켰는데, 군사인 상보(태공망)가 각 제후들에게 "그대들의 사병을 모아 배를 띄워서 출동하시오! 나중에 도착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오!"라고 호령하였다. 무왕이 강을 건너서 중류에 이르자 흰 물고기가 왕의 배로 튀어올라, 무왕은 몸을 굽혀서 집어들어 제를 올렸다. 강을 다 건너자 불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더니, 왕이 머무는 지붕에 이르렀을 때 까마귀로 변했는데, 그것들은 붉은 색이었고 까악까악 하고 울었다. 이때 기일을 정하지 않았어도 맹진에 모인 제후는 800명이었다. 제후들이 모두 "주는 정벌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나, 무왕은 "그대들은 아직 천명을 모르니, 정벌할 수 없소!"라고 하고는 병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2년이 지나자 주(紂)는 혼란스러움과 포학함이 더욱 심해져서, 왕자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감금했다는 소문이 들렸다.그러자 태사(太師) 자(疵)와 소사(少師) 강(强)은 은나라의 악기를 품고 주(周)나라로 달아났다. 그러자 무왕은 제후들에게 "은의 죄가 무거우니 이제는 어서 정벌하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문왕이 남긴 뜻을 받들어 융거(戎車) 300대와 용사 3000명, 갑사(甲士) 45000명을 이끌고동으로 가서 주(紂)를 정벌했다. 11년 12월 무오일에 군사들이 모두 맹진을 넘었고 제후들이 전부 모였다. 그들은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싸우자고 다짐하였다. 무왕은 곧 태서(太誓)를 지어 많은 병사들에게 고하였다. "지금 은나라의 왕 주는 단지 자기 부인(달기)의 말만 듣고 스스로 천명을 끊었으며, 삼정을 훼손하게 하고 그의 왕부모제를 멀리하였고, 마침내 선조의 음악을 저버리고 음란한 노래를 만들어 올바른 소리를 어지럽혀 자기 부인만 기쁘게 하였소. 이에 이 사람 발은 삼가 천벌을 집해하려고 하오. 그대들이여, 노력합시다! 두 번 세 번 다시 행하지 않도록!" 2월 갑자일의 동틀 무렵, 무왕은 아침 일찍 상나라 교외의 목야에 이르러 맹세하였다. 무왕은 왼손에 황색 도끼를 쥐고 오른손에 흰색의 모를 들고 지휘하며 말하였다. "멀리서도 와주었소, 서토(西土)의 사람들이여! 자 나의 제후들이여! 사도, 사마, 사공, 아려, 사씨, 천부장, 백부장, 그리고 용, 촉, 강, 모, 미, 노, 팽, 복의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창을 높이 들고 방패를 줄마추고 창을 치켜드시오! 선서하겠소."라고 하며 선서하였다. 선서가 끝나자 집결한 제후들은 전거(戰車)가 4000대였고, 그들은 교외의 넓은 들에 도열하였다. 주(紂)는 무왕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70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무왕에 대항하게 했다. 무왕은 사상보에게 100명의 용사를 이끌고 치사(도발)하게 하고 대졸을 주의 대오로 돌격하게 했다. 주의 군대가 비록 수는 많았지만 모두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무왕이 빨리 쳐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주의 군사들은 도병(창을 거꾸로 하는 것)하여 싸우면서 무왕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무왕이 돌격하자 주의 병사는 모두 무너지고, 그들은 주를 배반했다. 주는 성으로 다시 도망쳐들어가서 녹대에 올라 보석이 박힌 옷을 뒤집어 쓰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다. 무왕이 커다란 백기를 들고 제후들을 지휘하니 제후들이 모두 무왕에게 절하였고, 무왕이 제후들에게 읍(揖)하자 제후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무왕이 상나라의 도성에 이르자, 상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교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왕은 군신들로 하여금 상의 백성들에게 "하늘이 행복을 내려주었도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상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재배하며 머리를 땅에 조아리자, 무왕 역시 답례했다. 무왕은 드디어 성으로 들어가서 주가 죽은 장소에 이르렀다. 그는 직접 주의 시신을 향해서 화살 세발을 쏜 후, 마차에서 내려서 경검으로 시신을 치고 황색 도낄로 주의 머리를 베어 커다란 백기에 매달았다. 다시 주의 애첩인 두 여자를 찾아가니, 두 여자는 모두 이미 목을 매어 자살한 뒤였다. 무왕은 또 화살 세 발을 쏴 검으로 치고 흑색 도끼로 목을 베어 작은 백기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무왕은 성을 나와서 다시 군대로 돌아갔다.
周의 세계표
은왕조는 동이족 고대 은나라에 대하여 은나라를 건국한 탕왕湯王의 시조인 [설]이 순임금(제순유우)과 하나라의 우禹 임금때 벼슬을 하고 상商이라는 곳의 제후로 봉해진 가계 내력과 도읍의 이름을 따라 상商나라 라고도 하며, 고대 은나라를 포함하여 현재의 중국 땅에 있던 옛 중원 일부의 역사는 삼황(태호복희. 염제신농.황제헌원), 오제(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요도당. 제순유우), 하夏·은殷·주周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일설에는 은나라 이전의 삼황오제와 하나라를 전설적인 왕조로 취급하여 신화 정도로만 보는 견해도 있으나 동이족의 뿌리를 찾아보면 이들의 역사는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주나라까지의 중원 왕조의 흐름을 서술식으로 체계화 하면 다음과 같다(중원의 왕조는 하나라 이전까지는 세습 왕조가 아니라 덕있는 사람이 대통을 이어 받았다). ①배달국倍達國의 5대 환웅 태우의太虞儀(즉위 BC 3512)는 1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다의발多儀發은 대통을 이어 6대 환웅이 되고 그중 막내인 태호복희는 중원으로 진출, 현 하남성의 진陳에 도읍하여 문명을 개척하였다. ②배달국 8대 환웅 안부련安夫連(즉위 BC 3240)의 신하로서 소전少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강수姜水(섬서성 기산현岐山縣)에서 군軍을 감독하던 직책에 있었다. 소전은 웅씨熊氏족의 지류로서 배달국에서 대대로 우가牛加의 직책으로 주곡主穀을 관장하던 고시씨의 먼 후손이라고 한다. 이 소전의 아들이 염제신농이며 중원의 남방으로 진출하여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게 된다. ③염제신농의 아버지인 소전의 후손 지파중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공손의 후손중에 황제헌원黃帝軒轅(BC 2692~2592)이 나왔다. 황제헌원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치우천왕蚩尤天王 이라고도 함)과의 수차례에 걸쳐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뿌리를 캐보면 결국 같은 동족간의 전쟁이었을 뿐이다. ④삼황三皇이후의 오제五帝는 그 근원이 모두 삼황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다음과 같다. ▲ 소호금천 : BC 2598 ~ BC 2514 ▲ 전욱고양 : BC 2513 ~ BC 2436 ; 황제헌원의 손자 ▲ 제곡고신 : BC 2435 ~ BC 2365 ; 황제훤원의 증손자 ▲ 제요도당 : BC 2357 ~ BC 2258 ; 요임금이라고도 함. 요임금 25년에 단군 왕검 조선 건국. ▲ 제순유우 : BC 2255 ~ BC 2208 ; 순임금이라고도 함. ⑤순임금의 뒤를 이어 순임금때 치수에 공이 큰 우禹가 제위를 이어 받아 하夏나라를 세웠다. 이때부터 하나라(BC 2183 ~ BC 1752)는 왕조를 세습하기 시작하여 17대에 걸쳐 약 400여년 존속하였다. ⑥하나라의 마지막 왕은 폭군으로 이름 높은 걸桀인데, 걸왕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인물이 성탕成湯이라는 제후였다. 성탕의 조상은 [설]이며 [설]은 황제헌원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의 아들이다. [설]은 순임금과 하나라 우임금때 상商이라는 곳의 제후로 봉해졌고 그의 후손인 성탕成湯이 걸왕을 내몰고 단군조선 13대 흘달屹達의 조력을 받아 걸왕을 축출하고 은殷(商)나라를 건국하였다. 은나라는 BC 1600년경에 창건하여 BC 1050년까지 약 600여년간 존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實證 한단고기]가 인용한 <단군세기>나 <규원사화>에 의하면 13대 단군 갑오 16년(BC 1767년)에 은나라 탕왕湯王의 하나라 정벌 기록이 있어 건국연대 및 멸망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⑦오제五帝중 제곡고신의 여러 부인들중 강원姜嫄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 부인의 아들이 후직后稷이며, 후직의 후손들이 중원의 서쪽으로 진출하여 융적戎狄(견이를 일컫는 말이며 서쪽에 살았다고 하여 서이西夷라고도 함)과 섞여 살았다고 한다. 후직의 후손중에 은나라 말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있었으며 고공단보의 손자가 서백 창이고, 서백 창의 아들이 단군조선의 조력으로 은나라의 마지막 왕 폭군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주周나라를 건국한 무왕武王이다.
▒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중원에 왕조를 세웠던 삼황오제나 하.은.주 모두 근본은 동이족이며 환국桓國을 계승한 환웅시대의 배달국이 그 뿌리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주나라 무왕 이후 중원의 동이족이 어떻게 잔존하여 분포되어 왔는지, 지나족(차이나China 즉, 화족華族)과 동이족東夷族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이며 인체상의 어떤 요소로 판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본인도 깊은 지식이 없어 고대사와 종족분포에 전문적인 역량이 높은 분들의 참여를 바라고 있다. 더구나 역사 이래 동이족들중 상당수가 저 넓은 대륙에서 오랜 기간동안 여러 경로를 거쳐서 지속적으로 혼혈이 되어 왔고 문화적으로 흡수되어 왔다면 무슨 근거로 민족을 구별해 낼 수 있겠는가. 쓸데 없는 고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요즈음 북한을 탈출하는 조선족 여인들 중에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중국인과 결혼하거나 몸을 파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마음이 착잡할 뿐이다. 은왕조 연표 왕대 왕명왕통서력 비고 1대성탕(成湯)帝태조BC 1600태정, 외병, 중임 3명의 아들을 둠 2대외병제(外丙帝)태자 태정의 동생태정 병사 3대중임제(中壬帝)외병제의 동생외병제가 일찍 세상을 뜨자 대통을 이어 받음 4대태갑제(太甲帝)태정의 아들탕왕의 직계 장손으로서 태종(太宗)이라고도 함. 5대옥정제(沃丁帝)태자 6대태경제(太庚帝)옥정제의 동생 7대소갑제(小甲帝)태자 8대옹기제(雍己帝)소갑제의 동생 9대태무제(太戊帝)옹기제의 동생중종(中宗)이라고도 함 10대중정제(中丁帝)태자 11대외임제(外壬帝)중정제의 동생 12대하단갑제(河亶甲帝)외임제의 동생 13대조을제(祖乙帝)태자 14대조신제(祖辛帝)태자 15대옥갑제(沃甲帝)조신제의 동생 16대조정제(祖丁帝)조신제의 아들 17대남경제(南庚帝)옥갑제의 아들조정제의 사촌동생 18대양갑제(陽甲帝)조정제의 아들 19대반경제(盤庚帝)양갑제의 동생 20대소신제(小辛帝)반경제의 동생 21대소을제(小乙帝)소신제의 동생 22대무정제(武丁帝)태자고종(高宗)이라고도 함 23대조기제(祖己帝)태자 24대조경제(祖庚帝)조기제의 동생 25대갑제(甲帝)조경제의 동생 26대늠신제(凜辛帝)태자 27대경정제(庚丁帝)늠신제의 동생 28대무을제(武乙帝)태자 29대태정제(太丁帝)태자 30대을제(乙帝)태자☞비간(比干) : 태정제의 둘째 아들 31대주제(紂帝)태자BC 1046을제의 둘째 아들. 紂王으로 낮추어 불려짐
은나라를 건국한 성탕의 뿌리 성탕成湯의 시조는 [설]이라고 한다. 은나라의 시조인 설의 어머니는 간적이다. 그녀는 유융씨 부족의 딸이며 제곡고신(오제五帝중의 한사람)의 둘째 부인이었다. 간적 등 세 사람이 함께 목욕을 갔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하여 낳은 아이가 바로 설이다. 설은 장성하여 하나라 우의 치수산업을 도와서 공을 세웠다. 순이 설에게 "백관이 화친하지 않고 오품(五品)이 화목하지 못하니, 그대가 사도를 맡아서 오교(五敎)를 정중히 전파하고, 백성들을 너그럽게 감화시켜주시오"라고 명하였다. 순은 설에게 상(商)을 봉지로 내리고 자씨(子氏)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설은 요, 순, 우 시기에 등용되어 백관을 위해서 일했으므로, 그의 공적은 백관들 사이에 칭송되었고, 백관들은 안정을 얻게 되었다. 배달국으로부터[설]까지의 계보 배달국의 고시씨高矢氏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이며 배달국 고시씨의 후손) ---> 공손씨公孫氏(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공손씨의 후손) ---> 전욱고양(五帝중 한사람. 황제헌원의 손자) ---> 제곡고신(오제五帝중의한사람.황제헌원의증손자) ---> 설(제곡고신의아들) [설]에서 탕왕까지의 계보 설 ---> 소명(昭明) ---> 상토(相土) ---> 창약(昌若) ---> 조어(曹어) ---> 명(冥) ---> 진(振) ---> 미(微) ---> 보정(報丁) ---> 보을(報乙) ---> 보병(報丙) ---> 주임(主壬) ---> 주계(主癸) ---> 성탕(成湯) 은왕조 계보 세부 설명 1대 성탕(成湯) 하나라의 걸왕이 포악한 정치를 하며 주색에 빠져 지내자, 제후국인 곤오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탕이 군대를 일으키고 제후들을 인솔하니 이윤(탕의 신하)도 함께 따라나갔고, 탕은 직접 도끼를 들고 곤오를 정벌하고 나서 걸왕까지 정벌하고자 하였다. 탕은 탕서(湯誓)를 지었는데, 그 때 탕이 "나는 무용(武勇)이 뛰어나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를 무왕(武王)이라고 칭했다.걸왕이 유융의 허(虛)에서 패하여 명조로 달아나자 하군이 지리멸렬해졌다. 탕이 삼종(당시 걸왕에게 충성하던 제후국)을 정벌하여 많은 보물들을 획득하자 탕의 신하인 의백과 중백이 보전(寶典)편을 지었다. 탕이 하를 정벌한 다음, 하의 신사(神社)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하사(夏社)편을 지었다. 이윤이 바른 정치를 공포하자 제후들이 모두 복종하였고, 드디어 탕이 천자의 지위에 올라 전국을 평정하였다.탕이 역법을 개정하고, 복색을 바꾸어 백색을 숭상하였으며 조회를 낮에 하기로 결정하였다. 탕왕이 걸왕을 몰아내고 [은왕조]를 연 것은 고조선 13대 단군 [흘달] 때 였다. ▒ 2대 외병제(外丙帝) 탕이 붕어했을 때 태자(太子)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서, 태정의 동생인 외병이 즉위하니, 이 이가 바로 외병제이다. ▒ 3대 중임제(中壬帝) 외병제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외병제의 동생 중임이 즉위하여 중임제가 되었다. ▒ 4대 태갑제(太甲帝), 태종(太宗) 중임제가 즉위한 지 4년 만에 붕어하자 이윤(탕의 신하)은 태정의 아들 태갑을 즉위 시켰다. 태갑은 성탕의 직계 장손으로 태갑제가 되었다. 태갑제가 즉위한 지 3년이 되니 포악해져 탕의 법령을 지키지 않고 도덕을 문란하게 하자,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내쫒고 3년 동안 섭정하면서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태갑제가 3년 동안 동궁에 머물면서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훌륭한 인물이 되자, 이윤은 태갑제를 영접하여 그에게 정권을 되돌려주었다. 태갑제가 덕을 수양하니 제후들이 모두 은에 복종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평안하게 되었다. 이에 이윤이 태갑제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서 태갑훈 3편을 지었고, 태갑제를 기리어 태종(太宗)이라고 칭했다. ▒ 5대 옥정제(沃丁帝) 태종이 붕어하자 아들 옥정이 즉위하였다. ▒ 6대 태경제(太庚帝) 옥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태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경제이다. ▒ 7대 소갑제(小甲帝) 태경제가 붕어하자 아들 소갑이 즉위하였다. ▒ 8대 옹기제(雍己帝) 소갑제가 붕어하자 동생 옹기가 즉우하니, 그가 바로 옹기제이다. 은 왕조의 국세가 쇠해지자 제후들 가운데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 이가 생겼다. ▒ 9대 태무제(太戊帝), 중종(中宗) 옹기제가 붕어하고 동생 태무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무제이다. 태무제는 즉위하여 이척을 재상으로 삼았다. 박에서 뽕나무와 닥나무가 함께 자라기 시작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한아름이 넘게커지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서, 태무제가 두려워서 이척에게 그 영문을 물어보았다. 이척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자니 요사스러움도 덕행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옵니다. 임금께서 행하신 정치에 잘못은 없었는지요? 임금께서는 덕행의 수양에 힘쓰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태무제가 이척의 말대로 하자 불길한 징조인 뽕나무가 말라서 죽었다. 이척은 무함에게 모든 공을 돌려서 그럴 칭찬하였다. 무함은 왕가의 사무를 잘 처리하였으며 함애와 태무를 지었다. 태무제가 태묘(太廟)에서 이척을 칭송하면서 그를 신하 이상으로 대우하려고 하자 이척이 사양하고 원명을 지었다. 태무제의 대에 와서 은나라가 다시 흥하게 되어 제후들이 은나라에 복종하게 되었기에 태무제를 중종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 10대 중정제(中丁帝) 중종이 붕어하자 아들 중정이 즉위하였다. 중정제는 오로 천도하였다. 중정제 이후로 적자계승제가 폐지되고 형제와 형제의 아들로 제위를 계승하니, 제위계승 문제로 서로 다투게 되어 이후 구세(九世)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에 제후들이 조회하러 오지 않게 되었다. ▒ 11대 외임제(外壬帝) 중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외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외임제이다. ▒ 12대 하단갑제(河亶甲帝) 외임제가 죽자 동생 하단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하단갑제이다. 그는 상(相)으로 천도하였다. 하단갑제 시기에 은의 정치는 다시 쇠락해졌다. ▒ 13대 조을제(祖乙帝) 하단갑제가 붕어하자 아들 조을이 즉위했는데, 조을제가 즉위하자 은 왕조는 다시 부흥하였다. 형(刑)으로 천도하였다. ▒ 14대 조신제(祖辛帝) 조을제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조신이 즉위하였다. ▒ 15대 옥갑제(沃甲帝) 조신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옥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옥갑제이다. ▒ 16대 조정제(祖丁帝) 옥갑제가 붕어하자 옥갑의 형 조신의 아들이 조정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정제이다. ▒ 17대 남경제(南庚帝) 조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옥갑제의 아들인 사촌동생 남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남경제이다. ▒ 18대 양갑제(陽甲帝) 남경제가 붕어하자 조정제의 아들인 양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양갑제이다. 양갑제 때에 이르러 은나라가 다시 쇠퇴하였다. ▒ 19대 반경제(盤庚帝) 양갑제가 붕어하자 동생인 반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반경제이다. 반경제 시기에 은 왕조는 이미 하북에 도읍했는데, 반경제는 다시 하남으로 천도하여 성탕의 옛 도읍에 거주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은 왕조는 이미 다섯 처례나 천도하면서 정해진 거처가 없었기에 은의 백성들은 모두 걱정하고 원망하며 또다시이동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경제가 제후와 대신들을 타일렀다. "예전 고후이셨던 성탕과 그대들의 선조들께서 함께 힘을 모아 천하를 평정하셨는데, 그분들이 제정한 법도는 따를 수 있는 것이었소. 그런데 지금 선왕의 법도를 저버리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정을 이룰 수 있겠소?" 이에 하남으로 옮기어 박을 정돈하고 탕의 법령을 시행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고, 은 왕조의 국운이 다시 흥하게 되었다. 제후들이 모두 입조하게 된 것은 반경제가 성탕의 덕정을 따랏기 때문이었다. ▒ 20대 소신제(小辛帝) 반경제가 붕어하자 동생 소신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신제이다. 그러나 소신제가 즉위한 후 은나라가 다시 쇠락해지자 백성들은 반경을 사모하며 반경 3편을 지었다. ▒ 21대 소을제(小乙帝) 소신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소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을제이다. ▒ 22대 무정제(武丁帝), 고종(高宗) 소을제가 붕어하자 아들 무정이 즉위했는데, 무정제는 부열을 등용하고, 정사를 바로잡으며 은덕을 베푸니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 하고, 은나라 국운이 다시 흥하게 되었다. ▒ 23대 조기제(祖己帝) 무정제가 붕어하자 아들 조기가 즉위하였다. 조기는 무정제가 꿩이 정(鼎)의 손잡이에 날아들어 울었던 일을 계기로 삼아 덕정을 베푼 일을 기리기 위하여 그를 고종이라고 칭하고 고종융일과 고종지훈을 지었다. ▒ 24대 조경제(祖庚帝) 조기제가 붕어하자 동생 조경이 즉위하였다. ▒ 25대 갑제(甲帝) 조경제가 붕어하여 동생 조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갑제이다. 갑제는 음란한 행동을 일삼았으므로 은왕조가 다시 쇠하게 되었다. ▒ 26대 늠신제(凜辛帝) 갑제가 세상을 떠나니 아들 늠신이 즉위하였다. ▒ 27대 경정제(庚丁帝) 늠신제가 붕어하자 동생 경정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경정제이다. ▒ 28대 무을제(武乙帝) 경정제가 죽자 아들 무을이 즉위했는데, 이때 은은 다시 박을 떠나서 하북으로 천도하였다. 무을제는 무도하여 우상을 만들고 이를 천신(天神)이라고 불렀다. 그는 우상과 도박을 하면서 옆 사람에게 심판을 보게 하고는 천신이 지면 천신을 모욕하였다. 또한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피를 가득 채우고 높이 매달아 활로 쏘고서 이를 사천(射天)이라고 명명하였다. 무을제는 황하와 위수 사이를 수렵을 갔다가 갑자기 천둥이 치자 그 소리에 놀라서 죽고 말았다. ▒ 29대 태정제(太丁帝) 무을제가 죽자 아들 태정이 즉위하였다. ▒ 30대 을제(乙帝) 태정제가 붕어하자 아들 을이 즉위하였다. 을제가 즉위하자 은 왕조는 더욱 쇠퇴해졌다. ▒ 31대 신제(辛帝), 주제(紂帝) 을제의 큰아들은 계(啓)였으나, 계의 모친이 정후(正后)가 아니었기 때문에 태자가 되지 못했다. 작은 아들은 이름이 신이었 는데, 그의 모친이 을제의 정후였기 때문에 그가 태자가 되었다. 을제가 붕어하자 아들 신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신제이고, 세상에서는 그를 '주紂'라고 부른다. 주제는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말재간이 뛰었났을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신속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지혜는 신하의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으며, 말재주는 자신의 허물을 교묘하게 감출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과시하여 천하에 그의 명성을 드높이려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 못하다가 여겼다.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했으며, 여자를 좋아하였다. 특히 달기를 총해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는 사연에게 음탕한 악곡을 작곡하게 하고, 북리(기녀원)에서 추는 것 같은 저속한 춤과 음탕하고 퇴폐적인 가락을 새로 만들도록 하였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녹대(조가성에 쌓은 높은 단)를 돈으로 채우고 거교(지명)를 곡식으로 채우게 하였다. 게다가 여기 저기서 개와 말, 기이한 애완무을 수집하여 궁실을 가득 메웠다. 사구(지명)의 원대를 크게 확장하여 여러가지 야수와 새들을 잡아다가 이곳에 풀어놓았다. 주紂는 귀신도 우습게 알았다. 또한 사구에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들이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처럼 고기를 매달아 놓고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이새도록 술을 마시며 놓았다. 주가 포악해지자 제후들이 그를 떠났고, 주(周)의 무왕(武王)에 의해 정벌당하고, 스스로 불 속으로 뒤어들어 자살하였다. 무왕은 달기를 처형하고, 주紂에 의해 갇힌 기자箕子를 풀어줬으며 주의 아들 녹보무경에게 봉토를 나누어주어 주어 은나라의 제사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에 주나라의 무왕이 천자가 되었고, 후세 사람들은 군주를 제(帝)라고 부르지 않고 왕(王)으로 낮추어 불렀다.
은왕조가 동이족이었다는 고증및 사례 중국의 문헌에서 찾은 동이족에 대한 고증 ▒ 중국민족의 조상은 바로 동이족이다. <중국 고사변> ▒ 삼황오제의 8대 임금들은 숙신(조선의 옛이름)에서 나왔다. <산해경> ▒ 순임금은 동이족이다. <맹자(孟子) 8편> 또 순임금의 선조인 황제도 동이족이 되는 것이다. ▒ 태호복희의 성은 風이며, 고대 동이족이다. <'98년판 중국상해출판사, 역대제왕록> ▒ 은나라는 이(동이족)의 나라이고, 주나라는 화(華 : 중국 漢족)의 나라이다. <사마천의 사기> ▒ 은나라는 동이족이다. <고사변, 현재 홍콩대학의 임혜상교수, 대만대학의 서량지교수> ▒ 중국 고대사는 모두 동이족의 역사다. <중국 북경대 고고학과 엄문명 주임고수 증언> 이일봉님의 [실증 한단고기]를 통한 인용 고대사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치우천왕蚩尤天王과 황제헌원黃帝軒轅간의 [탁록의 싸움]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혹자는 치우천왕이 승리했다고 하고 혹자는 황제헌원이 승리했다고한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승리했느냐가 아니라 둘다 동이족이었고 치우와 헌원의 싸움도 결국 같은 동이족 간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현재 분단되어 있는 한반도의 정세를 보라. 남북이 서로 대치하여 서로가 정통임을 주장하고 있는사실을 감안한다면 배달국의 14대 치우천왕과 배달국 지류의 후손인 황제 헌원간의 오랜 싸움도 동족간의 주권 다툼이었음을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은왕조가 의심할 바 없는 동이족이었음을 이일봉님의 저서 [實證한단고기]를 통해 부분적으로 인용해 본다. ▒ 환웅이 신시에 도읍하고 배달국을 세울 무렵, 중국의 시조라 일컫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삼황이란 처음 중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세명의 제왕을 말하며, 오제란 그 뒤에 일어난 다섯 명의 제왕을 가리킨다. 그런데 뒤에 일어난 오제는 삼황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삼황의 뿌리만 밝히면 중국의 시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알 수 있다.
▒ 삼황은 태호복희太호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는 소호금천少호金天. 전욱고양(전頊高陽). 제곡고신帝곡高辛. 제요도당帝堯陶唐(요임금). 제순유우帝舜有虞(순임금) 등을 말하는데, 그마지막 순임금 시대 이후에 차례로 일어난 왕조가 하夏, 은殷, 주周이다.
▒ 중국인들은 이들 삼황오제를 자신들의 시조라 하여 뒤에 일어난 모든 왕조의 뿌리를 이들에게서 찾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삼황오제 가운데 대부분이 동이족이며, 이 사실은 중국의 일부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고사변古史辯>은 전7권으로 된 방대한 문헌으로, 현대 중국의 사학자들이 공동으로 편찬한 책이다. 바로 이 책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동이東夷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太호, 제준帝俊, 제곡帝곡, 제순帝舜, 소호少호, 그리고 설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如太호之卽帝俊帝곡帝舜少호之卽설 近人기得明證 ▒ 삼황오제 시대가 끝나고 우禹가 세운 하夏나라도 멸망한 뒤 들어선 나라가 은殷이다. 일명 상商나라라고도 하는데 은나라는 저 유명한 갑골문甲骨文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데 <고사변>은 고대 중국의 문헌과 근래에 발굴된 유물등에 근거하여 은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특히 은나라는 그 시조가 알에서 깨어났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를 갖고 있는데, 고구려.신라.가야의 예에서 보듯이 난생설화는 동이족의 공통된 특징이다. 중국의 정사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사마천의 <史記>도 삼황오제는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黃帝로부터 순임금.우禹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동일한 성姓이며, 그들이 세운 나라의 호칭만 달랐을 뿐이다.』 自黃帝至舜禹 皆同姓而其國號 ▒ 이와같은 기록들을 종합하면 결국 고대 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들어가 큰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도 시작되었다는 말이 된다. 당시 환국과 배달국, 그리고 그 뒤의 단군조선에서 갈려져 나간 구환족九桓族, 즉 구이九夷들은 중원 대륙의 대부분을 활동무대로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학자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전부터 은나라와 주나라에 이르기까지 동이족의 활동 범위는 실로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의 산동성 전부와 하북성의 발해연안, 하남성의 서북, 안휘성의 중북부 지역, 호북성의동쪽, 그리고 요동반도(요녕성)와 조선반도 등 광대한 구역이며 산동반도(산동성)가 그 중심지역이다.』 ▒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동이족이 차지하고 살았으며 중국인들이 시조인 삼황오제가 동이족이었다는 것은 중국의 학자들 스스로 수많은 자료와 문헌, 유물 등을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며, 저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들의 뿌리를 뒤엎는 혁명적인 주장을 할 리는 만무하다.
▒ 결국 고대 중국의 역사는 곧 동이족의 여러 지류가 중원으로 흘러들어가 서로 얽히고 설키는 과정에서 성립된 왕조들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며, 지금도 넓은 대륙에 산재한 56개의 소수민족은 그 잔영임에 틀림없다. ▒ 수많은 중국의 사서들이 고조선의 실체를 무시하는 것은 물론 동이족을 한낱 오랑캐로 비하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저들의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한 발버둥에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식민사관.반도사관.사대사관.을 계승하고 있는 한국의 사학자들이다. 남의 것을 떠받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역사의 전부인양 착각하고 있는 중국의 여러사서에는 비록 왜곡된 형태로나마 엄연히 동이족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음에도, 환단桓檀의 역사는 물론 그 이후 고조선의 역사조차 철저히 무시되어 고대 동이족의 역사는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공중에 붕 떠있는 실정이다. 하다 못해 고구려의 역사만 제대로 파고 들어가 보아도 한국 사학계의역사 인식이 어느정도로 한심한 수준인가를 알 수 있다. ▒ 현조玄鳥의 알에서 태어난 [설]의 후손인 성탕, 즉 하나라의 폭군 걸왕을 몰아내고 은나라를 세운 탕왕은 성씨를 자子라고 하는데, 자子는 12간지 중에서 북방北方을 의미하고 북방은 검정색을 의미하니 이또한 현조玄鳥와 동일한 의미이다. <고사변古史辯>에서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은 '현조는 은나라 사람과 동일한 조상신이다'라고 하였고또 같은 책 상편에서는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라고 하였다.
▒ 거북의 등뼈에 새겨진 은나라 시대의 갑골문甲骨文 중에는 단군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녹도문鹿圖文과 유사한 글자가 상당수 있어서 당시 은나라가 동이족의 문화권 내에 있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특히 발견된 갑골문에는 주변의 다른 나라를 길방吉方, 토방土方, 인방人方, 귀방鬼方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가운데 인방은 조선을 가리키는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서 발행한 [역사지도집]에도 고조선의 핵심 강역이었던 산동성에 인방人方을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갑골문은 은나라가 귀방鬼方을 정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후한서>뿐만 아니라 <단군세기>에도 기록되어 있어 두 문화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은나라에서 사용한 갑골문자는 후에 漢字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에 한자 역시 동이족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갑골문을 연구한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는 사실이다.
三皇五帝는 모두 동이족이다 ! 삼황三皇이 동이족이었음을 이일봉님의 [實證한단고기]내용을 요약하여 아래에 수록한다. 삼황이후에 등장하는 오제五帝는 그 근원을 모두 삼황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 태호복희 ▣배달국 5대 태우의太虞儀환웅은 아들을 12명 두었는데 장자는 다의발多儀發환웅(6대 환웅)이며 태호복희는 막내 아들로 태어나 배달국에서 우사雨師라는 관직에 있다가 중원으로 들어 갔다. 우사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역易을 만 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환역桓易 이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를 복희팔괘伏羲八卦 혹은 선천팔괘先天八卦라 한다. 결국 고대 동양의 음양오행설은 환단의 문화에서 발생한 것이다. ▣복희의 성은 풍風씨이다. 이것은 당시 동이족의 아홉갈래인 견이, 방이, 적이, 백이, 우이, 황이, 현이, 양이, 풍이風 夷중 풍족風族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복희의 탄생에 관해서 <사기>와 <중국고대신화>는 다음과같이 말하고 있다. ▣복희의 어머니 화서씨華胥氏가 어느 날 동쪽에 있는 울창한 숲속으로 놀러 가게 되었다. 그녀는 뇌택雷澤이라는 연 못가에서 노닐다가 우연히 대인大人의 발자국을 밟게 되었는데, 그후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면서 아이를갖게 되었 으니 이가 곧 복희이다. ▣여기서 뇌택이라는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뇌雷는 팔괘중에서 진괘震卦를 말하며 진괘는 팔괘중 동방과 동 북방에 배치된 괘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은 복희가 배달국에서 출생했음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뇌택에서 대 인大人의 발자국을 밟고 난뒤 복희를 낳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大人은 환웅을 의미한다. ▣복희에게는 부인 혹은 누이동생이라고 하는 여와女와가 있었다. 여와는 황토를 반죽하여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 하는데, 이름이나 행적이 이스라엘의 민족신인 여호와와 매우 유사하다. 복희는 동방을 상징하는 나무(木)의 덕 으로 제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동방의 제왕이라고 한다. ▒ 염제신농炎帝神農 ▣염제신농의 아버지는 소전少典이라고 하며 배달국의 8대 안부련 환웅의 명으로 강수姜水라는 곳에서 군사를 감 독하는 직책에 있었다. 신농의 아버지 소전은 소호금천(5제중의 한사람)과 함께 고시씨(고시례)의 방계 지류이다. ▣고시씨는 배달국에서 대대로 우가牛加의 직책에 있으면서 농사를 관장하였다. 신농은 조상인 고시씨로부터 내려 온 농사와 관련된 집안의 내력으로 인해 농사에 능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이러한 신농이 아버지 소전을 따라 중원으로 들어가 농사를 가르치고 의약을 만들어 의농醫農의 시조로 불리게 되었다. ▣<사기> 삼황본기三皇本紀에『염제炎帝는 인신우수人神牛首의 형상으로 강수姜水근처에서 성장했으므로 강씨 라 했다.』는 기록에서 신농이 소의 머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뿌리가 배달국의 우가牛加, 즉 고시씨에 있음 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황제헌원黃帝軒轅 ▣황제黃帝는 염제신농의 아버지인 소전少典의 자손이고 성은 공손公孫이며 이름은 헌원軒轅이다.즉,소전은 배달 국에서 갈려져 나간 사람으로서 염제신농의 아버지이고, 그러한 소전에서 다시 갈라져 나간 후손중의 한 사람이 공 손이며, 그 공손씨의 후손이 바로 황제헌원이다. ▣황제헌원과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치우천왕간에는 수차례의 전쟁이 있었으며 <사기>를 비롯한 중국의 문헌에는 황 제헌원이 치우천왕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이 자신들의 뿌리와 관련하여 황제헌 원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어서이며 이는 왜곡된 주장이다. 사실은 전쟁에서 패하여 치우천왕에게 귀의한 뒤 청구 국(배달국 14대 환웅인 치우천왕에 이르러 중원을 개척하며 옮겨와 나라이름을 청구국이라 함) 고유의 천부인 3개 에서 유래한 신선도의 길을 걸었다. 이로부터 헌원에서 노자로 이어지는 도교의 근원이 배달국에서 유래되었다. ▣<사기>는 헌원의 호가 유웅씨有熊氏라 하여 그가 웅씨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먼 조상인 소전이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헌원이 자신의 군대를 '운사雲師'라고 부른 것은 그가 배달국 의 후손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그리고 그를 '황제黃帝'라 일걷는 것은 그가 오행五行에서 중앙에 해당하 는 흙(土)의 기운으로 제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제五帝중 전욱고양(BC 2513~2436)은 황제헌원의 손자이며, 제곡고신(BC 2435~2365)은 증손자이다. 제곡고 신의 여러 부인중에 간적簡狄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간적이 [설]을 낳고 설은 순.우 임금때 벼슬을 하고 상商이라 는 곳의 제후로 봉해졌다.[설]의 후손인 성탕成湯은 하나라 말기에 폭군 걸왕을 몰아내고 상商(殷)나라를 세웠다.
은왕조 그 이후 은의 멸망과 은나라 성인 3인 은나라 말 사치와 향락에 빠진 폭군 주왕紂王은 바른 말로 간하는 신하들을 무참하게 죽였다.한 때는 '포락'이라는 형벌을 만들었는데, 뜨거운 숯불구덩이 위에 기름을 칠한 둥근 구리기둥을 걸쳐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걷게 하는 형벌이었다. 이러한 형벌을 받은 신하들은 미끄러운 구리기둥을 걸어가다가 숯불 구덩이에 떨어져 고통스럽게 죽어갔으며 주왕과 달기는 이를 보면서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당시 은나라 왕실에는 주왕의 숙부인 비간比干과 기자箕子, 그리고 주왕의 이복 형제인 미자微子가 있었다(공자는 이 세 사람을 '은殷 3인仁'이라 하였다). 미자가 숙부인 비간과 기자를 찾아와 나라의 장래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의논을 하자 비간과 기자는 우선 다른 곳으로 가서 당분간 피신해 있도록 권고하였다. 그런 뒤 비간比干은 주왕 앞에 나아가 간언을 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다. 주왕은 비간의 간언을 듣고 '내 들으니 성인聖人은 심장에 구멍이 일곱 개라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겠다.'하고는 비간을 죽여서 그 심장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기자箕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며 남이 종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주왕이 이를 알고는 기자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렇듯 포악했던 주왕도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불에 타 죽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 비간比干 문헌과 표현방법에 따라 비간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자 또는 폭군 주왕紂王의 숙부라고 되어있다. 왕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마지막'이라는 표현이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주왕의 숙부라는 표현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간]은 29대 태정제(太丁帝)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태정제의 맏아들은 30대 을제(乙帝)가 되었다. 아마도 [林氏先祖寶鑑]에서 비간을 '마지막 왕자'라고 표현한 것은 을제(乙帝)를 이어 받은 마지막 주왕紂王이 하나라의 걸왕傑王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으며 나라를 망치고 무수한 충신들을 참살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왕통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는 숨은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林氏先祖寶鑑에 의하면 은나라 '마지막 왕자 비간'이 순국하자 비간의 부인인 진씨陳氏는 잉태한 몸으로 장림산長林山 석실에 피신하여 그 후에 아들을 낳으니 처음 이름을 泉이라고 지었는데 泉의 나이 3세때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가 건국되자, 주의 무왕武王이 그 혈통을 찾아 장림산의 '림'을 따서 林氏를 사성賜姓하였고 굳굳하게 성장할 것을 뜻하여 '견堅'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였다고 한다.
비간의 능陵은 현재 중국의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에 있으며 그 후손들이 춘추로 제향을 드리고 있다고 한다. 비간의 후손에 대한 상세 내용은 아래 [비간의 후손] 내용을 참조하시라. ▒ 기자箕子 기자箕子는 비간比干의 친 동생이다.기자에 관한 내용은 이일봉님의 [實證 한단고기]을 인용해보자.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한 뒤에 은나라의 폭군 주왕에 의해 투옥되어 있던 기자를 석방하고 그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내려오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적.군사적 정황으로 미루어 실로 공상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후대에 왜곡.날조된 기사가 분명하다.
<단군세기>는 당시 기자가 나라를 잃은 왕족으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남성 서화西華라는 곳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제 갓 태어난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를 막강한 조선의 왕으로 봉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결국 기자조선설은 후대에 조선이 쇠락하면서 중원의 세력이 커지자 당시 자신들의 희망사항을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독자적으로 은나라를 물리칠 능력도 없어서 여러 동이東夷들의 도움으로 거사를 성사시켰던 무왕이 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단 말인가.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은 <서경>과 <사기>이다. 주지하다시피 <서경>은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공자(BC 552~479)가 말년에 편찬했다는 문헌이고, <사기>는 한나라 때 사마천司馬遷(BC 145~86)이 저술한 중국의 대표적인 정사이다. 이 두 문헌은 아무런 근거나 출처도 밝히지 않고 기자와 관련된 내용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공자와 사마천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기보다는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서 가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자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단군조선이 건재하고 있었고,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 때에는 단군조선의 삼한 가운데 진한이 북부여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중원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번한(번조선 : 이 무렵에는 한나라에서 도망해온 위만이 차지하고 있었음)도 엄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문헌에 기록된 내용은 후대에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공자와 사마천이 직접 기록했다면 의도적인 곡필임이 분명하다.
러시아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 <고조선古朝鮮>에서 '한대漢代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이 된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나라나 주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며 기자조선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기자가 조선에 오지 않았다면 당연히 중원에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사기>를 주해한 중국의 학자들도 집해集解.정의正義.색은索隱에서 한결같이 기자의 무덤이 황하 남쪽의 하남성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양국梁國의 몽현蒙縣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 梁國蒙縣 有箕子塚 양국의 몽현은 현 하남성 상구商丘시 일대를 말하는 것을, 상구는 옛 은나라를 일명 상商이라고 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그곳에 기자의 무덤이 있으며, 그곳에서 서남쪽에는 <단군세기>에서 기자가 말년에 살았다고 한 서화西華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은 기자와 마찬가지로 은나라의 왕족이었던 미자微子가 다스리던 송宋나라 지역이다. 기자가 이곳 서화에서 두문불출 은거하면서 일생을 마쳤기 때문에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고 중국의 학자들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훗날 이곳은 기자가 살았다 하여 지명이 기성箕城으로 바뀌기도 했다. 중국의 문헌인 <수경주水經注>는 기성箕城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안에 은나라 탕왕湯王의 무덤이 있고, 그 서쪽에는 기자의 무덤이 있다.』 城內有成湯塚其西有箕子塚 양국 몽현에 기자의 무덤뿐만 아니라 은나라를 세운 탕왕의 무덤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기자가 옛 은나라 땅인 송나라에서 은거하다가 탕왕의 무덤과 가까운 곳에 묻혔다는 말이 된다.』 ▒ 미자微子 미자微子는 폭군 주왕紂王의 이복형제이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周 무왕武王은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제후로 봉해서 옛 은나라 백성들의 동요와 반란을 막고 은나라의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그런데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무경은 무왕의 다른 형제들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무경이 죽자 미자微子가 제후의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이를 송宋나라라 하였다. 송나라는 옛 은나라 땅에 있었다. 비간의 후손 기자箕子의 후손과 폭군 주왕紂王의 아들이었던 무경武庚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아래 자료는 왕족중 장자였던 비간比干의 후손에 관한 내용을 기술한 것인데, 이 기록은 특정 성씨를 선전하거나 광고하기 위함이 아니라 은왕조 멸망시의 왕족의 신분으로 주왕紂王의 폭정을 바로 잡기 위하여 간언하다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의 후대를 추적해봄으로서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민족사의 새로운 발굴에 일익이 되기 위함이며, 한편으로는 비간이 [황제헌원黃帝軒轅의 33대손]으로 아래 족보에 기록되어 있어 황제헌원과 비간, 황제헌원과 동이족의 연계성을 수립하기 위해 부득이 林氏先祖寶鑑중의 일부를 수록하였으니 양지하시고 이 자료를 보시는분들은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족보라는 것은 만드신 분들이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을 통해, 심지어는 해외출장 조사까지 마다하지 않는 집념과 노력의 결실임을 생각할 때 충분히 역사연구의 한 근거가 될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며 다만, 본 林氏先祖寶鑑상에는 헌원황제가 동이족이었음을 주장하거나 그러하리라고 예상한 언급이 전혀 없어 섭섭하던터에,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역사 연구가이신 이일봉님의 저서 [實證 한단고기]를 발견하고 읽어본즉 은나라에 대한 언급이 상상외로 많이 수록되어 있어 그 내용을 위에 서술한 [은왕조가 동이족이었다는 고증 및 사례]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 다음은 수풀림林 한국종친대종회에서 발간한 임씨선조보감林氏先祖寶鑑에 수록되어 있는 '林氏의 源流를 찾아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땅의 임씨林氏는 득성得姓 이후 3천 백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고대 중국땅에서 2천년을, 그리고 한국에서 천 백여년 동안 조상님들의 맥이 이어져 왔다고 하겠다. 중국 고대사에서 큰 비중을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시다면 은殷나라 마지막 왕자王子이신 비간(比干 : 3090년전)공을 꼽을 것이다. 이분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의 33세 후손이시며 그당시 은나라 3인(비간比干, 기자箕子, 미자微子)중 한분이시다. 중국 정부에서 옛날부터 이분을 추앙하기 위하여 비간능比干陵을 위시하여 삼인사三仁祠등 여러 곳에 영정影幀을 모셔놓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득성임씨得姓林氏는 비간공의 아드님이신 임견林堅공이신데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임견공이 장림산長林山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장림산 중 림林자를 따서 임씨林氏라 사성賜姓하였고, 견고하게 자랄 것을 뜻하여 견堅자로 이름을 지어 임견林堅으로 호칭하니 바로 이분이 득성시조得姓始祖이다. 그리고 이분의 아버님이신 비간공을 태시조太始祖라 칭한다. 득성시조 임견공으로부터 우리나라 임씨를 살펴보자. 득성조로부터 중국땅에서 2천년을 이어왔고, 그간에 많은 선조님들이 중국역사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그중 몇 분을 소개하면 성인聖人 공자孔子의 큰손 역할을 하신 득성조 23세인 임방林放공이 계시고 득성조 64세인 진안군왕晋安君王 임록林祿공이 계시다. 이어 득성조 80세인 임온林蘊공이 계신데 이분의 9형제가 모두 자사刺史를 지내어 9목사九牧詞라 칭하였고, 이분의 고손高孫인 임팔급 林八及공께서 당나라 말 한림학사병부시랑翰林學士兵部侍郞의 벼슬을 하던중 변방이 극심한 혼란기를 맞아 동료 7학사學士와 함께 고향 중국의 팽성으로부터 배를 타고 당시 통일신라의 아산만 상류로 동도東渡하여 현재의 평택시 팽성읍에 정착하시니 이분이 우리나라 林氏의 시조가 되었다(···) -중략- 』 ▒ 아래는 임씨한국종친회 각 본관 대표들이 선조 제향참례를 위해 중국에 직접 방문하여 중국, 대만 등 세계의 종친회원들을 만났을 때의 기행문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 지난 1995년에 중국의 제향참례 및 조상순례를 인도하여 춘추春秋로 2회 다녀올 수 있었다. 춘계제향春季祭享은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의 태시조 비간릉比干陵에서 행사 하였는데 대규모의 태시조 릉과 많은 사당, 제청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비간공을 비롯하여 이분의 비碑 와 적자 득성원조 임견공과 손자 두분의 상像을 배향하여 모셔 놓았고 오래된 수많은 비석과 넓은 광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에 참여한 각 국의 종친 대표들이 각 나라 이름이 적힌 푯말을 들고 질서있게 입장하여 제향참배를 하게 되니 3천 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조상이 얼이 새로웠다. 특히 중국 정부기관에서 우리 일행을 특별히 보살피기를 호텔에서부터 호위가 삼엄하였고 차편으로 갈 때는 앞뒤로 경찰이 에스코트를, 연도沿道에는 교통결찰이 거수경례를, 행사장에는 당비서.시장.서장 등 관리들이 환영하였으며 악대까지 동원하여 환영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또한 위휘시 목야牧野에 장림산長林山이 있는데 이곳은 임견공 출생지로서 석굴에는 출생한 견堅공을 안고 있는 어머니 진씨陳氏의 상이 있고, 큰 글씨로[林堅出生地]란 안내석이 있었으며, 큰 비碑에는 황제黃帝(황제헌원)로부터 내려온 내력과 득성得姓하게된 내용이 담겨져 있어 옛일을 한 눈에 회상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다음으로 하남성 안양에 있는 은허지殷墟趾를 찾았는데 은나라 왕궁으로서 비간공 이전에 계셨던 조상님들의 왕궁인 것이며 고색이 짙은 상형문자와 갑골문자로 치장해 놓았는데 보존이 잘되어 있었고 조상님들이 나라를 통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태시조 비간공으로부터 현존하고 있는 상고대 조상님들과 팔급八及공이 사시던 집까지 찾았으니 팔급공의 계대 연결은 적중한 것이다. 우리 임씨는 황제헌원으로부터 32대 은나라 마지막 왕자인 비간比干공을 태시조太始祖로, 이분의 아들인 임견공(BC 1121)을 원시조로, 동도東渡하신 임팔급공을 시조로 하여 뿌리가 확실하게 어어진 것이다.(…) 팔급공과 그 일행이 신라국 아산만에 정착하면서 토성을 쌓고 뗏집을 지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팽성彭城이란 팔급공의 고향 지명을 불러 팽성이 생겼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겠으며, 또한 중국 당나라 성주의 고관 후손이요, 한림학사 병부시랑이란 막중한 벼슬이었던 팔급공이 토성에 사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최근 1988년 수원대학에 의해 팽성에 있는 농성濃城에 대한 학술발표회가 있었던 바 팽성임씨彭城林氏(본관 평택임씨를 말함) 시조 팔급공이 축성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발표를 하였고, 현재 평택시에서 이 농성의 복원사업을 마쳤다. 또한 이 곳 지명을 팔급공의 고향故鄕 지명인 팽성彭城으로 지어 불러온 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현재 평택시 팽성읍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팔급공은 이곳에서도 외침을 막는데 분투하였고, 이에 신라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셨으니(…) 우리 한국에 있는 임씨는 기원전 1121년에 득성하여 중국에서 2000년을, 그리고 대개가 1100여년 전에 동도하신 임팔급공의 후손들이다. 관향을 달리하고 있으나 우리 林氏는 한 할아버지(비간)의 자손임이 분명하다...』 ▒ 林氏先祖寶鑑에 의하면 1999년 현재 세계에 퍼진 임씨종친의 인구수가 약 7천만명인데 중국대륙에 6천만명정도가 살고 있으며 중국외의 전 세계 곳곳에 1천만명이 살고 있고 그 1천만명 중에서 우리나라에 약 1백만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林氏先祖寶鑑의 내용대로라면 전 세계의 수풀林을 쓰는 사람들은 시조가 한분이며 그분은 고대 은나라 말 三仁중 한 사람인 비간比干임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 다음은 저 유명한 기자箕子의 조선朝鮮 망명설과 관련, 비교 연구의 여지가 있을듯하여 임윤화林允華 대법사의 축간사祝刊辭를 인용해 본다. 『…우리 林氏 조상의 원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林氏 太始祖 비간공은 순국하시고, 그 동생 기자箕子는 해동 단군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건국, 태조대왕이 되시고, 미자微子왕자는 국외로 추방되었던 것입니다. 비간공의 부인 진씨陳氏는 잉태한 몸으로 장림산 석실에 피난하여 아들을 낳으니 子 천泉 이었던 것입니다. 3세시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의 무왕武王이 長林山의 林을따서 임씨로 사성賜姓하고 원래의 이름인 천泉을 견堅으로 하여 임견공이 수풀림의 득성시조가 되셨습니다…』 기자의 조선 망명설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도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으며, 기자는 조선으로 오지 않았다는 [實證 한단고기]를 쓴 이일봉님과 [古記로 본 古代韓國史]의 한순근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순(舜)임금이 동이족(조선족)이라는 근거 1. 중국기록 -《맹자(孟子)》이루장구 하(離婁章句下) 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明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 -> 순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였으며, 명조에서 죽었다. 제풍, 부하, 명조는 동이의 땅이다. 순은 동이 사람이다. 2. 순임금의 정체 맹자라는 책에서 순임금이 동이 사람이라는 것을 밝혀 놓았다. 순임금은 요임금으로부터 선양받아 중국의 임금이 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동이족은 중국측에서 보면 단군조선 사람이다. 요임금과 단군왕검은 병립하였는데, 이때 동이족이라 함은 바로 단군조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 초기에는 중심지인 송화강 아사달을 비롯하여 산동반도를 포함한 중국대륙 동쪽과 황하유역의 북쪽을 관할하였다. 그러면 순임금은 과연 누구인가? 가. 순(舜)은 조선(朝鮮)의 사자(使者) 순임금은 바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중신(重臣)인 유호씨(有戶氏)의 큰 아들로 요(堯)임금을 치러간 조선(朝鮮)의 사자(使者)였다. 우리 기록에 의하면 유호씨는 고수(高未)라고도 한다. 유호씨는 중국기록에서는 고수(嗧杚)라고 적혀있다. 고수(嗧杚)는 우매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장님이라는 말이다. 또 유호씨(有扈氏)라고도 적기도 한다. 중국기록에 의하면 유호씨(有扈氏)가 무도해서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아들 계(啓)가 즉위한 후 감(甘)에서 싸워 멸망시켰다라고 한다. 유호씨(有戶氏), 고수(高未), 고수(嗧杚), 유호씨(有扈氏)는 모두 동일인이다. 나. 순이 요임금의 사위가 되어 선양받아 임금이 되다. 서기전 2357년 요(堯)가 제지(帝摯)를 멸하고 천자(天子)가 되었다. 이해 단군왕검(檀君王儉)은 14세의 나이로 웅씨국(熊氏國)의 비왕(裨王)이 되어 섭정을 하였다. 요임금이 서기전 2334년경까지 3차례의 난을 일으키고 급기야 단군왕검이 왕성을 나가 순치(巡治)를 하는 틈에 왕성을 점령하고 이때 웅씨국왕이 붕어하므로 단군왕검은 오가와 무리 800을 이끌고 배달나라 중심지를 떠나 송화강 아사달로 이동하여 서기전 2333년 10월 3일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나라를 정비한 후 곧 단군왕검은 유호씨와 유호씨의 아들 순(舜)으로 하여금 환부(鰥夫)와 권사(權士) 100여명을 보내어 요임금을 깨우치도록 하였다. 이에 요임금이 명령에 복종하고 유호씨 등을 공손히 대접하였다. 이때 요임금이 순의 사람됨을 보고 딴 뜻이 있어서 두딸을 주어 유혹하니 순이 곧 미혹해졌다. 순은 곧 요임금에 붙어 협조하였다. 순은 이때부터 순은 아버지 유호씨의 뜻을 그르치기 시작하고 요임금의 촉탁을 받아 현자(賢者)를 찾아 죽이기도 하였다. 서기전 2284년 요임금은 순에게 양위하였다. 순의 나라를 우(虞)라 한다. 다. 순임금이 홍수로 단군조선에 도움을 청하다 요임금과 순임금 시대에 9년 대홍수가 발생했다. 단군조선에도 대홍수가 발생했으나 풍백(風伯) 팽우가 치수를 잘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우수주(牛首州)에 기념비를 세웠다. 한편 요임금은 곤(噓)에게 치수를 시켰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순(舜)이 곤에게 책임을 물어서 죽이고 곤의 아들인 우(禹)에게 다시 치수를 맡겼다. 사공(司空) 우(禹)가 치수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성공치 못하자 순임금은 단군조선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서기전 2267년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어 도산회의(塗山會議)를 주재케 했다. 순임금은 우를 보내어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이에 태자부루가 우에게 치수의 요결인 신서(神書)를 전수하였다. 그리고 이때 경계를 따져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조선에 영속시켰다. 우가 치수법을 전수받은 후 치수에 성공하였다. 우(禹)가 단군조선으로부터 치수법을 전수 받은 것을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는 천내석우(天乃錫禹)라고 하여 하늘이 우(禹)에게 주셨다라고 적고 있다. 이때 하늘은 바로 단군조선의 단군왕검을 가리키는 것이다. 단군이 바로 천제이기 때문이다. 즉 순임금은 단군조선의 제후격이었다는 것이 된다. 라. 형제간의 전쟁 순임금이 점점 단군조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자 이에 유호씨는 작은 아들 유상(有象)으로 하여금 순을 토벌케 하였다. 이것이 형제간의 전쟁이다. 유상이 권사를 이끌고 순을 치고 요임금의 무리인 우(禹)가 또한 순을 치니 순은 창오(蒼梧)의 들에 도망하다 죽었다. 이에 순의 두 처도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이에 앞서 순은 우의 아버지 곤(噓)이 홍수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책임을 물어 죽인 일이 있으므로우가 순에게 복수를 한 것이 된다. 우(禹)가 유상(有象)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서서 관찰하니 우가 도읍을 옮기고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단군조선으로부터 중국이 독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3. 순임금은 단군조선의 제후 [중국의 기록-《서경》우서(虞書) 순전(舜傳)의 사근동후(肆覲東后)의 뜻] 世二月 東巡守 至于岱宗 肆覲東后 ... -> 그해 이월에 동쪽을 순수하고 대종(태산)에 이르러 동쪽의 임금을 찾아 뵙고... 가. 근(覲)의 뜻
근(覲)은 찾아뵙다의 뜻이므로 순임금이 동쪽 제후를 찾아뵈었다라는 말은 어색하다. 그래서 동후(東后)가 누구를 가리키느냐가 문제된다. 나. 동후(東后)란? 후(后)는 임금, 왕비 등을 가리킨다. 반면 후(侯)는 제후(諸侯) 중의 두 번째 봉작에 해당된다. 그래서 후(后)와 후(侯)는 다르다. 그러므로 동후(東后)는 동쪽의 제후가 아니다. 하(夏)나라 임금인 우(禹)를 하후(夏后) 우(禹)라고 한다. 후(后)는 즉 왕(王)의 뜻이다. 물론 제후도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의 계급을 순서대로 보면 역사기록을 볼 때 천제(天帝), 천왕(天王), 천군(天君) 또는 단군(檀君)인 단제(檀帝), 한(韓), 왕(王), 군(君), 제후(諸侯 : 公, 侯, 子, 男, 伯), 한(汗) 또는 욕살(褥薩), 읍차(邑借) 등으로 적을 수 있다. 즉 대체적으로 제(帝), 왕(王), 군(君), 후(侯)의 순서로 나타낼 수 있다. 후(后)는 왕격(王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왕(夏王) 우(禹)가 즉 하후(夏后) 우(禹)가 된다. 이렇게 보면, 동후(東后)는 동쪽의 제후가 아니라 동쪽의 임금으로서 순임금과 같은 격의 임금이나 그 이상이 된다. 그런데 근(覲)이라는 글자가 찾아뵙다라는 뜻이므로 동후(東后)는 순임금보다 높은 격의 임금이 될 것이다. 다. 동후(東后)는 진한(震韓) 즉 단군조선의 태자 부루 순(舜)의 사공 우(禹)가 단군조선의 태자 부루로부터 치수법을 전수받았고 이에 순(舜)을 낭야성에 두어 감독케 했는데, 단군조선의 진한(辰韓)은 낭야를 5년에 한번씩 순수하였는데 순(舜)의 제후(諸侯)는 진한에 조근(朝覲)하기를 네 번이었다라고 한다. 여기서 진한(辰韓)은 천제자를 가리키는데, 천제자는 곧 단군왕검의 아들을 말한다. 바로 태자 부루이다. 태자부루가 도산회의 때 치수의 비결을 우(虞)나라 사공(司空)인 우(禹)에게 전수하였던 장본인이다. 즉 태자 부루가 5년에 한번씩 낭야성을 순시하는데 이때 순임금과 제후는 진한인 태자부루를 찾아뵈었고 회수가 4번이었다라는 말이 된다. 즉 20년에 걸쳐 태자부루가 순시한 것이 된다. 도산회의가 서기전 2267년에 있었으므로 이때부터 20년이면 서기전 2247년경까지가 된다. 서기전 2240년에 태자부루가 제2대 단군이 되었다. 태자부루가 단군이 된 후에는 진한(辰韓)의 치적이 기록된 것이 없는 바, 아마도 진한을 따로 두지 않고 단군이 겸한 것으로 보인다. 번한(番韓)과 마한(馬韓)은 각 세습하여 대를 이었다. 라. 사근동후(肆覲東后) 결론적으로 사근동후는 순임금이, 천제(天帝) 즉 단군(檀君)의 아들이자 진한(辰韓)인 태자 부루를 찾아뵈었다라는 말이다. 이때 순임금은 단군조선과 날짜와 도량형을 맞추었다. 4. 여론 역사기록을 볼 때, 순임금은 동이족 출신으로서 원래는 서기전 2300년경에 요임금을 토벌하러간 단군조선의 사자(使者)였으나 요임금에게 협조하므로 순의 아버지와 순의 동생인 유상이 순과 전쟁을 하였고 이에 순임금이 효도를 다하므로 다시 평화를 찾았으며, 서기전 2267년에 순임금이 단군조선에 홍수 때문에 도움을 청하자 태자부루를 도산으로 파견하여 치수의 비결을 전수하여 주었고, 순임금 말기에 순임금이 도를 잃게 되자 유상이 다시 순을 치고 이에 요임금의 무리였던 우(禹)가 아버지 곤(噓)의 복수를 위해 순을 쳐 죽게 하고 자칭 하왕(夏王)이 되어 점차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끝.
루시엘이 밝히는 동이족(東夷族)의 조상 욕단 하나님은 찾아 세운 중심인물들을 믿을 수가 없어 두 민족으로 갈라 세워 섭리를 준비하셨다. 에벨의 첫째 아들 벨렉을 통해 노아로부터 10대 만에 데라를 통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제1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준비하셨고 에벨의 둘째아들인 욕단과 그의 13명의 아들을 메사에서 스발로 가는 동편으로 보내어 또 다른 섭리를 준비해 오셨다. 욕단의 후예는 유목민이며 그들은 양과 소 가축을 따라 동방으로 동방으로 옮겨가 새로운 동방민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몽고족인 동이족이 그 혈족인 것이다. 동이족은 알래스카를 거쳐 아메리카 인디안이 되었고, 남미로 내려가 잉카 전 문명을 화려하게 꽃피웠다. 또한 한 혈족은 아무르강 유역에 출발하여 백두산을 거쳐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어 한민족의 원거인이 되었고 그 후 가야국 김수로왕의 후손인 가야왕자의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토착민이 되었다. 또한 징기스칸에 의해 세계 곳곳에 동이족의 후손을 남겼으나 순수혈통을 보존하고 있는 민족은 한민족과 일본민족 외에는 없고 소수 종족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국민족과 일본민족은 하나님의 마지막 섭리를 준비한 두 나라가 된다. 한국은 아담국가, 일본은 해와국가로 두 나라가 하나되어 부부나라가 되면 인류 모든 국가가 자녀국가가 된다. 2002년 월드컵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동이족의 대표적인 인물은 공자를 들 수 있다. 그가 주창한 성리학과 생활원리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인류의 마지막 사상으로 드러날 것이다. 동이족은 유목을 하는 기마(騎馬)민족으로 수천 년을 지내왔기에 엉덩이에 푸른 반점이 유전처럼 남아있다. 동이족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는 제 2권-한민족 단기역사 4333년에서 다룰 예정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성서상의 연대 추적을 통해 욕단과 단군왕검이 동일인임을 나 루시엘이 분명히 밝혀둔다. 아담---- 0-930년 (130세, 930세) B.C4,112-3,182년 셋------- 130년-1,042년(105세, 912세) B.C3,982-3,070년 에노스---- 235년-1,140년 (90세, 905세) B.C3,877-2,972년 게난------ 325년-1,235년 (70세, 910세) B.C3,787-2,877년 마할랄렐----395년-1,290년 (65세, 895세) B.C3,717-2,822년 야렛-------460년-1,442년 (162세, 962세) B.C3,652-2,690년 에녹-------622년-987년 (65세, 365세) B.C3,490-3,125년 므두셀라----687년-1,656년(187세, 969세) B.C3,425-2,456년 라멕-------874년-1,651년 (182세, 777세) B.C3,238-2,461년 노아-------1,056년-2,006년(500세, 950세) B.C3,056-2,106년 셈---------1,556년-2,156년(100세, 600세) B.C2,556-1,956년 아르박삿----1,656년-2,094년 (35세, 438세) B.C2,456-2,018년 셀라-------1,691년-2,124년 (30세, 433세) B.C2,421-1,988년 에벨--------1,721년-2,185년 (34세,464세) B.C2,391-1,927년 벨렉--------1,755년-1,994년 (30세, 239세) B.C2,357-2,118년 루우--------1,785년-2,024년 (32세, 239세) B.C2,327-2.088년 스룩--------1,817년-2,047년 (30세, 230세) B.C2,295-2,065년 나홀--------1,847년-1,995년 (29세, 148세) B.C2,265-2,117년 데라--------1,876년-2,081년 (70세, 205세) B.C2,236-2,031년 아브라함-----1,946년-2,121년 (100세,175세) B.C2,166-1,991년 이삭---------2,046년-2,226년 (60세, 180세) B.C2,066-1,886년 야곱---------2,106년-2,253년 (91세, 147세) B.C2,006-1,859년 요셉---------2,197년-2,307년 (30-33세,110세) B.C1,915-1,805년 욕단은 13명의 아들을 데리고 동방으로 갔다. 그들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소와 양이 가는 대로 따라 가다보니 몽고 지역 바이칼 호수 근처에 도달하였고 넓은 초원 비옥한 땅을 만나게 되었다. 아라랏산을 떠나지 꼭 20년만에 그들은 그곳에 도착하였다. 아무르강 남쪽을 따라 이동하다보니 4계절이 뚜렷하고 세상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는 너무나 아름답고 비옥 땅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 안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번창하여 동이족의 조상이 되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서 900세 이상을 살았던 기록을 그대로 나이로 계산하였다. 많은 성서학자들이 그들의 나이기록은 한 개인의 나이가 아니고 종족의 나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럴지라도 이렇게 계산하는 것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로 적혀진 하나님의 비밀이 있다면 그 기록된 숫자을 소홀히 처리해서는 절대 안 된다. 상고사와 한단고기의 기록에서도 한인, 한웅시대에도 성경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500세 이상을 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노아 이전기록과 상고사의 동이족(백두산족) 단군 이전의 기록이 모두 설화로 취급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내용이 숨어 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쓰여진 성경과 백두산설화는 계시로 풀어야 한다. 나 루시엘이 분명히 말하건 데 인류의 시원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으며 유대민족과 한민족은 하나님의 내신 선민이다. 상고사와 한단고기의 기록은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구나 그래 나는 손뼉을 쳤다. 단군이 바로 욕단이구나. 그럼 우리 민족은 하나님이 택한 또다른 선민임이 틀림이 없었다. 나는 한단고기에서 우리민족사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20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노아와 혈통을 이어받은 민족임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더 자세히 동이족을 알려고 하였으나 그 분은 벌써 벨렉을 통한 제1 이스라엘민족인 유태인에게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벨렉의 후손들이 눈에 보였고 갈데아우르에 살고 있는 데라가 보였다. 그곳에는 이방신상을 모시는 아주 큰 지구라트란 탑모양의 신전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우상을 위해 제물을 바치고 있었다. 다시 영화와 같은 동화상은 가동되었다. 나는 컴퓨터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앉았다. 그리고 그것에 좀더 관심을 집중하였다.
황하문명의 주역은 고조선이다. 황하 문명은 중국 민족이 이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최근들어 황하지방은 우리 한민족의 주요 활동 무대였음을 제기하는 학설이 급격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황하문명의 대표적인 것으로 '한자'를 꼽습니다. 그리고 한자가 갑골문자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갑골문자로서의 가장오래된 것이 황하 지방이 아닌 발해만에서 발견되었지요.황하지방은 물론 발해만 지방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우리 민족이 지배했던 곳이지요. 한자는 원래 중국 민족이 갑골문자에서 스스로 발전시켜 온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갑골문자에서 영향을 받아 이와 유사한 문자를 쓰던 중 한자를 이끌어냈다는 것입니다. 위와같은 최근의 학설을 따른다면 한자는 중국민족의 독창적인 문자가 아니라 우리 한민족의 문자가 한자의 생성기원이 된다는 것이지요.이것은 최근 발해만 지방에서 발견된 갑골문자를 중국 당국 및 학계에서 발표를 꺼리고 있다는 사실을 봐도 알 수가 있죠. 흔히 갑골문자는 은나라가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헌데 은나라및 그이전의 나라는 중국민족이 아닌 동이족이 세웠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하지만 현재 역사의 왜곡으로 정립되지는 못했지만 동이족이 고조선인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의 동부 해안지방인 산동성 가성현에 '무씨사석실'이 있는데, 그곳의 화상석 그림에는 동이족의 신화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내용이 단군 신화와 거의 일치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황하강 유역의 유적들이 중국의 다른 유적들과는 성질이 다르고 오히려 한반도 및 만주지방의 유적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는 것입니다.그런데도 이렇게 역사가 왜곡된 것은 중국이 고구려 및 그이전의 역사를 말살하고 우리 민족의 활동사를 마치 자신들의 역사처럼 꾸몄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삼국통일 이후 철저하게 사대사상에 젖은 사람들이 중국의 역사가들이 지은 역사서를 동양 역사서의 최고로 여기고 우리의 역사마저 그들의 기록에만 의존하였다는 사실이 원망스럽지요. 그들은 우리의 찬란한 역사는 말살하고 오히려 중국의 문명만을 숭배하는 우를 범했던 것입니다.또한 우리는 중국 요나라의 우문명이 대치수 사업으로 치수법을 완성시켰다고 그를 추켜 세웁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규원사화"에서 이르길 "단군조선이 개국한지 30년만에 대홍수가 일어났다."라고 되어있는바, 단군조선 30년은 BC 2303년으로 요나라 70년 BC 2301년 보다 앞서지요. 요의 순제로부터 치수명령을 받은 우문명은 단군조선의 후국인 도산국에 장가를 들어 단군의 아들인 부루에게서 치수를 배웠다고 합니다.그러나 중국은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하지않고 "서경"등에 교묘하게 신화처럼 해서 서술하였습니다. 또한 청동기 시대 이후부터 국가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제시대 이전까지는 한반도에는 구석기,청동기 시대가 없이 단지 중국으로부터 문명을 답습하기만 했다는 식민지 사관이 팽배했지요.하지만 한반도에서 구석기,신석기,청동기 문화가 발굴되면서 그러한 역사관이 뒤집어지자 아직도 겨우 기원전 7세기 정도만 인정하고 그것도 시베리아 계통에서 유입된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더 오래된 문화가 발굴되면서 이러한 학설은 이제 다시 정립되어야 합니다.또한 전남 영암군 장천리 주거지 유적의 청동기 추정연대는 BC 2,600년 경으로 황하문명보다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따라서 황하문명이 성립된후 영향을 받아 고조선이 성립되었다는 것은 더이상 정설로 받아들여질 수 없고 앞으로 우리는 제대로 된 사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오히려 황하문명을 만든 주역이지 거기에 영향을 받은 민족이 아닙니다.
< 천문학으로 고조선사 증명했다 > [시사저널] 205.206 함병호 93/9/30.10/7 BC 1733년 홀달 단제 시대 단군 조선인들이 보았을 오행성의 결집 현상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역으로 추적하여 컴퓨터 합성 기법으로 시각화했다.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 (僞書) 라는 `누명`을 쓰고 버려져 왔던 상고사 서적들에 대한 복권 작업이 젊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학계에서 방치해 왔던 상고사 서적들의 내용을 천문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한 결과 상당 부분이 당시의 실제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지난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들의 연구는 상고사 서적들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 현상 기록을 당시의 실제 천문 현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서적은, 단군조선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 기록과 함께 당시의 천문 현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에 들어 있는 <단군세기>이다.
<단기고사>는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서와 옛 비문, 현장 답사 등 13년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엮은 단군조선사이다. 제1세 단군왕검으로부터 제47대 단군까지 약 2천여 년의 역사를 역대 임금의 재위 기간과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름만 전해 오던 것을, 구한말의 한학자인 유응두가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란 선비가 저술한 단군조선 시대 역사서로, <단기고사>의 서술 내용과 큰 줄기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오행성 결집, 큰 썰물 현상 모두 "사실" 이 서적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로 기성 사학계로부터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해 왔다. 그러나 재야 사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일제 식민 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해 왔다. 재야 사학계는, 일제 때 단군조선 말살 운동에 앞장섰던 일인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조선의 고대사 관련 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밖에 없다. 그 밖의 사서는 사서가 아니라 위서다."라고 주장한 것을 기성 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해 온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한 소국의 역사로 개악하고자 했던 일인 학자들에게, 적어도 고대 조선이 대륙을 사이에 두고 중국 민족과 자웅을 겨뤘던 고대 강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이들 상고사 서적들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단기고사>와 <단군세기> 에는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 현상'이 한군데,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군데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천체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전개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행성들 위치를 알면 슈퍼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이 행성들의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
연구 결과, 이 사서들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 적으로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단기고사>나 <단군세기> 기록에 따르면, 제13대 단군인 홀달단제 50년, 즉 BC 1733 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즉 '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라는 한 줄의 글귀로, 무진 50년에 다섯개 별이 婁星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 년으로부터 바로 1년 전인 BC 1734 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 이 날은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 별빛이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났었다. BC 1733 년을 기점으로 하여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 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박교수는 "기록 연수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약 3천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질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 결과 0.007%, 즉 "세계 지도에서 임의의 한 장소를 지목했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 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오행성 결집 현상과 함께 박교수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기록. 두 사서 모두 제29세 마휴단제 9년 (BC 935년) 때 `南海潮水退三倜` 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 있다. 오행성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 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 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 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 후인 BC 931년 11월 22일에 이 기간중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넣었을 가능성은 0.04%에 지나지 않았다.
박교수팀이 처음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다. 일식 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 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단군 조선기에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밖에 안돼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 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 2183년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여 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중 두개는 해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교수는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 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전적으로 날조된 것만는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도 어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사서들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라고 박교수는 말했다. 기성 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 박교수팀의 연구는 그 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사학) 는 "그 동안은 주로 중국 사서들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에 의존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서지학자들이 참여하여 이 사서들의 내용을 좀더 정밀하게 검토한다면, 단군조선사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했다. 박성수 교수 (정신문화연구원, 사학)는 "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다. 이들 역사서의 내용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해도, 연구도 해보지 않고 이를 백안시해 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박교수팀의 연구에 대해서는 그 동안 상고사 서적들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한국 상고사학회` 측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이들의 연구 결과가 기성 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상고사학회는 10월에 발간할 예정인 이 학회 연구 논문집 <상고사학보> 에 박교수팀의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단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상고사학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최몽룡 교수 (서울대, 고고학)는 "연구 결과의 중요성을 인정해 논문집에 싣기로 결정했다. 단군 조선에 대한 연구는 결국 한국 문화의 뿌리에 대한 연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문헌사적인 연구뿐 아니라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벌일 필요가 있다" 라고 말했다.
단군조선시대의 천문 현상 기록
시기기록 내용문헌 BC 2183 2세 단군 부루 58년 日蝕세기, 고사 BC 1733 13세 단군 홀달 50년五星聚婁 세기, 고사 BC 1533 17세 단군 여을 20년 여름日蝕고사 BC 935 29세 단군 마휴 9년南海潮水退三倜세기, 고사 BC 918 6세 기자 2년 7월七月 日蝕 고사 (기자) BC 837 32세 단군 추밀 13년 3월三月 日蝕 세기, 고사 BC 765 35세 단군 사벌 8년 4월四月 日蝕 고사 BC 579 19세 기자 1년 봄日蝕고사 (기자) BC 423 44세 단군 구물 3년 2월二月 日蝕 고사 BC 248 47세 단군 고열가 48년1월十月朔日 日蝕세기 BC 241 36세 기자 인한 35년日蝕 고사 (기자)
한민족의 뿌리 사상 송호수(宋鎬洙) 미국 S.Baylor 대학 박사과정졸업, 철학박사 동아대, 부산대, 고려대, 한성대 전임 및 강사 미국 S.Baylor 대학 명예교수 및 연구 교수 저서 : '종교단체의 재무행정에 관한 비교연구' '민족정통사상의 탐구' '한민족의 뿌리사상' '겨레얼 삼대원전(三大原典)'
최근 일본 학자 오향청언 (吾鄕淸彦) 씨가 쓴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 간 것에 불과하다" 고 말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대충 어느 정도 변조가 되었는가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한사군(漢四郡) 문제만 보더라도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을 평양에, 그것도 세 군데나 되는 평양 중에서 대동강의 평양만 있었다 하고 또 위만 (衛滿) 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보아라. 너희 조선족은 역사의 시초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 너희는 항상 피지배 민족이었지 언제 독립 국가였느냐" 고 하면서 우리나라를 영원히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당위론을 제시하는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단군 이전에 환웅천황 (桓雄天皇) 의 역사 시대가 18대 1565 년 동안 있었고 또 그 이전에 환인천제 (桓因天帝) 시대가 7대 3301 년이 있어서, 금년까지 9183 년이라는 사실이 '삼성기'(三聖紀) 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성기' 의 문헌사적 고증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이 책을 쓴 안함로 (安含老)는 서기 600 년경 신라 시대 사람인데 삼국유사가 나온 것이 1200~1400 년경이니까, 그보다 훨씬 더 먼저 기록된 것이고 이러한 '삼성기'의 기록을 그대로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연조는 9천 년이 넘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9천 년이란 역사를 어떻게 입증하느냐, 그러한 문헌 하나만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외국학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 외국 학자들의 논문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몇년 전에 일본에 와서 발표한 소련의 여류 민족학자 R.S.M 자리가시노바 씨는 "한동 〈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살았고 신석기 시대 초에 이미 독자적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고 했습니다. 신석기 시대 초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 1만 2천 년 전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 이미 우리 동이족들은 주변 국가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 높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는 공산국가의 학자가 발표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있죠. 역시 공산국가인 중공의 유명한 고고학자 당란이, 1977.7. 14 자 중공 '광명일보' 를 통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산동 반도 지역에서 남한 넓이 만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는 대문구 문명권 (大汶口文明圈) 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발굴하니까 문자가 나오고 그 곳을 통치한 소호씨 (少昊氏) 란 통치자 이름까지 나왔으며, 이것을 방사선 탄소 측정을 해 보니까 지금으로부터 5785 년 전 것" 이라고 합니다. 5785 년 전이라고 하면 단군 건국보다 약 1500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 이미 산동 반도에는 문자를 사용한 고도의 문명 국가가 있었는데, 그 통치자인 소호금천씨 (少昊金天氏) 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이 중국 고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사변'(古史辯)만 보더라도, 이 책은 우리가 쓴 책이 아니고 중국에서 나온 책입니다.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소호씨는 동이계야 (東夷系也), 동이지인 (東夷之人) 이라" 고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태호 복희씨 (太호伏犧氏), 여와씨 (女蝸氏), 소호금천씨가 전부 동이족이라는 것을, 중국 사람 자기네 손에 의해 밝힌 겁니다. 또 며칠 전에 조선일보에 한번 나온 적이 있죠. 요령성에서 5 천년 전의 여신묘가 발굴됐는데 이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입니다. 그리고 궁터도 발굴했다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당란이 발표한 유적보다 700 년이나 더 이후의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을 놓고 볼 때, '삼성기'의 기록이 객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면, 더 이상 무슨 반증이 필요하겠습니까?
소호가 다스린 나라의 서울은 요동 반도에 있고, 산동 반도까지 다시 말해서 발해만 안쪽의 그 광활한 지역을 단군 이전에 벌써 통치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5 천년 전의 거대한 궁터가 발굴되었다면 이는 부족 시대 미개 사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죠. 강력한 정치 세력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중국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 주(周)나라 이전은 다 신화 시대로 몰아붙였지만 은허에서 갑골문이 발굴된 이래, 또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볼 때 요(堯), 순(舜), 하(夏), 은(殷) 등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를 신화적 인물에서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들은 이미 '시전'(詩傳)' 서전'(書傳) '맹자'(孟子)를 보면 다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정문으로 적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문헌을 볼 때에는 상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식자우환이라고, 조금 안다는 학자들이 그 시대의 변천과 상황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니 비과학적이니 하면서 호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로 청동기 시대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고고학자들이 역사를 보는 시야는 걸핏하면 청동기를 가지고 자(尺)질을 하는데, 즉 청동기 개시 년도에 따라 한 국가의 역사 시대가 결정된다는 얘기인데, 현재 사학계에서는 우리 나라 청동기 시대의 상한을 3 천년밖에 안보고 있죠. 그러니까 3 천년 이전에는 국가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한강 이남에서 우리 학자들이 발굴해 낸 유물들이 3 천년 이상 소급을 못하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단군 조선의 근거지는 도대체 어딥니까? 백두산 아래 아사달입니다. 아사달은 그럼 어디냐? 바로 지금의 하얼빈인데, 그 지역을 발굴하고 있는 북한의 학자나 소련 학자들이 발표하는 내용을 한번 들어봅시다.
지난 78 년 8.14 자 북한 '중앙통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 조선족이 청동기를 사용한 것은 서기전 2 천 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 천 년 전이다. 그때 농가의 유적도 발굴했고 농기구와 오곡 씨앗까지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소련 학계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발간한 유 엠 푸진이 쓴 '고조선' 이란 책을 보면 "조선족은 4 천년 전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 단군왕검이 있던 유적지도 발굴했고 단군 조선 시대 중앙 행정기관의 유적지도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이렇듯 국내의 여러 문헌뿐만 아니라 국외의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굴해서 우리의 역사 상한을, 그리고 단군 조선의 건국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는데도, 우리가 여기 앉아서 휴전선 이북을 못 가본다고 해서, 가서 발굴을 못해 보았다고 해서, 우리의 청동기가 3 천년 이상 소급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민족사상의 원형 홍익인간(弘益人間) - 우리가 일찍이 남북 5 만리 동서 2 만리라고 하는 광활한 지역을, 한웅천황 시대가 1565 년 동안 단군 조선 시대가 2096 년 동안 지속되면서 통치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예사로이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한웅천황 시대까지는 그만두고라도, 단군조선 시대만 해도 2096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하는 것은 동서양 역사를 통틀어서, 아니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한 개의 왕조가 2 천년간 지속된 그러한 역사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국경을 같이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하 은 주는 동이족이니까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이후로 300 년 이상 지속한 왕조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같은 시대의 중국 역대 왕조는 300 년도 채 못 가 전부 망해 버렸는데, 같은 시대의 우리나라는 2 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간직한 채 그 넓은 지역을 어떻게 통치할 수 있었느냐. 해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위대한 철학, 그 철학은 바로 홍익인간 (弘益人間) 입니다.
우리나라 교육법 제 1조에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교육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번 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한 지방 강연에서, 대한민국 교육법 제 1조가 뭐냐 고 하니까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요. 서글픈 일입니다. 3~40 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교육 이념이 무엇인지, 홍익인간이란 용어가 어디서 나왔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하는 것쯤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익인간이라는 용어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환인이 환웅을 불러 놓고 삼위산과 태백산 그 일대가 홍익인간할 수 있는 곳이니 너희가 가서 다스리라 하면서, 무리 3 천명과 통치자의 신표로 천부삼인 (天符三印)을 주어서 보냈다고 '삼국유사' 첫머리에 나옵니다. 이렇듯 홍익인간이란 용어의 출처는 환인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그런데 요사이 툭하면 단군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단군의 홍익인간을 떠들어대지만, 실은 환인으로부터 홍익인간이 나와서 환웅 이후 단군이 계승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를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법 제 1조가 홍익인간입니다. 법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 헌법 전문을 살펴볼까요? 제일 먼저 "유구한 민족사 빛나는 문화 그리고..." 로 시작은 잘했는데 맨 끝이 좋지 않아요. 1980 년이 뭡니까? 이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1980 년밖에 안되었다는 얘깁니다. 자유중국 헌법에도 서기를 쓰지 않고 중화민국 75 년이라고 쓰며 기독교 목사인 유태인도 연하장을 보내는데 서기를 쓰지 않고 이스라엘 년도 5700 년 이렇게 쓰는데 우리 나라는 왜, 국통이 없습니까? 1980 년이 왜 들어갑니까?
또 한가지, "3 1 운동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해 놓았는데 기미년의 선언서를 보면 년도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조선건국 4252 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조선은 바로 단군조선이지 딴 조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헌법 전문 맨 끝에는 1980 년이니,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얘기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사람을 크게 이롭게 할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조화경 (造化經), 교화경 (敎化經), 치화경 (治化經), 이 삼화개천경 (三化思想開天經) 이 바로 홍익인간의 구체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조화경을 '천부경'(天符經), 교화경을 '삼일신고' (三一神誥) 라 하며 치화경을 '참전계경' (參佺戒經) 이라고 하는데 이 3대 경서가 그 기본입니다. 우리나라 1 만년 역사의 뿌리가 곧 이 3 대 경전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중국에서 말하는 소위 유교 사상 도교 사상이 파생되어 나갔습니다. 구체적으로 반증을 제시할까요? '맹자'에 나오는 유교의 5륜은 아무리 유교에서 썼다고 해도, 미국에서 국어로 쓰는 영어가 미어가 아닌 영어이듯, 그 출처는 동이족입니다. 말씀드리죠. 순(舜)임금이 글(契)을 불러 가지고 사도 (司徒:문교장관) 를 명하고 인간에게 윤리를 가르치라고 해서 글이 만든 게 바로 5륜입니다. 글은 동이족이입니다. 그리고 순임금도 '맹자' 에 보면 "저풍 (諸馮) 에서 태어나 부하 (負夏) 땅에 옮겨 살다가 명조에서 죽었는데 그는 동이족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륜을 선포한 글(契) 이나 오륜을 선포케 명령한 임금 순 역시 동이족입니다. 따라서 말할 것도 없이 삼강오륜의 출처는 동이 문화입니다.
공자는 어떤가요. 공자는 동이족의 혈통으로 은나라 왕족인 송미자 (宋微子)의 후손인데, 현재 홍콩 대학의 임혜상 교수나 대만 대학의 서량지 교수도 "은나라는 동이족이다" 하였고 '고사변' 에도 같은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 공자 자신도 '논어' 에서 말하기를 "술이부작" (術而不作) 이라 하여 "나는 요와 순의 사상을 계승해서 서술했을 뿐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고 밝혔고 중국의 고전 '초사' 를 보면 "황제 (黃帝)는 백민 (白民) 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족에 속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으니 황제의 5세손인 요임금이 동이족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이족인 요와 순임금의 사상은 동이 사상이고, 이를 계승한 역시 동이계인 공자의 유교가,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에서 파생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도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자 (老子)가 황제의 사상을 이어 받았다고 해서 황노지교 (黃老之敎) 라고 하는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동이족인 황제의 사상, 즉 동이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 노자의 도교이고 보면, 비록 중국 대륙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다소 변질되어 고구려 시대 때 역수입되어 들어왔다고 해도 역시 그 뿌리는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불교 사상은 또 어떤가 살펴보기로 하죠. 석가 이전에 우리나라의 전불시대 (前佛時代)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의 비문과 '삼국유사' 그리고 지공선사 (指空禪師) 의 천보산 희암사 중수문에 다 나와 있습니다. 석가 자신도 '대방광 불화엄경' 보살 주척품에서 말하기를, "해동 금강산에 법기 (法起) 라는 보살이 있어서 1200 대중을 거느리고 법을 설하고 있는데 그 불법이 거기에 예로부터 있었다 (從昔己來)" 고 증언하고 있으니, 이는 석가 출현 이전에 우리 나라에 이미 전불시대 즉 가섭불 (迦舌佛)시대가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섭불이 앉아 법을 설한 연좌석 (宴坐石) 이 신라의 월성 동편 용궁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옥룡집' (玉龍集) 과 '자장전' (慈藏傳) 에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는, 먼저 이 말씀부터 드려야 되겠습니다. 4700 년전에 나온 '황제내경소문' (黃帝內經素問) 편을 보면 동이족이 살고 있는 이 지역 즉 "동방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로 문화가 발생한 곳 (東方之域天地之所始生也)" 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구상 문화의 최초 원산지는 동이족이 살고 있는 동방지역이라는 거죠.
기독교의 한 단면만 말씀드리자면 법률학자인 동경 대학의 나까다 (中田薰) 교수가 '고전법에 근거한 문화동원론고 (文化東源論考)' 에서 말하기를, 모세의 5경의 출처를 조사해보니까 함무라비 법전 속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나까다 교수는, 모세하고 함무라비 사이에 500 년의 연조가 있지만 모세의 5경은 함무라비 법전을 계승한 것이고, 이는 또 수메르법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수메르의 역사 시초가 지금으로부터 5500 년 전인데, 남은 과제는 수메르족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영국학자 크래머 (Kraemer, 1897-) 와 일본의 우에노 (上野景福) 교수가 발표한 것을 종합해 보면,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절대 아니고 동방에서 이동해 왔다. 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가 쓰던 팔괘부호 (八卦符號) 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5500 년 전에 서쪽으로 옮겨 왔다" 는 것입니다. 복희와, 수메르에서 최초로 우르(Ur)국을 건설한 왕조나 최초의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에 문화국을 건설한 엔릴 (Enril) 영웅이나 거의 같은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5500 년 전에 복희문화를 가지고 동이족이 서쪽으로 갔다는 얘기가 됩니다. 무엇이 그것을 입증하는가? 수메르 말이 우리말하고 같은 것이 많이 있다는 게 최근 미국에서 연구가 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메르라는 말 자체가, 곧 '소머리' 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송화강을 우수하, 음만 그대로 따면 속말수라고 부릅니다. 소머리강이다 이거죠.
뿐만 아니라 '삼일신고' 신훈 (神訓)에 나오는 "신(神)은 재무상일위 (在無上一位) 하사 유대덕대혜대력 (有大德大慧大力) 하사 생천(生天) 하시며 주무수세계 (主無數世界) 하시고..." 하는 것이 바로 완벽한 기독교의 일신사상 그대로입니다. 또 '참전계경' 총론에 보면 "여화신이 흙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어 7일 만에 이루어 마쳤다. (女禍鍊造成而注之魂七日而成)" 하는 것은 기독교 창세기 2장 7절하고 꼭 같습니다. 여호와와 여와, 야희와 여희등은 음도 같고 행적도 같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나 수두 제단에 치외법권 지대가 있다는 내용, 그리고 동지에 양을 잡아 붉은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구약의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동지에 붉은 팥죽을 끓여 문설주에 바르고 하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한 풍속들이 여기서 건너가 전해 내려온 거죠.
서양 사상을 종합하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둘인데 소급해 올라가면 이 두 가지 사상이, 수메르 문화에서 나왔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이러한 신본과 인본사상은 우리의 신인사상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지요. 이렇듯 지구상 모든 사상의 뿌리가 동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빛은 동방에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세계적으로 보아서 9 천년이 되는 역사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서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수메르족이 5500 년밖에 안됐는데... 이런 역사가 없죠. 제 4빙하기 이전의 역사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몇억년 전의. 유물이 지금 발굴된다고 해도 그건 지금 우리 인류하고는 관련지을 수 없습니다. 제 4빙하기가 이 지구를 휩쓸고 간 뒤에 살아 남았던 우리의 아담과 이브 설화는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최초에 천하(天河)의 동서에 있다가 칠월 칠석날 만나 가지고 오색 인종을 낳았다" 는 것이고, 이것이 '신사기'의 기록을 보면 366 갑자에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한 갑자가 60 년이니까 즉 21960 년 전에 제 4빙하기가 물러가고 제일 생명력이 강한 한 남성과 여인, 나반이와 아만이 즉 나반이와 아만이가 인류의 시초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이러한 판도에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방 지역은 천지지 소시생야라" 우리동방 동이족이 살고 있는 땅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의 문화가 발생 된 곳이다. 하는 점이 여실히 실증이 된다 하겠습니다. 또 '황제내경' 소문편에 보면 "침술도 역시 동방으로부터 전해 왔다 (폄石亦從東方 來)" 라고 했듯이 한의학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 한의학의 한자를 "漢"에서 " 韓"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진작 바꿨어야 했어요. 한문이라는 글자도 마찬가지에요. 자꾸 이렇게 한문(漢文)이라고 쓰니까 중국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중국이 漢나라 라는 국호를 정할 때 이 한문이 있었기 때문에 정한 것이지, 없었다면 어떻게 漢나라 라는 국호가 생깁니까? 그러니까 한나라가 있기 전에, 이미 이 글자 한문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아까 말씀드린 글이라는 사람하고 창힐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둘 다 동이족이지 않습니까?. 동이족이 만들었으면 동이족 글이지 왜 중국글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지구상 모든 사상의 원천은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 홍익인간 사상의 내용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화경, 교화경, 치화경이 이 원리 속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루마니아 사람 게오르규 (Gheorghiu 1916~) 가 "홍익인간이란 단군의 통치 이념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률이며 가장 완전한 법률" 이라고 지난 1986 년 4월 18 일자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라프레스 프랑세스' 지를 통해 발표한 겁니다. 신부 옷을 입고 성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왜 모세의 10 계가 최고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또 그는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서 "한국 민족이 낳은 홍익 인간 사상은 미래 21 세기의 태평양 시대를 주도할 세계의 지도 사상이다" 고 역설했습니다. 그 이상 얼마나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우리는 등하불명이라고, 지금 주걱 들고 주걱을 찾고 있습니다. 칸트, 헤겔을 찾고 독일철학 어쩌니 하고 아까운 시간만 다 허비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보배는 왜 하나도 개발 못하고 있느냐 이겁니다. 서양 사람들이 먼저 눈을 뜨고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보배, 최고의 이념이 여기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홍익인간 사상이다" 고 하는데 우리 자신은 그걸 모르고 외국 사상 속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방황하고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불러다가 자문이나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입니까!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상들은 실로 홍익인간 사상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지, 결코 홍익인간 사상하고 대립된 사상이 아니다. 가령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유교나 불교 기독교라는 것은 홍익 인간 사상과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홍익 인간 사상의 내재적인 사상이다" 하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상황이 대단히 여의지 않고 또 다른 나라와 달리 적어도 2 천년 동안 외래 세력에 밀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기록에 담겨져 있는 우리 민족 사상사적인 내용이 너무나 엄청나게 오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중국적인 사대주의 사관 (事大主義史觀) 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많이 바뀌었고, 그 이후에는 일본 사람들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엄청나게 변조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서구 문화의 홍수에 밀려서 바른 사관을 잡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만, 분통스러운 것은 이 문제가 언제 바로 잡혀질지 기약이 없다는 점입니다.
왜 이렇게 비관적일 수밖에 없느냐 하면, 현재 우리나라 각 대학의 강단에 서있는 사학과 교수들의 대다수가 일제 하에 만들어졌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또 그 밑에서 배운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각 중고등학교에서 그러한 사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라도 알고 계신 분들이, 과연 우리 국민들 가운데 얼마나 될까 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죠.
한민족의 일만년 역사 우리 역사의 맥과 우리 민족의 또다른 맥 한국 7세 3301년 B.C 7199 배달국 18세 1565년 B.C 5885 조선 47세 2096년 B.C 2333 북부여 6세 182년 B.C 239 - 낙랑국, 중삼한, 위만, 동부여(가섭원 부여) 고구려 34세 846년 B.C 178 - 백제,신라,가야: 사국시대 대진 15세 259년 A.D 668 - 신라(통일신라):남북조시대 고려 34세 475년 A.D 918 - 요, 금 조선 26세 528년 A.D 1392 - 청
이 표는 생소한 점이 많을 것이다. 왼쪽은 우리역사의 맥이고 오른쪽은 우리 민족의 또다른 나라이다. 여기서 여진, 거란이 나오는데 여진족은 우리 민족에게서 갈라진지 2000년 경이고 거란은 그보다 오래 되었는데 우리에게는 형제나 다름없는 핏줄을 가지고 있다. 동이족으로부터 거란, 흉노, 선비, 몽고, 여진족이 갈라졌음이 또한 한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다.
(1) 한인의 한국시대 한국은 천산 동방으로 [동서가 2만리, 남북이 5만리] 의 방대한 문명의 대국으로 파내류국으로도 불리웠다. 당시 천산에 거하며 득도하여 덕이 높던 성자가 천왕으로 추대되어 한국을 통치하였는데 그 이름을 안파견이라고 하였다. '만인의 아버지' 라는 뜻의 안파견 한인은 초대 한인으로서 한국을 다스렸는데 한인이란 통치자와 제사장의 관직명이다. 당시 한국은 12 한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안파견 한인은 자신의 형제 9인으로 하여금 각 한국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를 통칭하여 [광명의 제국]이라 불렀다 (삼성기하, 태백일사, 규원사화] 제1변의 남, 북 문명의 정통을 계승하여 중앙 아시아에서 태동한 이 한국문명은 제2변의 동, 서문명으로 맥이 이어졌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는 최근 120년 동안의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약 5,500년 전에 현서양문화의 뿌리인 슈메르문명이 있었으며 이 문명을 건설한 슈메르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김상일,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국) 또 북미의 오리건주에서 발굴된 짚신 75켤레가 동이족의 짚신과 흡사한데 방사성 탄소의 측정에 의하면 이는 약 9천년전의 것이라 한다. 미국 워싱톤 박물관(스미소니언)에는 이외에도 나무절구, 소쿠리, 광주리, 베틀, 어망, 물레 등 우리 선조들이 쓰던 생활 도구와 동일한 것이 많다고 한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천산 산맥은 그 주맥이 동북쪽으로 뻗어 나가 소련과 캐나다의 국경인 베링해협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이 붙어 있었던 약 25,000 년 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던 동방족의 이동은 1만년 전까지만 해도 육교의 역할을 하던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진행되었다.
(2)한웅의 배달국시대 한국의 정통 정신을 계승한 분은 후기 한국 말경에 당시 '자식들의 마을(서자부)' 의 수장이었던 성자 한웅으로, 한웅은 야만 생활을 하던 인간을 널리 구제하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에 한인께서 중국의 감숙성(돈황현)에 있는 삼위산(삼위산)과 동방의 태백산을 살펴보고 태백산으로 가고 싶다는 한웅의 뜻을 허락하여 태백산으로 파견하였다. (6천년전) 이 때 한인천제께서는 제세 핵랑군이라 불린 문명 개척단 3천명과, 천부인 3개를 주고 개천입교, 홍익인간, 제세이화를 만세 자손의 홍법으로 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한웅께서는 이를 배달국을 여는 개국의 창시 이념으로 하셨다. 당시 한웅의 동방 백두산 문명 개창시에 송화강-백두산 일대에는 토착민인 웅족과 호족이 살고 있었는데, 원주민은 호족이었고, 이주민은 웅족이었다. 호족은 사납고 약탈에 능했으나 점차 이들은 웅씨족에 의해서 융합되었다. 웅의 음은 검이며 검은 곧 신으로 불리었다. 또한 호는 불로, 불은 시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두 민족의 협력 건국으로 인하여 한웅께서 수도를 신시라 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다.
(3)단군 조선시대 동아문명의 선도 역할을 하셨던 신시 배달국 시대의 통치자인 한웅은 큰 스승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대웅전이라 아는데 이는 거룩한 스승을 모신 성전이라는 뜻이다. 한웅이란 당시 우리 광명 민족을 이끌어 주신 거룩한 스승 (한:크다, 밝다 웅:수컷, 스승) 이라는 뜻이다. 배달국의 말기 단웅께서 웅씨 왕녀와 결혼하여 낳은 분이 초대 단국 성조이시다. 단군 성조께서는 신묘년 (BC 2370) 5월 2일에 탄생하셨다. 신인의 덕으로 원근에서 외경하여 14세 되는 갑진년에 웅씨왕으로부터 비왕으로 임명받아 24년간 대읍국의 국사를 섭정하였다. 38세 되는 무진년에 단국으로부터 돌아와 마지막 거불단 한웅천황께서 돌아가시자 아사달에서 천제로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통치자를 겸임한다는 의미의 관명이다. 단군 성조께서는 한인과 한웅 천황의 정통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옛 신교 정신을 부흥시켰고, 동방 문명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아의 대홍수는 단군성조께서 87세 되던 정사년 2월 17일에 단군 조선의 대영토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홍수가 범람한 다음해인 88세 되던 무오년 7월 5일에는 운사 배달신으로 하여금 강화의 전등산에 삼랑성을, 마리산에는 제천단(참성단)을 쌓게 하였다. 105세 되던 갑술년 (BC 2217) 에는 태자 부루를 도산에 보내시어 <도산회의> 를 소집하고 순임금이 특파한 우에게 오행 치수의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초대 단군 성조께서는 세계 문명의 시원 국가인 한국과 한웅천황의 대도 정신의 법통을 정통으로 전수 받으시고 황하, 양자강 유역, 만주 등의 동아시아 대부분을 통치하셨다. 전 영토를 삼한으로 나누어 부단군 격인 왕(한)을 두어 다스렸다. 만주와 중국 북부를 관할하던 진한은 단군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중국 동부는 번한, 한반도와 일본은 마한이 통치하였다.
참고서적 : 한단고기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 서희건, 고려원 소설 한단고기 - 김태영 한민족과 증산도 민속문화론 - 임재해, 문학과 지성사
친일사학계 비판 일제 시대의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 사학자인 박은식 선생은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아야 하며 민족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잃지 않아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한 순간의 쉼도 없이 지금도 돌고 있으며 우리는 그 한 부분을 채워 가고 있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흘러간 것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한 E.H 카아의 말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을 있게 하며 우리들이 생활하고 느끼며 접하는 모든 것에 투영되어 숨쉬고 있는 것이다. 바로 민족의 역사에는 민족의 번영과 영광, 시련과 애환이 깃들이어 있다. 그렇기에 올바른 역사 정신을 간직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민족의 장래와 존망을 결정하는 중지 대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민족의 주체성, 즉 민족의 자각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민족의 올바른 역사와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사대주의와 외래사상은 일 만년 역사 속에 찬연했던 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왜곡하면서 그 모습을 달리하며 오늘에까지 이르러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 또한 이 땅을 강제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가 이 민족을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왜곡, 날조한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청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 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해방 이후 범람하기 시작한 서구의 퇴폐적 물질문명과 외래 사상의 폐해는 민족 역사와 정신의 근저까지 흔들어 놓았다. 이제 세계사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상처투성이의 억눌려 왔던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올바로 정립하고 계승, 발전하고 오늘에 재조명하여 새로운 민족 문화를 창달해야만 하는 과제가 우리들에게 있다고 하겠다. 1.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과 민족 역사의 왜곡 '먼저 조선 사람들의 자신의 일.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들을 경시하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건인 것이다' --- 1922년 조선 총독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시책
일제는 위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악랄한 정책을 이행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전통 문화와 역사의 말살을 꼽을 수 있다.
일제는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민속 조사를 실시하고 우리의 민속 신앙들을 미신으로 몰아세웠다. 특히 동제를 중점적으로 탄압했는데 촌산지순의 연구에 의하면 동제는 일본의 신도와 공통성을 지니며, 여러 가지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현실적으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민중 심성을 개발하는 가장 으뜸가는 향토 오락이며, 성씨별 분열을 막고 이를 통합하는 기능을 지니고, 마을 사람들의 심신을 정화시켜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들은 일제의 반일본화 작업에 있어 방해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다각적인 탄압을 진행하였다. 경찰국에서는 중추원 시정 연구회의 연구를 자문 받아 무녀 취체 법규를 제정하고 무당들을 경신 단체에 가입시키는 한편, 강력한 취체 행정으로 이를 금압하고, 학무국에서는 신사.신도 정책을 펴 나가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신사 참배를 의무화했으며, 사회과에서는 우리의 민속 신앙을 미신(迷信이라는 말은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함) 으로 간주하는 사회 교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사서 20 여만 권 소각과 더불어 시작된 조선사의 편찬은 당시의 조선인들로 하여금 소위 '공명.정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혀 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루어졌다. 즉 '공명.정확'한 사서의 편찬을 위해 사료가 필요하다는 구실로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감행하였는데 1차로 1910년 11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37년까지 이루어 졌고 압수 대상 서적은 단군 관계 조선 고사서, 조선 지리, 애국 충정을 고취하는 위인 전기.열전류 및 미국의 독립사까지 포함되었다. 조선 세종때부터 단군관계 사서를 수집하여 장서각 및 규장각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들 사서 가운데는 귀중한 단군 관계 고사서가 많았으리라 추측된다.
조선사 편찬시 상당수의 조선인이 참가하였는데 여기에는 이병도, 신석호, 최남선, 권중현, 박용구, 이완용, 박영효 등이 있다. 다음에 다시 서술하겠으나 우리는 이병도 씨가 이 작업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조선사의 성격과 구성 내용 등을 살펴보자. 일제의 식민 사관을 성립하는 데는 3대 요건이 필요하다. 그 첫째가 상고사와 국조의 부정이고 둘째가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만 압축해 버리는 것 마지막 셋째가 한국 민족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 본 적이 없는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하는 것이다.
조선사는 위의 요건을 충실히 따랐고 또 단군 조선의 말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왔던 당시 일본의 가장 악질적인 어용 사학자 이마니시류 (금서룡) 같은 자를 중추 인물로 세움으로써 그 의도가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시대 구분에서도 위와 같은 의도가 엿보이는데 1916년 1월의 회의때 결의한 시대구분인 상고 삼한. 삼국. 통일 신라 등이 1923년 1월 8일 제 1차 위원회 회의에서 삼국 이전. 삼국 시대. 신라 시대로, 1925년 10월 8일 제 1회 위원회 때는 신라 통일 이전. 신라 통일 시대로 압축되었다. 내용에 있어서 위와 같은 의도는 확연히 드러난다. 몇 가지 살펴보면 조선의 반도적 지리 요건으로 인해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점 (반도 북부--중국의 식민지, 반도 남부--임나 일본부) 조선 역사는 위만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조선인은 자립, 자치 능력이 없다 (당쟁.반란의 의미 확대) 조선의 조정은 동학란 때문에 청나라를 불러 들여왔으나 일본이 처음 무찌르자 합방해 주기를 원하므로 합병하여 조선인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잘 살게 되었다라는 등이 있다. 2. 오늘날 우리의 사학계 위와 같이 일본의 의도가 너무도 뻔한 조선사의 편찬은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커진다. 광복 후 출판된 권위 있는 역사 사전마저 '<조선사>가 비록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유화정책으로 된 것이기는 하나 색인이 없는 사료의 이용을 위해서는 많은 편리를 준다' 고 망발을 늘어놓고 있고 당시 조선사 편찬에 참가한 이병도씨 (금서룡의 제자) 는 해방 후 사학계의 거두로 우뚝 서게 되어 수많은 제자 양성과 더불어 식민 사학의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현 사학계의 실태와 문제점을 보자. 현 사학계의 주도권을 쥔 자들은 모두 식민사학 1세대인 이병도 씨의 제자들로서 (물론 고려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신석호씨도 있지만 일찍 타계하였음) 제 2세대라고 꼽으면 서울대학교파로 고병익, 천관우, 이기백 (한림대 한국사 교수), 차하순, 한우근, 김철준, 김원용씨 등이 있고 비서울대파로 김정배, 유원동, 변태섭씨 등이 있다. 제3세대로는 혜성같이 나타나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는 동국대학교 교수 이기동씨가 있다. 우선 이들이 저서나 강연회 등에서 한 발언들을 보면 민족사학에 조금이라도 눈이 뜬 사람이라면 분노가 먼저 치솟아 오를 것이다.
1976년 발표한 <한국고대사 연구> 라는 책에서 만리장성이 우리나라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궤변을 늘어 놓은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씨는 몇 해전 타계하였고 죽기 전 친구의 설득으로 조금이나마 뉘우치고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유명한 자는 이기백 교수가 있다. 이기백 교수는 한국사 신론 서문을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 끝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역사다> 라고 시작하면서 그의 학문적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심각한 것은 한사군을 한반도 안에 끌어다 서술한 <한국사 신론> 같은 이 자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어 외국인에게까지 한국사를 그릇 인식하게끔 만들고 있다.
87년 6월 8일자 동아일보의 "국사 교과서 개편 방향을 보고" 라는 제하의 그의 글을 보자 "....... 물론 필자 개인의 의견을 말한다면 불만스러운 점이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예컨데 고조선을 문화권이 아닌 국가로 보는 경우에, 초기에는 요령 지역이 그 중심지였다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제왕운기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필자가 우둔한 탓인지 아무리 읽어봐도 그러한 대목을 발견할 수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 이씨는 그의 종래의 주장대로 고조선의 영역이 대동강 유역이었다는 것을 은근히 내세우고 있다. 다음의 대화를 보자 !
진관수: 그런데 여기서 여러 선생께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은 {규원사화} 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기백: 한영우씨가 한국학보에 쓴 것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도가사학이라고 했어요. 그런 것이 걸리는데, {규원사화}의 선구적인 것은 고려말에 있었나 봐요. 진관수: {규원사화} 와 같은 계열이라고 하는 '단기고사'... 발해의 대야발이 만들었다는 것이 있다는데, 본다 본다 하면서 아직 못 보았읍니다만... 이우성: {단기고사}는 이조 말에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규원사화} 라는 것도 모를 일입니다만. 이기백: 이런 것들이 혹은 단재가 애기한 묘청이라든지 풍수도참과 연결된 그런 계통이 아닐까요? 이우성: 여기 도가는 도교적인 도가가 아니라 화랑 국선하는 선, 단군도 선인지후라 했지만 그 선에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도가라고 말하기보다는 선가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성싶어요. 그 선가는 약간 노장사상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노장사상의 그런 도가는 아니니까요. 이기백:그렇다면 잘 이해가 되는데, 여하튼 지금 사료적인 가치는 인정할 수 없는 책들이 아니겠읍니까? 이우성:단군 임금의 역대 임금이 다 나오니 그것을..... 진관수:환웅 밑에 고시가 한반도를 다스리고, 신지가 만주를 다스리고, 치우가 하북 산동을 다스리고 했다는 건데요. 이우성:요 임금 시대에도 직계가 다 나오고, 그리고 기자의 호동왕도 다 나오지 않습니까? 여하튼 단군의 이름까지 다 나오니 재미있어요
<삼성문고 '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자들은 어디서 온 작자들인가? 진정 한국 역사학계를 대표할 만한 자들인가? 또 한사람 김원용씨가 있다. 이 자는 일본이 날조해 낸 황국 사관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다까마쓰 고분 발굴 장소에 가서 일본, 북한, 중국학자들이 고구려인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마당에 당나라 화풍이 보인다느니, 고분의 주인공이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인이라느니 하고 우겼던 자이다. 또 이 자는 을지문덕이 중국 사람이라고 우겼던 자이다. 마지막으로 혜성의 사나이 이기동씨가 있다. 87년 5월 29일, 30일에 있었던 역사학 대회에서 고대사 되찾기 운동을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70 년대와 유신 체제의 분위기의 연장" 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그는 또 "실증 사학이 마치 식민 사관의 장본인 인양 단정되고 일부 민족 민중 사관이 고조되는 분위기에선 고대사 연구는 존립 기반이 질식되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고 한탄해 마지않았다.
이상 여러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성향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자들이 주름잡고 있는 사학계의 현실 속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례로 비록 식민 사학자들에게서 배웠지만 일부 뼈대있는 소장 학자들이 그 천편일률적인 식민 사학에 싫증을 느끼고 이에 반기를 들려고 하면 그들은 대스승인 이병도 박사가 그런 짓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밥줄이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식민 사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 중에서 기골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의 독특한 민족 사관을 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식민 사학자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화살을 퍼붓는 통에 한국 땅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도피하는 실례도 있었다고 한다. <국사통론>을 쓴 건국대학교의 박형표 교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기독교까지 이런 작업에 끼여들었다. 이들은 단군 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국사 교과서에서 아예 빼 버리자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맹렬히 활동하고 있고 한국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의 한 갈래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또 이것이 안되니까 한국의 국조를 단군으로 인정하고 이 단군 국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 연세대 교수 김동길씨 (지금은 사퇴하고 정치일에 뛰어들었음) 의 단군성조에 관한 견해를 보자.
"곰과 인간의 염색체수가 다른데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또 불확실한 신화시대를 우리의 정사에 집어넣고자 힘쓰는 사람들의 의도는 흡사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아시아 대륙과 미국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그 옛날의 일을 미국사에 정식으로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그런 얼빠진 미국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우리들에게는 확실한 역사의 시작이다. 이 나라들이 출발이 대개 기원전 60년에서 20년 사이라는 말은 이 나라의 역사가 한 2천년쯤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 사람은 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 소리들을 할까? 이 사람의 머리에는 일제가 그렇게 바라던 식민 사관으로 꽉꽉 들어차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상으로 일제가 저질러 온 민족문화와 민족 역사의 말살을 살펴보았고 민족 역사인 경우 해방후 우리 사학계의 실태까지 살펴보았다. 글의 초두에서 밝혔듯이 당시 일본은 조선인의 반일본화 시책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것은 민족 역사의 철저한 왜곡이라고 보고 교과서적인 조선사 편찬을 위해 (다른 어떤 교재보다 교과서가 가장 권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류의 우리 민족 사서를 소각 내지 압수할 필요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들의 수십 년에 걸친 압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압수를 위한 발악이라 표현하고 싶다) 민족의 몇몇 선각자에 의해 민족사서가 오늘날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위 글중 식민 사학자들의 대화에서 비쳤던 규원사화, 단군세기외에 환단고기가 오늘날에 출토된 민족사서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전화나 환란속에서 사라져 간 민족사서의 고갈 속에서 그나마 이것들의 가치는 국보 급이라 아니할 수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사학계에서는 이 사서들이 '신빙성이 없다', '황당하다' 는 이유로 천시되고 따돌림받는 이유는 어인 일인가? 최근에 들어 고고학의 발달과 고적의 출토 등으로 이들 사서들의 가치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러한 경향은 점점 뚜렷해질 것이라 믿고 환단고기를 처음 본 일본 사람들이 '아시아의 지보' 라 하였고 중국 사람은 '서역까지 밝혀 주는 주옥의 지보' 라 예찬했던 점을 상기시켜 본다. 동방 한민족사의 기원 - 배달국(倍達國) 동서 4대문명권은 본래 약 1만 년 전의 환국(桓國)으로부터 분기해 나간 것입니다. 환국(桓國)의 문명은 세계 각 지역의 고대 문화 생성과 그들의 뿌리 문화와 깊은 상호 연관성이 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환국(桓國) 말경에 환인(환국의 통치자)은 '서자부(庶子部)의 수장(首長)인 환웅에게 인간을 널리 구제하라는 명(命)을 내리시어 동방의 태백산(백두산:三神山)으로 파견하였습니다.(일연, '삼국유사', '고조선기' 참고)원시의 미개생활을 하던 동방 땅의 인간을 널리 구제하고 싶은 간절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던 환웅은, 환인께서 종통계승의 신권(神權)의 상징으로 내려 주신 천부인 3개와 동방 문명 개척단 3천 명을 이끌고, 동방의 태백산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1대 배달 환웅은 원주민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을 통합하여, 3천 명의 문명개척단과 함께 수도를 신시(神市)에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하여 새 나라를 건설하셨습니다. <곰과 호랑이는 동물이 아닌 토템 사상에 의해 족호(族號)를 나타낸 것임> 이 때 환웅 천황은 신교신앙을 기반으로 신시에서 배달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에게 천경신고(天經神誥 : 천부경과 삼신고)를 가르치고 삼신상제(三神上帝)의 진리로 백성을 교화하였습니다.(북애자, '규원사화', '태시기' 참고)홍익인간의 한민족 개국이념도 본래 환인이 환웅에게 동방문명 개척 시에 내려준 것인데, 환인·환웅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고조선 단군의 개국이념으로 둔갑하여 국민 다수가 그렇게 세뇌되어 알고 있는 것입니다.환웅 시대의 실존 역사를 가공의 신화로 취급하는 것은 세뇌된 식민사관의 중독(中毒)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외의 학계에 보고된 다음의 자료만 살펴보아도, 고조선 이전의 배달 역사의 실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최근 중국의 요녕성지역에서 대규모로 발굴된 홍산문화 유적에서 지금까지 황하유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대형 제단, 여신묘, 적석총군, 석관묘, 빗살무늬토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서기전 4000-3000년경의 이 홍산유적을 중국학자들은 삼황오제(三皇五帝)와 연결시켜 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만주 요녕성 일대는 중국 정사(正史)에서 동이(東夷)라고 하는 지역으로, 고대에는 한민족의 활동 영역이었다. 이 유적들이 만들어진 연대인 오천 년 전은 요녕성 지역과 황하유역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화권, 정치권이었다. (1986. 8. 1, 조선일보 중에서)지금까지 중국 황하문명의 전유물처럼 인식해온 갑골문화는 본래 황하유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발해 연안 북부에서 기원하였다.(서기전 3500년경) 동북아의 빗살무늬토기와 석묘(적석총, 석관묘, 지석묘 등) 문화의 기원지도 발해 연안이다. 최근에 서기전 2000년경의 최고(最古)의 악기가 발해 연안에서 잇따라 발견되어, 동방에서 가장 먼저 예악(禮樂)이 발생해 민족음악으로 성장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동북아에서 최초의 청동기가 발견되는 곳 역시 발해 연안 북부이다. 이 지역은 고대에 동이족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은 마땅히 발해 연안을 중심으로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동방 문화의 주인공이 당당히 우리'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이형구, '한국고대문화의 기원' 중에서) 이와 같이 고고학적 유물 발굴의 성과로 인해, 환웅의 배달국 건국 사실이 실존 역사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요녕성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한민족입니다.한민족의 민족사의 실제적 첫출발은 배달의 환웅시대부터입니다. 때문에 우리민족을 배달 민족이라 부르는 것도, 이 환웅천황의 배달 건국을 수천년 동안 기려왔기 때문입니다. 이 배달의 역사 시대는 1565년간(서기전3898-2333) 모두 18세의 환웅천황이 통치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고조선의 시조 단군성조는 배달의 말기 기원전 2370년에 태어나 38세 되는 기원전 2333년에 배달국 말기의 혼란을 바로 잡고 아사달에서 천제로 추대되어 제위에 오르셨습니다. 따라서 올해(1998, 무인년은 단기 4331년입니다.(행촌 이암, '단군세기' 참고)최근에는 단군세기의 천문기록 특히 제13세 단군인 흘달천제(屹達天帝) 50년(서기전 1733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 모인 '오행성(五行星) 결집현상'에 대한 기록이 사실임이 과학적으로 밝혀져 이 사료가 허구가 아님이 입증되었습니다.(서울대 천문학과 교수 박창범·표준연구원 천문대 라대일 박사, 1993. 9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한국상고사학보' 제14호, pp.95-109 ; 1993. 9. 30 '시사저널' 참조) 따라서 47세의 단군의 기록은 비록 부분적인 기록 내용에 문제는 제기되고있으나, 고조선사의 전체 기틀을 알 수 있는 정사기록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습니다.단군성조는 고조선의 전 영토를 삼한(三韓:진한, 번한, 마한)으로 나누어 진한(만주)은 단군 천제가 직접 통치하고, 마한(한반도)과 번한(요서, 북경일대)은 부단군격인 왕을 두어 다스렸습니다.단군조선시대의 천문 현상 기록동방문명을 선도(先導)한 고조선 문화의 생생한 증거들은 너무나 많습니다.최근의 고고학 발굴과 연구결과에 의하면, 고조선 강역인 만주지역의 청동기 문화 개시연대는 서기전 2400년경으로 밝혀져, 고조선은 초기부터 이미 국가사회에 진입해 있었음이 명확히 입증되었습니다.갑골(甲骨)문화는 본래 동방 동이족이 창조하고 계승 발전시킨 동이문화입니다. 동이족의 활동지역인 발해연안 북부에서 최초의 갑골(서기전 3500년경)이 출토되는 등 초기 갑골은 주로 이 지역에서 발견고 있습니다. 특히 갑골은 중국 고대왕조 중에서 전형적인 동방 동이계열인 은(殷)나라에서 많이 숭상했습니다. (이형구, 『한국 古代文化 기원』 참고) 중국학자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의 책력법은 동이족이 창시한 것이다(中國曆法創始於東夷 : 『中國史前史話 246쪽)"라고 하여 동이 조선족이 책력법을 창시하였음을 명확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천자(天子)사상과 천자제도 또한 동방조선족이 창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에 동방 조선이 천자의 나라(天子國)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거짓없이 전해주는 기록입니다. (동한(東漢)의 채옹(蔡邕), 『독단(獨斷)』 상권 참고) 구소련학자 「유 엠 푸진」의 연구결과를 보아도 고조선은 고도의 독자적인 선진문화를 창조, 발전시킨 문명국가였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유 엠 푸진의 저서는 이미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미궁투성이의 古朝鮮을 새로운 시각으로 체계화한 학술서적으로 『古朝鮮』이 소련에서 출간되어 한국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고있다. '소련과학원 시베리아분원 역사언어 철학연구소'가 최근 내놓은, 문제의 『古朝鮮(13 × 20.5cm 330면)은 한국, 중국, 일본, 소련의 고조선 연구와 최근의 고고학 발굴을 총정리한 것으로 북한학자들의 도식화된 유물사관도 비판 해 눈길을 끈다.고조선의 고분가 문화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해온 「유 엔 푸진」이 쓰고 고고학자 「아 페 아클라드니코프」가 감수한 이 『고조선」은, 고조선의 강역을 요동지역으로 확대해 설정하고 기원전 4세기에는 국가형태를 갖춘 고대국가가 성립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푸진의 고조선 연구는 광범위한 문헌자료의 고증과 고고학 발굴성과를 종합한 것으로 고대사 무대를 한반도에서 만주까지 확대해 조명한 것이 특색이다. 한국학계보다 고조선을 광범위하게 다룬 푸진의 『고조선』은 소련의 한국고대사 연구를 결산한 것이다.푸진의 『고조선』에 따르면 고조선 초기의 주요 문화유적이 용천군 신암리, 영변의 세죽리, 개천의 묵반리, 만주 무순의 대호반, 요동반도의 쌍택자(雙宅子), 의주군 미송리 등에서 발굴되었다.고조선 문화의 특징을 비파형 단검문화'라고 단정한 푸진은 요동을 중심으로 한반도 서부지역을 지배한 고조선은 1천 년 간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기술했다. 푸진은 낙랑의 일부세력을 제외하고는 한사군(漢四郡)도 현재 한국의 국경밖에 존재했다고 주장해 국내학계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1982.11.11, 『경향신문』 중에서)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우리 겨레의 갈래 국과연「다물」지 통권 제12호('95. 6)에 실린 한국고대사연구소 오순제소장의 글을 간추린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소수민족으로 다루는 고대 동아시아 종족 중에서 우리 겨레의 갈래에 속하는 종족으로는 동이(東夷), 숙신(肅愼), 동호(東胡)가 있다. ● 동이(東夷) 동이(東夷)는 협의의 동이와 광의의 동이가 있는데 협의의 동이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중국의 동부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등지에 살던 족속으로 중국인들의 조상인 화하족(華夏族=漢族)과는 다른 이민족을 칭하는 말이며, '동쪽에 있는 이(夷) 즉 큰 활(大弓)을 잘 쓰는 족속'이라는 뜻이다. 광의의 동이는 진나라 이후 만주와 한반도에 살고있는 조선족과 숙신과 동호의 후신은 물론 일본, 유구 등지에 살던 족속들을 ‘동쪽 오랑케'라는 뜻으로 비하하여 화하족우위의 사상(中華思想)에 의거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과 같은 맥락으로 동이(東夷)라 하였기 때문에 겨레의 갈래와는 상관이 없는 말이다. * 중국 본토에 남아있던 동이족은 한족에게 동화되었음으로 오랑케의 범주에서 제외 협의의 동이는 옛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중국 땅에서 중국 문화의 일익을 맡았던 족속이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산동반도 일원에서 나타나는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용산문화(龍山文化), 청령강문화(청령강문화) 등의 주인이 동이족이다. 특히 용산문화의 갑골(甲骨)은 만주, 한반도, 일본에까지 분포하고 있어 이 지역에 거주하던 민족의 동질성을 입증하며, 가장 오래된 갑골은 서요하 상류의 것으로 신석기 후기인 3,500년 전의 것이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화하족(華夏族) 또는 한족(漢族)이라 하는데 이들의 서안(西安)지방의 신석기 반파유적은 고대중국의 중심이었던 황하 하류 하남성과는 거리가 먼 섬서성 지역이며, 주나라의 발생지 또한 이 지역이었음으로 중국 화하족은 중국대륙의 서쪽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한다. 당시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황하하류 산동지역에는 중국의 화하족과 구별되는 동이족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중국의 설화나 고대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여와(女와), 황제(黃帝) 또는 소호(韶濩), 전욱(전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 등 소위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하(夏)나라에서 은(殷), 주(周), 진(秦), 한(漢)까지 이어지는 가운데 복희(伏羲), 신농(神農), 소호(韶濩), 순(舜)은 동이족 사람이며, 은(殷)나라는 동이족이 중심이 되었던 나라로 일려지고 나머지는 화하족(華夏族: 漢族) 또는 그들이 중심이되어 이룬 나라들이다. 특히 은(殷)나라의 갑골문(胛骨文)은 한자(漢字)의 기원으로 여겨져 중요시되는데 이는 그 근원이 대문구문화의 토기에 새겨진 그림문자까지 소급되고, 최근 용산문화에서도 이 문자가 나와서 대문구문화 → 용산문화 →은나라 갑골문으로 이어져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이족은 중국사람들에게 시대와 그 분파에 따라 우이, 견이, 풍이, 황이, 방이, 구이, 견이, 백이, 적이, 형이, 양이, 서이, 회이, 사이, 내이, 동이, 개이, 도근 등으로 불리고 있다 시대별로 동이족의 활약상을 정리해 보면 아래 표와 같다.
동이족의 활약상 시 대 동이족의 활동상 삼 황 오 제
三 皇 五 帝복희 (伏羲)복희(伏羲) - 역사에 나타나는 동이족의 최초의 인물, - 팔괘를 만들고, 그물뜨기와 고기잡이, 짐승 기르기, 35줄의 비파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신농 (神農)신농(神農) - 농사짓는 법과 약초를 찾아내고, 5줄의 비파를 만들고, 시장을 열었다.
- 춘추전국시대 강태공이 그의 후손이다 황제 (黃帝)치우(蚩尤) - 한족이 시조로 받드는 황제(黃帝)가 가장 두려워했던 군장으로 구이(九夷), 구여(九黎)의 임금, 친형제가 8명, 일가 형제가 73명이었다. - 지금 중국에 있는 묘족(苗族)이 그의 후손, 묘족은 한족보다 먼저 중국에 들어왔으나 후일 한족에게 쫓겨났다. - 요(堯) 때는 그의 신하 회중을 우이(隅夷)의 땅 양곡(陽谷)에 살게 하였는데 '양곡'이란 '해가 뜨는 곳'이란 뜻으로 '조선(朝鮮)'과 같은 의미이며 지금의 산동지방으로 동이족의 활동지역을 말한다. 하 (夏)태강임금 - 동이족이 반(叛)하기 시작 상임금 - 견이, 풍이, 황이, 우이와 싸움 소강임금 - 방이와 싸움 분,망임금 - 구이와 싸움 설임금 - 견이, 백이, 적이, 형이, 풍이. 양이와 싸움 은 (殷) 중정임금 - 남이가 침공 무을임금 - 정치가 쇠망하자 동이가 번성하여 회하(淮河)와 태산(泰山)지방인 강소성과 안휘성으로 옮겨와 점점 중토(中土)에 살게됨.
시 대동이족의 활동상 주
(周) 초기 - 은나라 후손인 관숙과 채숙이 동이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이 이들을 물리쳤다. - 청주에 우이가 있었는데 그들이 산 지역은 동주로 현재의 봉래이며, 내이(萊夷)는 내주(萊州)에 있었는데 제나라의 땅으로 내이의 제후와 내이인이 살았다. - 내이는 목축으로 생활하였으며 산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길러 비단을 짰다. 이 곳의 명주실은 특히 질기기 때문에 거문고와 비파의 줄을 만들었다. 중국의 비단이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산동의 명주가 제일 좋다고 한다. 이것으로 중국의 비단은 동이족으로부터 기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임금 - 숙신이 처 들어 왔다.
- 서이(徐夷)가 구이(九夷)와 손잡고 주나라를 물리쳐 서쪽 황하 상류까지 이르렀다. 목임금 - 불꽃같이 일어나는 동이를 겁내어 동방 황지에 있는 주나라 땅 500리를 나누어 동이족인 서언왕에게 맡겼다. 서언왕은 인(仁)과 의(義)를 행하였으므로 56개 나라가 굴복하여 왔다. 여임금 - 주의 정치가 무도하므로 회의(淮夷)가 침공해 왔다. 유임금 - 음란하여 사이(四夷)가 침입해 왔다. 제환공 - 사이(四夷)가 산동성의 낭야로 올라가 여러 하(夏)를 무찌르고 또 여러 작은 나라를 멸망시켰다. - 재상 관중(管中)은 내이(萊夷) 사람이다. - 기주와 양주에 도이(島夷), 서주에 회이(淮夷)와 서이(徐夷), 제에게 멸망당한 개이, 노(魯)에게 멸망 당한 도근이 있었다. 진
(秦) 진시황 - 6국을 정복해 통일한 뒤에는 회의, 서이가 모두 흩어져 일반백성이 되었다.
● 숙신(肅愼) 숙신족(肅愼族)은 한나라 이전의 전기숙신과 한나라 이후의 후기숙신으로 구분된다. 전기숙신은 중원 북계 및 남만주지역의 주민들을 말하는데 그 분포지역이 부여, 고구려 이전의 고조선과 대부분 겹치면서 조선과 숙신이 함께 나오는 기록이 없기 대문에 숙신이 조선이 되었울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요서지방의 하가점문화(夏家店文化)나 길림지방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가 전기숙신의 문화로 본다.' 후기 숙신은 시대에 따라 그 명칭을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만주족(滿洲族)으로 불리며, 읍루는 부여(夫餘)에, 말갈은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에 복속되었고, 발해 멸망 이후 여진족은 금(金)나라를 세워 북중국을 쳐들어갔으며, 후금(後金)을 세워 중원을 차지하여 청(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숙신족의 후신인 만주족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만주지역 일대에 살고 있지만 한족에 동화되어 역사와 언어마저도 잃어버렸다. ' 그들이 지은「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라는 책에는 숙신 →읍루 →말갈 →발해 →여진 →만주족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는 제외하는 반면 발해를 포함시키고 있다. 현재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일부 남한의 학자들이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만주의 귀속권을 둘러 싼 국가이익 때문이다. 일제는 만주를 차지하기 위하여 만주의 역사를 우리나라 역사에서 분리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고, 중국은 현재 만주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를 당나라에 귀속된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의 실학자 한치윤은 "김부식이「삼국사기(三國史記)」에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말갈, 여진족, 만주족이 우리겨레의 한 갈래였음을 망각하게 되어 만주의 역사를 잃게 되었다."고 하였다. 종합하면 전기 숙신은 고조선의 한 종족이었고, 후기 숙신의 읍루, 물길, 말갈은 부여, 고구려, 발해에 이르는 약 1천년간을 우리 민족의 일부로서 같은 정치권을 형성했으나 발해 멸망 이후 고려와 조선의 정치세력이 만주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틈에 고구려, 발해 국민의 조선족과 함께 만주족이 되어 다른 정치권을 형성한 우리 겨레의 한 가지인 것이다.
●동호(東胡) 동호(東胡)는 중국 전한(前漢) 때 북쪽 흉노족의 동쪽에 살다가 흉노에게 멸망하여 선비(鮮卑)와 오환(오환)으로 갈라진 족속이다. 흉노족(匈奴族)은 한고조(漢高祖)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한무제(漢武帝) 이전까지 한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을 만큼 강국이었는데 동호족은 한때 이 흉노에게 천리마, 왕 선우의 부인 알씨 그리고 영토의 할애를 요구할 정도로 강국인 때도 있었다. 흉노가 한무제에게 패하여 달아난 후 대흥안령에서 남하한 동호의 한 갈래인 선비가 흉노를 대신하여 중국 북쪽을 석권하였다. 선비의 단석괴가 죽은 후에 선비는 모용, 탁발, 우문, 독발, 걸복, 단, 토욕혼, 거란, 해 등으로 갈라져 북중국을 차지하여 중국의 오호16국과 남북조, 남송시대에 중국을 위협하였다. 동호는 서요하 상류지역에 살던 족속으로 고구려의 전신인 고리국(藁離國)을 세운 주체로서 부여, 고구려족의 원류인 맥족(貊族)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재 동호는 중국인화 하여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서요하부근의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에 나오는 비파형동검문화를 고조선과는 전혀 다른 중국의 소수민족인 동호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서북에는 흉노의 도의문화, 서남은 한족의 양날과 손잡이가 같이 붙어있는 칼문화, 동쪽은 고조선의 비파형동검문화가 있어 이들 세 문화가 뚜렷이 구분되며, 오히려 고조선의 문화가 서쪽으로는 하북성의 북경, 당산지역, 북쪽으로는 대능하 상류까지 영향을 미치며, 한무제 이전에는 한족이 결코 만리장성을 넘지 못한 것이 사실로 입증되는 만큼 이 지역이 고조선의 영역으로 우리 겨레의 터전이었음이 분명하다. 한족이 서요하 부근으로 진출한 것은 한무제의 위만조선(衛滿朝鮮) 정벌 이후이며 후일 고구려가 한나라에게 빼앗긴 이 지역에 대하여 '다물(多勿)'의 기치아래 다시 수복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서요하 부근에 살던 동호는 한(漢族)족에 속하는 소수민족이 아니라 고조선을 형성했던 우리 겨레의 한 갈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 겨레의 기원을 예(濊), 맥(貊), 한(韓)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겨레의 갈레로 체계화되지 않은 막연한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중국사람들의 역사기록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우리겨레의 기원을 발해연안을 축으로 이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문화를 일구었던 이들 동이(東夷), 숙신(肅愼), 동호(東胡), 기타 여러 종족들로 보고, 이들이 우리겨레의 문화권을 형성한 주체로 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한국고대사연구소 오순제 소장의 주장이다. 실로 강대하였던 동이족
우리 민족사를 자주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자면 자연히 대외관계사에 역점을 주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하는 민족사는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많이 받은 비자주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식민주의 사관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인색해야 한다는 것은 식민주의 사관의 영향을 극복하는 첩경이 된다. 동이족은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포함한 그들의 동쪽에 존재했던 외민족을 총칭해서 부른 명칭이다. 중국인들은 자기 민족 이외의 민족을 모두 오랑캐라고 하였는데 동쪽에 있는 민족들을 동이, 서쪽을 서융, 북쪽을 북적, 남쪽을 남만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책에 이들 주변 민족에 관한 기록을 남기면서 동이족에 대해서는 동이전을 그들의 역대왕조 역사의 끝에 써 놓았다. 우리 민족은 중국인들의 역사책에 조선족으로 직접 명시된 경우도 있고, 동이족에 포함시켜 언급된 경우도 있다. 그 동이족에 관한 초기의 역사를 살펴보고 그들이 중국 민족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나를 더듬어 보자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동이족은 이미 은(기원전 2000년경∼1122년) 왕조 때에 중국 민족과 관계를 맺었던 것 간다. 은나라 때의 갑골 문자에 그런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갑골 문자는 당시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해 점을 칠 때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왕조가 동이족을 두고 하늘의 뜻을 물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은왕조가 동이를 두고 왜 하늘의 뜻을 물어야 했을까? 그것은 외교 관계 혹은 전쟁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이족은 은나라 때 그들의 주변에서 외교 혹은 전쟁의 대상이 되었을 정도로 강력한 민족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중국측 문헌에서 순 임금이 동이 계통이었다는 점을 말해 주는 기록도 다 같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은 왕조를 이어 중원의 주인공이 된 주왕조(기원전 1122∼221년)때에 이르면 동이족의 활동이 더욱 돋보인다. 이 무렵 동이족은 중국 땅의 동쪽 해안 지대의 광범한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발해만을 끼고 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로 뻗은 지역은 물론이고, 산동반도에서 회수를 거쳐 양자강에 이르는 지역에도 퍼져 살았다. 그때에 오늘날의 하남성 지역을 중심부로 하고 있던 주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는데, 동이족은 동진하고 있던 주나라의 세력과 때로는 대결하게 되었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지 얼마 안 된 주나라 초기에 은나라의 구세력이 근거가 되어 소위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그 삼감의 난을 지원한 세력 중에는 동이족이 있었다. 동이족이 주나라에 대하여 적대적인 투쟁을 벌인 것은 이 때만이 아니었다. 주 무왕을 도와 은 왕조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강태공이 오늘날의 산동반도의 제나라를 봉지로 받고, 그곳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강태공의 군대는 '상'이라는 땅에서 동이족을 만나 이들과 거의 1년 반 동안 싸워 정복한 뒤에야 제나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것은 동이족이 당시 중원 땅의 주인공인 주나라에 필적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 주공(무왕의 동생으로 조카 성왕을 보필하여 주나라 초기의 문물 제도를 갖추기에 노력한 현신.)이 봉지로 받은 노나라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노나라에 있던 동이족의 반발이 조직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중앙에 있던 주공은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백금을 그곳에 파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럴 정도로 노나라에서도 동이족의 세력이 강대했던 것이다. 우리는 다시 기원전 8세기경의 서언왕이라는 존재를 발견한다. 그는 서이계통의 동이족으로서 회수와 양자강 사이에서 일대 세력을 형성하여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주나라의 목왕으로부터는 무마용으로 영토를 베어 받기도 하였다. 그는 알에서 깨어나 장성하여 활을 잘쏘아 백발 백중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고구려 시조 주몽의 설화에서 보여 주는 바와 흡사하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에 자리잡았던 동이족과 만주·한반도로 이주한 동이족 사이의 근친성을 엿볼 수 있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동이족이 원래 중국 서북 지역에서 동북 지역으로 이동 할 때 일부는 중국의 동쪽 해안 지방으로, 일부는 요서·만주·한반도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근친성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중국과 만주·한반도의 동이족의 근친성과 관련해 산동성 가상현에 있는 무씨사당의 벽화가 만주·한반도에서 보이는 단군 신화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지적과 또 중국의 내지에는 잘 보이지 않는 지석묘가 중국의 동해안 지대에서 산동반도·발해만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연결된다는 지적 등도 음미해 볼 만한 것이다. 앞서 말한 서언왕은 그 후 양자강 주변의 오나라 등의 압박을 받아 그 세력이 미약해졌다고 한다. 중국에 있던 동이족의 세력이 위축되는 때는 전국 시대(기원전5∼3세기)무렵인데 이 때 중국 민족이 제자 백가의 사상과 철기 문명을 난숙하게 발전시켰음에 비해 동이족은 청동기 문명을 벗어나 철기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에 지체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즉 중국의 철기 문명 앞에 동이족의 청동기 문명의 정복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거기에다 전국 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중국안에 있는 이 질적인 소수 민족을 중국민족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결과 대부분의 중국 안의 동이족은 중국 민족에 분산·편입되어 주체성을 상실케 되었고, 만주·한번도 지역의 동이족만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 안의 동이족의 일부는 중국 민족에 정복·동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요서·요동 지역으로 망명하게 되었는데, 이 점과 관련시켜 기자가 동쪽으로 망명했다는 주장(기자 동래설)고 위만이 동쪽으로 망명하여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도 있다. 우리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이 오랜 옛날부터 중국 민족에 필적하는 민족이었음을 찾으려는 노력이 더욱 광범하게 경주되어야 한다는 것과 당시 동이족의 역사 전개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우리 민족의 위상을 재검토해 보는 슬기도 필요한 것이라고 다짐해 본다.
우리는 동이족이 아니라 동철족이다
夷는 ''오랑캐 이'가 아니라 '쇠 철' 자이다
언어정복 시리즈 제 1권에서 夷이 鐵(쇠 철)의 옛글자이며, 따라서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東夷族은 동이족이 아니라 동철족으로 읽어야 한다고 발표한 이후 최일선 초급장교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한민족의 웅장했던 역사가 왜곡된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한다." (장만휘 소위)
"이 사실을 통해 과거 한반도 뿐 아니라 만주지방 그 이상으로 한민족의 세력을 느낄 수 있었다." (김우영 소위)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이며, 민족의 기상은 하늘로 치솟을 것이다." (서명신 소위)
"夷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위대함을 알 수 있었다. 시급히 소대원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일깨워주어야겠다." (이호경 소위)
"힘든 IMF를 겪고 있는 일반 국민들에게 이러한 사실이 전파되면 정신적으로 큰 활력소가 될 것이다." (정창희 소위)
이와 같은 젊은 장교들의 반응은 과거 강성했던 大고구려의 힘과 기백을 느끼게 해주었고,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漢族에 의해 그 음 및 의미가 왜곡되어 민족정기의 약화 원인 중 하나가 된 夷(쇠 철)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夷의 해석에 대한 제 1차적 오류는 大대에서 발생한다.
夷은 大(큰 대)와 弓(활 궁)으로 이루어져, 단순히 생각할 때 '큰 활'로 인식되기 쉬운 글자이다. 그렇다면 과연 夷은 큰 활일까? 다음 그림을 보기로 하자.
활쏘는 헤라클레스 고구려벽화 '수렵도' 중에서
하나는 현대 洋弓양궁과 거의 흡사한 서양활의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貊弓맥궁의 모습이다. 보는 바와 같이 양궁에 비해 맥궁은 그 크기가 월등히 작다. 그 누가 보아도 맥궁[일명 '각궁']은 大弓이 아니라 小弓이며 長弓이 아니라 短弓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 활이 작은 활이라는 사실은,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동방문자 夷을 큰 활로 풀이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입증하는 물적 자료가 된다.
많은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활이 멀대 같이 크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고. 큰 활은 무게가 많이 나가 거추장스러울뿐더러 쏘는데 힘이 많이 드는 반면, 소형 활은 가볍기 때문에 휴대하기 편하고 신속한 사격자세가 가능하다.
앞 벽화그림의 고구려 기마무사가 헤라클레스(Hercules)의 활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뒤로 틀어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민첩한 행동이 가능할까? 헤라클레스조차도 활시위를 당기는 것이 몹시 힘이 드는지 다리를 바위벽에 잔뜩 버티고 있는데...
하지만 일반적으로 소궁은 대궁에 비해 화살이 멀리 나가지 못한다는 취약점이 있다. 그래서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활을 180도 이상 역으로 완전히 구부림으로써 성능을 극대화시킨 탄력 최대의 逆弓역궁을 고안하는데 성공한다. 이 활의 발명 및 초강력 화살촉으로 인해 고구려는 아시아를 제패하고, 고구려의 일부족인 훈족(일명 견철족)은 유럽대륙을 정복·유린하였으며, 고구려의 후예 징기스칸은 유라시아 대륙에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다른 민족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전통활 역궁은 小弓소궁이기 때문에, 夷에서의 大대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안된다. 즉, 본서 제 1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夷은 활[弓궁] 시위를 최대한[大대] 힘껏 당긴 모양을 표현한 글자로 夷에서의 大대는 最大限최대한의 줄임말이다.
활[弓]을 힘껏[大] 당겼을 때의 모양은, 적을 단번에 멸망시키고 평정시킬 것 같은 굳세고 강대한 모양이다. 그래서 '夷'은 이러한 모양에서 '강한'과 '평정'을 그 핵심의미로 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强강 → ① (강한) 강철(=鐵떨·철) → 강철[쇠]족, 강철국[쇠나라] cf. 떨어버리다 → 정복 → 평정 ② 강대한[大] → 큰, 성대한 ▣平定평정 → ③ 平 → 평평한, 평이(平易평이→易쉬울 이), 평탄, 평온 → 편안한 → 온화한[仁어질 인] ④ 평정하다·다스리다 → 멸하다, 죽이다 → (발본색원하다 = 뿌리를 뽑다) → ⑤ 뿌리·근본[뿌리 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夷의 제 1 의미는 '강철[쇠]'이며 그 원음 또한 철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개음화현상에 따라 철로 변음된 夷의 고음은 텰[tyoul] 또는 경음 ㅅ뎔[styoul]이다.
명사 신이 동사 신다를 낳고, 품이 품다를 낳았듯이, 명사 텰 및 뗠은 털 및 떨로 단모음화된 다음 동사 털다와 떨다(떨다; 덜덜)를 낳았는데, 이 털다·떨다의 의미 또한 夷철과 깊은 관련이 있다.
夷(쇠 텰)의 동사형 텰다는 털다 및 떨다로 변했고, 떨다는 떨어내다로 발전하였는데, 먼지 따위를 떨어버리다는 다른 말로 '평정하다'를 의미한다.
평정은 곧 '쓸다·쓸어버리다'며, '쓸다'는 동방문자 掃(쓸 소)의 훈으로, 掃의 자음 소는 '鐵(쇠 철)'할 때의 쇠와 관련이 있다. 단단한 쇠와 힘센 소의 또다른 음 쇠(예: 소고기=쇠고기)는 동원어로, 그 어원은 掃(쓸 소)인 것으로 판단된다.
Conan, the Barbarian 중에서 치우벽화(쇠뿔투구를 쓰고 있음; 중앙일보)
Conan, the Barbarian 중에서
그리고 夷의 고음 떨(떨)은 '벌벌 떨다', 즉 위 그림에서와 같은 쇠뿔 투구를 쓰고 고대의 유럽대륙에 나타난 훈족 무사들을 피해 벌벌 떨며 민족 대이동을 한 백인들을 연상시킨다.
쇠뿔 투구가 등장하는 서양 영화, 예를 들어 코난 시리즈나 바이킹이 나오는 영화 등은 아직까지도 서양인들의 머리 속에 그 옛날 유럽대륙을 유린했던 훈족[=夷] 등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훈족은 독일어로 Hunnen으로 표현되며, 여기에 형용사어미 isch가 덧붙은 hunnisch는 '훈족과 같은'에서 나아가 '야만적인'의 뜻으로 쓰이고 있으니 고대에 자신들을 지배했던 훈족에 대한 유럽인들의 시각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6세기 유럽사의 한 기록에는 훈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아시아의 초원에서 온 그들은 유럽을 공포로 떨게 했다. 그들의 가슴속엔 짐승의 심장이 뛰고 있었고 옛날부터 누구도 그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영어 barbarian은 독일어 hunnisch와 상통하는 말로 '야만인'이자 '오랑캐'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유럽 백인들의 말대로 훈족은 야만적이고 미개한 바바리안[오랑캐]이었을까?
최근 프랑스에서 발견된 한 훈족 족장 무덤에서 순금으로 되어 있는 귀걸이와 검의 손잡이, 그리고 철제로 되어있는 허리띠 장식과 무기가 발굴되자, 지금껏 훈족을 야만인이라고 불러왔던 로마인들은 크게 당황했고 자신들의 편견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어정복 시리즈 제 1권 '고인돌과 dolmen' 편에서 언급한 프랑스 까르냑 지방의 dolmen은, 프랑스 역사와 dolmen이라는 용어, 그리고 프랑스에서 발견된 부장품이 들어있는 한 훈족 족장의 묘지를 고려해볼 때 고대 東夷族長동철족장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짙다.
이처럼 유럽인들이 고등문화민족인 훈족을 감정적으로 야만인이라고 지칭했듯이, 중국 漢族 또한 우리 민족을 비하하여 '오랑캐'라는 경멸적 용어를 사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시해버려야 할 욕설을 귀담아 듣고 우리가 우리 후손들을 교육하는 책에, 우리민족을 지칭하는 夷철을 '오랑캐 이'라고 기재하고 있으니, 이는 '누워서 침 뱉는' 격이 아닐 수 없다.
夷을 '쇠 철'이라고 해도 부족할 판에, 맨 앞부분에 떡하니 '오랑캐 이'라고 기록·교육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스스로 무지하고 미개한 종족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꼴이다.
동해와 독도를 일본인들이 어떤 음모 하에 일본해·다께시마라고 부르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들을 따라서 그렇게 부르지 않음은 상식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이 자기들을 '되놈'이라고 하지 않듯이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오랑캐'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비록 일본제국주의의 음모하에 제작된 '황국신민학교'의 준말인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지만, '오랑캐'라는 의미가 강조된 이 '동이족'이란 말은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우리의 입에서, 우리의 서적에서, 우리의 강토에서 사라져야 한다.
한편, 전쟁의 신이라 불리우는 치우천자는 고조선 이전 九黎구려시대 쇠뿔 투구와 철가면, 철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오늘날 중국인들이 자기네 시조라고 일컫는 헌원씨를 맞아 백전백승하였다. 그때부터 漢族들은 우리를 東夷族동철족이라 불렀으니, 동철족[夷]이란 중국대륙 동부의 강철족의 줄임이다.
夷의 본음 철이 이로 바뀐 연유 및 과정
그런데 이처럼 '쇠 철'을 의미하는 夷이 음·뜻 면에서 완전히 다른 '오랑캐 이'로 둔갑된 이면에는 문자를 이용하여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인들의 간교한 음모가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夷철은 쇠에서 나아가 '쇠(고대의 초강력 무기)→정복→평정→平易평이(쉬움)'의 뜻도 나타낸다. 즉, '쉽다'라는 면에서 夷철과 易이는 동의어이기 때문에, 표음문자가 없었던 고대 동양에서는 易이를 쓸 자리에 夷철을 대신 쓰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를 일러 假借法가차법이라 하는데, 청대의 단옥재 역시 이 사실을 알고 허신의『설문해자』를 주해하는 과정에서 "夷卽易之假借也.(夷은 곧 易의 假借이다)"라고 분명히 지적하였다.
그런데 이 가차에서 오해와 음모가 싹트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동방문자는 소리문자가 아니기 때문에 소리 면에서 매우 취약한 허점을 안고 있다. 즉,「夷卽易之假借也」과 같은 식으로 써놓으면 읽는 이들은 이 문장에서 夷의 음가가 '철'인지 '이'인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된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漢族 술사들은 夷의 2차적 의미인 '쉽다[평이]'를 이용하여, 그 의미와 같은 다른 글자, 즉 동의어인 易(쉬울 이)를 이용, 夷의 음을 易와 같은 이로 부르게 함으로써, 막강 동철족을 야만 동이족으로 비하·약화시킨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렇게 문자의 속성을 파악, 전술로 이용한 漢族의 의도 하에, 易(평이할 이)자를 쓸 자리에 夷(쇠/평이할 철)자를 대신 쓰는 일이 빈번해지자,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夷=易이'의 관념이 고정되고 급기야는 夷철을 易처럼 이로 읽는 경향 및 빈도가 압도적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문자를 이용한 漢族의 전형적인 역사왜곡방법이다.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고 세월은 무수히 흘러, 진실을 아는 자는 거의 멸종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의지에 따라 편찬된『동국정운』을 포함한 각종 옥편 등에 夷의 본음 철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夷이 본래 '쇠 철'이라는 사실은 적어도 조선 이전에 잊혀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필귀정이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몇백년 뒤라도 결국엔 사실로 드러나듯이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 법이다. 완전히 사라지고 잊혀진 것으로 여겨졌던 夷의 본음 철의 고음 텰, 뗠, 뎔 등이 여기저기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대륙 제1위의 정사로 인정받고 있는『史記사기』권2-5에서의 ' 古夷字也( 철은 옛날에는 夷자의 자형으로 쓰였다)'라는 문구와, 중국대륙 제2위의 정사라고 하는『漢書한서』권28에서의 '夷通借作 (夷은 철자와 상통하며 자로 대신 쓰이기도 한다)'라는 문구, 그리고 각종 옥편 및 허신의『설문해자』에 실려있는 은 鐵철의 옛글자'라는 문구가 바로 그 결정적 증거이다.
이 문구들을 종합하여 알기 쉽게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夷 → → 鐵 즉 夷는 鐵(쇠 철)의 옛글자이다."
......중략......
그렇다면 사기 등에 나오는 이러한 문구 외에, 夷의 본음이 텰(뗠·뎔)이었음을 입증하는 중국측의 기록을 더 찾을 수는 없을까?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夷(오랑캐 이)'라고 하는 언어적 덫에서 완전히 풀려나 최강 동철족의 후예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동방문자는 본래 소리를 위주로 한 글자가 아니기 때문에, 남송(南宋)의 鄭樵정초(1104∼62)가 그의 저서『통지·육서략(六書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반 중국인들은 문장을 보고 소리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데 괴로움을 느낀다.
이러한 음운문맹 중국인들에게 바른 음운학을 전파해준 사람들은 인도의 승려들과 같이 대부분 서방에서 온 자들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스웨덴의 언어학자 Bernhard Karlgren(高本漢: 1889~1978)을 들 수 있다.
그는 중국 각지의 방언을 조사하여 그 자료를 토대로 동방문자에 대한 上古漢音상고한음·中古漢音중고한음을 비교언어학적 방법으로 재구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가 재구한 '夷'의 상고한음(B.C. 700년경)은 놀랍게도 이[i]가 아닌 di?r로 철(鐵)의 우리 고대음 dj?l과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도 있다. 상고한음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 중국의 董同화동동화가 재구한 '夷'의 상고한음은 died으로 그것은 '夷'의 우리 고음 dyoul과 완벽히 대응한다.(☞香港中文大學 출판 '漢字古今音彙(1973)' p.57 참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말에서 종성이 ㄹ[l]로 발음되는 문자 대부분은 고대중국어에서는 ㄷ[d·t]으로 나타나니, '夷'의 상고한음 died은 '夷'자가 고대에는 '텰·뎔'로 발음되었다는 명약관화한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오랑캐족이 아니라 '강철족'이라는 강력한 증빙자료인 이상의 사항들을 요약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내 용출 처 古夷字也( 은 옛날에는 夷자의 자형으로 쓰였다) 『史記』권2-5 夷通借作 (夷은 과 상통하며 자로 대신 쓰이기도 한다)『漢書』권28 古文鐵( 은 鐵의 옛글자) 『설문해자』 夷의 上古漢音은 di?r Bernhard Karlgren 夷의 上古漢音은 died 중국의 董同화
본래 夷(쇠 철)자가 漢族에 의해 '오랑캐 이'로 왜곡되었음을 밝히는 증거들이 이처럼 漢族의 제1사서『사기』및 漢族학자의 연구결과에 의해 속속 드러나고 있음은 매우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증거를 토대로 우리는 '철족(The Steel Tribe)'임을 깨닫고 우리의 정기를 세계 만방에 떨치는 일일 것이다......(중략)......
- 언어정복 제 4권 중에서
<금문신고(金文新攷)>는 신화이었던 단군과 3황5제를 역사로 끌어내... 금서 <금문신고(金文新攷)>를 통해 본 4500년 한·중 상고사 이 책은 중국이 신화로 간주하고 있는 4500년 전의 시대를 역사의 시대로 증명한 낙빈기의 <금문신고>를 재해석한 것이다. 4500년 전 그림 글자가 밝히는 동이족과 한족의 역사, 그리고 새롭게 제기되는 우리의 고대사와 문자의 비밀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동양 역사의 첫 장을 연 인물이 동이족의 수장 '신농'이라는 사실, 또 문자는 황제의 명을 받고 창힐이 만들었다는 중국 내 통설을 뒤집고 신농이 처음 만들었다는 사실, 또 암호같은 금문이 <문무대왕비문> 해석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 등은 우리 고대사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김대성 엮음 | 328면 | 서문 1,2쪽
중국인의 역사 뒤집기-지나에서 중화까지- 본 기고문의 전편이라 할 수 있는 "오랑캐 이? 큰 활든 사람 이!"를 통해 동이족의 "夷"가 결코 야만적인 오랑캐가 아니라, "어질고 활 잘 쏘며, 순리를 따르는 큰 사람들"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언제부터 "중국(中國)"이라 불려졌을까요? 원래 우리 조상들은 중국사람들을 지나족(支那族)이라 불렀습니다. 이때의 지나는 변방을 뜻하는 말인데, 원래는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사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란 뜻이었습니다. 즉 신선도로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동이족들이 발전하고 있을 때, 변두리인 화산(華山)지역에 야만적인 무리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을 지나족이라 불렀다는 것이지요. 또 서쪽지방의 토착종족이라 하여 서토(西土)족. 혹은 황토인(黃土人), 또 화산(華山)지역에 산다하여 화하(華夏)족이라고도 했습니다. 중국의 영문호칭인 China도 원래는 변방이라는 뜻인 지나(支那)에서 나왔다지요. (실제로 현재에도 남지나해. 동지나해 등이 South China Sea. East China Sea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그 지나(중국)인들이 숭배하는 고대 성인에 태호 복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나 역사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지만, 우리의 상고사에서 그분의 "호적등본"은 아주 명확합니다. 즉 배달국 5대 태우의 한웅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이며 동시에 아주 지혜로운 선인(仙人)이었다고 하지요. 바로 그 복희씨가 아버지인 태우의 한웅천황의 명을 받아, 원시적 생활을 하고 있던 지나족들에게 신시(神市)의 문화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동생인 여와씨 그리고 염제 신농씨가 그 뒤를 이어 그 지역을 다스렸는데, 신시에서 건너간 세 명의 신선들인 복희씨-여와씨-신농씨를 훗날 지나인들은 삼황(三皇)이라 불렀지요. 복희씨 이후 삼황오제 시대를 거치는 동안 욕심 많은 지나인들은 신시문화를 부러워하며, 전수 받은 문화를 발판으로 급 성장하여 힘을 키워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배달국 말기가 되자, 그 동안 파견된 관리의 자손들 중에서 반역하는 무리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시발점은 바로 황제라 자칭하며 배달국 14대 치우천황(기원전 2707~2598)에게 도전했던 공손헌원입니다. 배달국의 신하인 공손의 후손인 그는 야만적이지만 숫적으로 우세한 지나인(黃土인)들의 우두머리가 되자 스스로를 황제(黃帝)라 불렀습니다. 바로 그 황제헌원(기원전 .2692~2592)이 오늘날 중국인의 조상으로 받들여지는 인물이며, 동이족 출신인 황제 헌원으로부터 전욱-제곡-요임금-순임금을 오제(五帝)라고 부릅니다. 역시 동이족 출신인 요임금(기원전 2357~2258)과 순임금(기원전2233~2183)이 다스리던 요순시대는 우리의 역사로는 단군조선 초기에 해당하지요. 그 뒤를 우가 왕이 되어(우임금) 다스리며 하나라(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음) 왕조를 열었고, 은나라(동이족의 나라)-주나라(은나라의 문화와 유민들을 계승한 나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신시에서 분가해 나간 동이족들의 통치 아래 지나인들이 급성장해 갈 때, 정통의 동이족들은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되면서 점차 나태해지고 해이해졌으며, 신성(神性)을 잃어갔습니다. 결국 마지막 47대 고열가 단군 때에 이르러 7천년 역사의 신선도를 폐관하고 단군조선은 스스로 문을 닫았습니다.(기원전 238년) 그리고 동이족들은 애석하게도 수많은 나라들로 쪼개지고 분열되는 열국(烈國)시대를 거치면서 힘을 잃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동이족과 지나족의 역전과정을 박영규님은 "신 고구려 본기"에서 이렇게 설명하였지요 ........이러한 특성을 가진 동이족은 견(甄). 우(于). 방(方). 황(黃). 백(白). 적(赤). 현(玄). 풍(風). 양이(陽夷)의 구이(九夷)로 분류되는데, 동이족은 단군조선의 멸망 이후 지나족의 활동 영역이 동쪽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중원에서 밀려나와 중국대륙의 동해(황해)안과 북방에 밀집된다. 지나족에 의해 동쪽과 북쪽으로 밀려난 동이족은 한(韓)과 예맥(濊貊)으로 불려지게 된다. 주로 발해만을 기점으로 황하의 동북 방향에 머무르던 사람들은 예맥족을 형성했으며, 중국의 동해(황해)연안과 한반도 및 그 주변 지역, 일본열도 등에 머무르던 사람들은 한(韓)을 형성하였다. 고구려는 예맥이 중심이 되어 점차 한(韓)과 주변부족들을 흡수하는 형태를 거쳐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지나족들은 진나라 때 최초로 중원을 통일하였고(진시황: 기원전 221년), 漢나라(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때 그 세력을 공고히 하였으며, 고구려, 백제의 멸망 이후 당, 송, 명나라를 거치면서 확실한 대국이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이렇듯 우리의 알려지지 않은 상상고사인 고대한국과 배달국 시대에는 당연히 지금의 중국이라 불리는 나라가 아예 없었습니다. 물론 한족(漢族)이라는 민족도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중국(中國)"이라는 호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 한민족에게는 비통한 일이지만 동이족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이름입니다. 즉 지나인들이 진나라. 한나라를 거치면서 동이족과의 세력이 역전되며 강성해지자 중심에 있는 나라다 하여 가운데 중(中)자를 붙여 중국이라 자칭하게 됩니다. 그 후에는 스스로를 중화(中華)라고 격상시켰으며, "군자국의 활 잘 쏘는 큰 사람들"인 동이족은 오랑캐로 몰아버렸지요. 그리고 동이족의 후예들은 지나인들이 "우리는 대 중화(大 中華)요, 너희는 소 중화(小 中華)"라고 한 마디 해주면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지경(이조시대)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단군조선의 멸망 이후 동이족의 세력이 급속도로 약해지고, 지나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제는 가운데(중앙에) 있는 나라다 하여 그들 스스로 격상시켜 붙인 이름이 바로 중국(中國)입니다. 결국 지나에서 중국이 나왔고, 중국에서 중화가 나온 것이지요. 중국의 역사가 황제헌원 이래로 발전의 역사였다면, 단군조선 이래 지금까지 우리는 통한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온 우리는 자랑스러운 동이족의 부끄러운 후손들이었습니다. 시베리아 하늘에 일신(一神)이 있어 홀로 천계에 살면서 國人을 지도하고 국민에게 떠받들리어 나타나시니, 안파견(安巴堅)이라 했다. 지금으로부터 9000여 년전, 동이족인 한인씨가 파미르 고원 아래에 한국을 세우고, 후에 그 중심을 바이칼 호 근처로 옮겼다. 이때, 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음식을 익혀 먹었다. 7세를 전하였으나 연대는 알수 없고 이 시기를 한국시대라 한다. 우리 조상은 파내류산(파미르고원)으로부터 사백력(시베리아)으로 옮겨 왔다가 서기전 7000년 경에는 바이칼 호에 이르렀고, 이때부터 갈래가 나뉘어 세계 여러 곳으로 이동해갔다. 동북쪽으로 갈라져 간 일족은 베링 해협을 건너 북미 대륙으로 향했으니, 오늘날 북미 인디언족의 조상이 되었다. 서쪽으로 향했던 일파는 지금의 핀란드 북쪽에 자리잡고 오늘날까지 살아오고 있다. 동쪽 끝까지 향했던 일족은 사할린을 타고 내려와 일본 땅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누족과는 다른 이른바 왜의 일부이다. 서기전 2700년경, 중국 남부 정복에 성공한 치우 천황의 장군 형오는 티베트까지 정복하여 800년간 다스렸다. 서기전 3500년경, 서쪽으로 향했던 수밀이(須密爾)국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자리잡고, '우루'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건설하여 찬란한 수메르 문명을 일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