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

말갈(靺鞨)과 백제, 신라, 낙랑의 위치에 대한 소고

대동이 2007. 6. 12. 18:27
말갈(靺鞨)과 백제, 신라, 낙랑의 위치에 대한 소고
노성매
말갈(靺鞨)과 백제와의 관계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와 신라의 북쪽 경계에는 말갈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갈의 전(남북조시대) 이름은 물길이다.
삼국사기에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
기존 역사서 대로라면, 낙랑은 당연히 백제의 북쪽에…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말갈이 백제의 북쪽 국경선과 맞물려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 온조왕 2년의 기록을 보자.

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에 맞닿아 있다.
그들은 용맹하고 속임수가 많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역시, 북쪽 국경선과 접한 말갈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 백제 의자왕 15년의 기록을 보자.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侵我北界. 沒三十餘城.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리기를,백제와 고구려 말갈이 우리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 신라본기의, 6대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14년의 기록을 보자.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말갈이 북쪽 경계에 크게 쳐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 그런데 수(隋), 당(唐) 시의 지도를 보면, 말갈은 요동 흑수(黑水)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 그리고 각종 정사(正史)에는 고구려의 북쪽에 말갈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자.

★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靺鞨蓋肅愼之地. 中略. 東至於海. 西接突厥. 南界高麗.』

말갈은 숙신의 땅에 있다. 중략.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른다. 서쪽으로는 돌궐과 접해 있다.
남쪽 경계에는 고구려가 있다.

★ 수서(隋書) 말갈(靺鞨)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靺鞨在高麗之北』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 그런데 정작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는 말갈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말갈에 대한 기록】

▼ 1대 온조왕(溫祚王)

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三年秋九月. 靺鞨侵北境.
八年春二月. 靺鞨賊三千 來圍慰禮城
十一年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十三年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 疆境.
十八年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二十二年秋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四十年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釜峴城.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선에 연이어 있는데,
사람들이 용맹스럽고 속임수가 많아..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에 침입했다.
8년 봄 2월. 말갈의 적 3천 명이 위례성을 포위했다.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부수었다.
13년 여름 5월.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땅을 침범하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 역사서에 보면, 낙랑은 평양, 황해도 일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존 역사서 대로라면, 낙랑은 당연히 백제의 북쪽에 있어야할 것이다.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엄습했다. 왕이 병사를 이끌고 칠중하에서 맞아 싸웠다.
22년 가을 9월. 왕이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부현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말갈의 적과 마주쳤다.
한번 싸워 물리쳤다.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했다. 동 11월에 또다시 부현성을 습격했다.


▼ 2대 다루왕(多婁王)

三年冬十月. 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四年秋八月. 古木城昆優與靺鞨戰 大克.
七年秋九月. 靺鞨攻陷馬首城.
二十八年秋八月. 靺鞨侵北鄙
.

3년 겨울 10월. 말갈과 마수산 서쪽에서 싸워 이겼다.
4년 가을 8월. 고목성의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7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성을 공격하여 함락 당했다.
28년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방을 침입했다.

▼ 3대 이루왕(已婁王).

★국사 교과서와 국사대사전에는 기루왕(己婁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원본에 의하면, 기(己)자가 아닌 이(已)자였다.


三十二年 秋七月. 靺鞨入牛谷.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救之.


32년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성에 침입했다.
49년. 신라가 말갈의 침략을 받아, 글을 보내어 병사를 청하므로,
왕은 다섯 장군을 보내어 구원하게 했다.

▼ 5대 초고왕(肖古王)

四十五年冬十月. 靺鞨來攻沙道城. 不克.
四十九年. 襲取靺鞨石門城. 冬十月. 靺鞨以勁騎來侵. 至于述川.


45년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을 침공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49년.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 말갈이 날랜 기병을 이끌고 쳐들어와
술천성까지 이르렀다.

▼ 6대 구수왕(仇首王)

三年秋八月. 靺鞨來圍赤峴城
七年冬十月. 靺鞨寇北邊. 遣兵拒之.
十六年十一月. 靺鞨入牛谷界.


3년 가을 8월. 말갈이 적현성을 포위했다.
7년 겨울 10월. 말갈의 도적이 북쪽 변방에 침입하므로, 병사를 보내어 방어했다.
16년 11월. 말갈이 우곡성 경계에 침입했다.

▼ 8대 고이왕(古爾王)

二十五年春. 靺鞨長羅渴. 獻良馬十匹

25년 봄. 말갈의 추장 나갈이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 16대 진사왕(辰斯王)

三年秋九月. 與靺鞨關彌嶺. 不捷
七年夏四月. 靺鞨攻陷北鄙 赤峴城.


3년 가을 9월. 말갈과 관미령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7년 여름 4월. 말갈이 북쪽 경계의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25대 무령왕(武寧王)

三年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古木城.
六年秋七月.靺鞨來侵. 破古木城.
七年夏五月. 立二柵於古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冬十月. 高句麗將高老.
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戰退之.


3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책을 불사르고, 진격하여 고목성을 공격했다.
6년 가을 7월.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을 쳤다.
7년 여름 5월. 고목성 남쪽에 2개의 성책을 세우고, 장령성을 쌓아 말갈을 방비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모의하여 한성을 치려고 진격하여 횡악 하에 주둔했다.
왕이 병사를 출전시켜 물리쳤다.

▼ 31대 의자왕(義慈王)

十五年 八月. 王與高句麗靺鞨侵攻破新羅三十餘城.

15년 8월. 의자왕은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다.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侵我北界. 沒三十餘城.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리기를,
백제와 고구려 말갈이 우리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말갈(靺鞨)의 침입과 니하(泥河)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와 신라는 존속기간 동안 부단없이 말갈의 침입을 받게 된다.



백제 온조왕(溫祚王) 때의 기록을 보자.



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三年秋九月. 靺鞨侵北境.

八年春二月. 靺鞨賊三千 來圍慰禮城

十一年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十三年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 疆境.

十八年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二十二年秋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四十年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釜峴城.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선에 연이어 있는데,

사람들이 용맹스럽고 속임수가 많아...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에 침입했다.

8년 봄 2월. 말갈의 적 3천 명이 위례성을 포위했다.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부수었다.

13년 여름 5월.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땅을 침범하므로...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엄습했다. 왕이 병사를 이끌고 칠중하에서 맞아 싸웠다.

22년 가을 9월. 왕이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부현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말갈의 적과 마주쳤다. 한번 싸워 물리쳤다.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했다. 동 11월에 또다시 부현성을 습격했다.





다음은 신라 6대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때의 기록이다.



十四年春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拉吏民.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14년 봄 정월. 말갈이 대거 북쪽 경계로 쳐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가을 7월에 또다시 대령책을 습격하고 니하(泥河)를 지났다.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신라가 말갈의 침입을 받았던 니하(泥河), 그리고 백제 초기 도읍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 있던 산서성 안읍과 하현의 북쪽 일대.

안읍(安邑)의 위쪽으로 말갈이 자주 침입했던 신라의 하슬라(명주) 지방이었던 임분(臨汾)이 위치하고 있다.





그럼 말갈(靺鞨)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제곡고신씨(帝 高辛氏)의 장남이 후직(后稷)이다. 후직은 요왕검(堯王儉, B.C.2357년)의 큰 형님이다. 후직에서 뿌리가 내려져 직신(稷愼)이 되며, 직신은 백신(帛愼) 또는 식신(息愼)이라고도 했다. 식신의 후손이 숙신국(肅愼國)을 세운다. 숙신국은 일명 주신(珠申)이라고도 불렀다. 주신은 만주라는 주자와 음이 같고, 신(愼)은 신(申)자와 같으므로, 만주에 숙신이 거대한 강역을 갖고 있었다고 하여 별칭으로 후일에 주신(珠申)이라는 말이 생겼다. 주신은 별칭일 뿐 나라이름은 아니다.

숙신의 뒤를 이은 것이 읍누( 婁)이다. 또한 숙신의 뿌리는 부여(扶餘)로도 갈라지게 된다.

읍누 다음이 물길(勿吉)이며, 흑수말갈(黑水靺鞨)로 이어진다. 후일 말갈이 되며, 여진(女眞)으로 뿌리가 갈라진다.

흑수말갈은 해(奚)를 격파한 후, 대조영(大祚榮)에 발해(渤海)를 건국하게 된다. 숙신의 후예가 부여로 갈라지고, 고구려도 부여에서 갈라져나왔으므로, 따지고보면 고구려도 숙신의 후예다.



복초최인(伏草崔仁)의 저서「韓國의 再發見」이란 책에 의하면, 숙신(肅愼)은 한(漢)나라 때 삼한(三韓)이 되고, 위(魏)나라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국시대(B.C.291년경) 무렵에는 대륙의 중심부, 서안과 낙양 일대 즉 한수(漢水)유역을 삼한(三韓)과 위(魏)가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말갈(靺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靺鞨. 卽勿吉國. 在今松花江以東際海. 混同江以南抵長白山之地. 爲古肅愼. 漢魏 婁舊壤. 北魏始曰勿吉. 北史云. 一名靺鞨. 分七部. 其後互相兼幷. 至唐初僅存黑水粟末二部. 粟末靺鞨自萬世通天以後. 改稱渤海. 黑水靺鞨則女眞之所自出也.



말갈은 물길국이다. 지금의 송화강 이남 동해변에 있다. 혼동강 이남 장백산 일대가 그들의 근거지다. 옛 숙신이다. 한(漢), 위(魏) 때의 읍누의 옛 땅이다.

북사(北史)에는 말갈(靺鞨)이라 했다. 7부로 갈라져있었는데, 그후에 서로 합해졌다.

7부는 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 部)·안차골부(安車骨部)·비황부(沸湟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백산부(白山部)를 말한다.

당나라 초기에 근근히 흑수속말(黑水粟末) 2부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후 속말말갈은 만세통천(萬世通天:武則天, 695∼697년) 이후에 발해(渤海)로 칭해지게 되었다. 흑수말갈에서 여진(女眞)이 생겨났다.



당나라 초기의 말갈 위치.

흑수속말(黑水粟末) 2부로 명맥을 유지하며, 지금의 위치로 밀려나게 되었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니하(泥河)의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泥河. 在直隸宣化縣東十五里. 自關子口西南流與洋河合.


직예성 선화현 동쪽 15리에 있다.

관자구에서 서남으로 흘러 양하(洋河)와 합해진다.


그러면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 6대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十四年春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拉吏民.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14년 봄 정월. 말갈이 대거 북쪽 경계로 쳐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가을 7월에 또다시 대령책을 습격하고 니하(泥河)를 지났다.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 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三年春三月.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孤鳴等七城 又進軍於彌秩夫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 斬首千餘級


3년 봄 3월.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입했다. 호명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미질부까지 진격해왔다. 아군과 더불어 백제, 가야의 구원병이 길을 나누어 이를 막았는데, 적이 패하여 후퇴했다. 추격하여 니하(泥河)의 서쪽에서 이를 격퇴시키고, 1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百濟의 全盛期 강역
 
 



낙랑(樂浪)

위의 史書로 추증해본당시 낙랑 땅과,三國 초기의 대략적인 형세도입니다.

삼국의 각축장-낙랑


먼저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1. 신라편

南解次次雄.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 圍金城數重…
남해차차웅 원년, 7월에 낙랑병이 이르러 금성을 몇 중으로 포위했다.

儒理尼師今.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유리이사금 13년, 8월에 낙랑이 북변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쳐서 함락했다.


2. 고구려편

東明聖王. 十五年 夏四月 王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 出行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北國神王之子乎.

왕자 호동이 옥저(이병도주:지금의 함흥 일대) 지방을 유람할 때, 낙랑왕 최리가 그곳에 나왔다가 그를 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아하니 보통사람이 아닌듯한데, 혹 북국신왕의 아들이 아니냐?

-27년 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伐樂浪, 取具地爲郡縣, 薩水已南, 屬漢.
27년 9월에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 땅을 쳤다.
그리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을 삼으니 살수(이병도 주:지금의 淸川江) 이남(已南)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6대 대조대왕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4년 7월에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나라의 경계가 동쪽으로는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

-九十四年…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8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어 漢의 요동군의 서안평현(지금의 九連城 東北 安平河 유역)을 침습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掠得하였다.

東川王. 二十年 秋九月.....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이때) 왕이 군사를 三道로 나누어 급히 치니 魏軍이 요란하여 진을 이루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 방면을 거쳐 퇴거하였다


3. 백제편

溫祚王. 四年…秋八月, 遣使樂浪修好.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였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쳐부수고 100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7월에 독산과 구천의 두 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十三年,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 疆境, 少有寧日…

우리나라의 동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므로 편안한 날이 없다.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낙랑이 내침하여 위례성을 불질렀다.

十八年…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11월에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에까지 이르렀으나…

古 王 十三年…秋八月, 魏幽州刺史母丘儉與樂浪太守劉茂 朔方太守王遵伐高句麗, 王乘虛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고이왕 13년 8월에 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삭방태수 왕준이 고구려를 치므로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어 낙랑의 변민을 쳐 빼앗았다. 무가 듣고 노하니 왕이 침범할까 두려워하여 민구를 돌려주었다.



위의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반도에 놓고 볼 때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됩니다.


1. 낙랑이 백제의 동쪽에 있다.

2. 말갈이 백제와 신라의 북쪽 경계선을 접하고 있다.

3.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 함흥일대에 있다는 옥저 지방을 유람할 때, 황해도 일대에 있었다는 낙랑의 왕이 고구려의 중심부를 거쳐 옥저까지 가벼이 갈 수 있는가.

4. 살수(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고구려, 남쪽에는 한나라가 대치되어 있다.

그리고 살수는 낙랑 땅에서 흐르고 있다.


5. 대조대왕 때, 漢의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침습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掠得하였다.

이 기록을 보자면, 고구려에서 한(漢)나라로 가는 길목에 대방과 낙랑이 있다.


6. 고구려 동천왕 때, 중원의 중심부를 점하고 있던 위(魏)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다. 그때 왕이 군사를 三道로 나누어 급히 치니 魏軍이…낙랑 방면을 거쳐 퇴거하였다.

한나라가 망한 자리를 점하고 있던 위(魏)나라 역시 낙랑 땅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었다.



★ 다음은 수서(隋書) 신라편의 기록 기록입니다.

新羅國. 在高麗東南居. 漢時樂浪之地. 或稱斯羅. 魏將母丘儉. 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歸故國留者. 遂爲新羅.

신라는 고구려의 동남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이다.
혹 사라라고도 한다. 위나라 장수 모구검이 고구려를 칠 때 옥저로 달아났다. 그후 그 남은 무리가 고국으로 돌아와 신라가 되었다.


★ 구당서(舊唐書) 卷一百九十九上 列傳 第一百四十九上 東夷篇의 기록입니다.

新羅國 本變韓之苗裔也. 其國在漢時樂浪也. 東及南方俱限大海. 西 接百濟. 北隣高麗. 東西千里. 南北二千里. 有城邑村落. 王之所居曰金城.

신라국은 변한의 후예다. 한(漢)나라 때 낙랑의 땅이었다.
동남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접해 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동서로 1천 리, 남북으로 2천 리이다. 성과 읍, 촌락이 있었다.
왕이 있던 곳은 금성(金城)이었다.



여기서도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됩니다.

1. 신라는 낙랑 땅에 있었다.

2. 위나라 장수 모구검이 고구려를 치는데, 왜 신라 사람들이 옥저로 달아났는가 입니다.

유추하자면, 신라의 낙랑 땅에 있었고, 위나라는 낙랑 땅을 관통하여 고구려를 쳤다.

그럼 신라인들이 달아났던 옥저 땅은 어디에 있는가. 분명 함흥 일대는 아닐 겁니다.


3. 신라의 땅이 동서 1천리, 남북으로 2천리였다.




★ 다음은 수서(隋書)와 구당서(舊唐書)에 나타난 신라는 낙랑 땅에 있었다는 기록과 연관된 자료입니다.


1.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

…爲慶州府別號樂浪也 淳化所定

경주는 별호로 낙랑(樂浪)이라 하며, 낙랑은 순화(淳化)에 정해 있었다.


2,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2년의 기록.

문무왕 2년 정월. 당(唐)은 문무왕을 개부의동삼사상주군낙랑군왕신라왕(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이라 했다.



★ 다음은 낙랑과 연관된 여러 기록들입니다.


1. 중국고금지명대사전

樂良郡 ①後魏置. 故治在今直隸徐水縣西. ②後魏置. 故治卽今朝鮮平壤.


2. 백제 온조왕 때의 경계가 북으로 패하(浿河:예성강)에 이른다고 했다.

수경주소(水經注疏)에 나타난 浿河(浿水)의 위치.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許愼云, 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 出浿水縣.
十三州志曰,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 蓋出其縣南逕鏤方也.
昔燕人衛滿, 自浿水西至朝鮮, 朝鮮, 故箕子國也…戰國時,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理…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으로 임파현을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패수의 서쪽은 조선이다


3.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기록된 대방의 위치.

帶方郡, 漢置帶方縣, 後漢末公孫康割樂浪郡南部爲帶方郡地, 以帶水爲名, 晉因之, 後沒於高麗… 高句驪倂樂浪後, 帶方遂爲高句驪百濟競爭之地,

…후한말 공손강이 낙랑군 남부를 쪼개어 대방군으로 삼았다. 대수(帶水)로 말미암아 그 이름을 삼았다.

진(晉)이 일어났던 곳이다. 후에 고구려에게 멸망당했다.…고구려가 낙랑을 병합한 후에, 대방은 고구려와 백제의 각축장이 되었다.

대수(帶水)를 이병도(李秉燾)는 임진강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4. 산해경(山海經) 18권 海內經의 기록.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외人愛之
朝鮮今樂浪郡也 天毒卽天竺國…

동쪽나라 안의 북쪽 모퉁이에 있는 나라이름은 조선(朝鮮)이며 조선은 천독(天毒)이다. 그 사람들은 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사람을 사랑하며 가까이 한다.

곽박에 의하면 조선(朝鮮)은 낙랑군(樂浪郡)이라 했다. 천독은 천축국이다…원가(袁珂)는 조선(朝鮮)은 해내북경(海內北經)에 있다고 했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자면, 고구려 신라 백제의 각축장이었던 낙랑은 전혀 우리역사의 상식밖에 자리잡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살수(薩水)의 이북에는 고구려, 이남에는 후한(後漢)이 위치해 있습니다.

낙랑땅에는 살수(薩水)가 흐르고 있었고, 후한(後漢)과 삼국, 그리고 후일의 위(魏)와 삼국의 접경지역이며, 천축으로 불리던 조선이 자리했던, 郡으로 봉해졌던 방대한 지역.

대략 감숙성 서쪽에서 서안과 낙양의 위쪽 일대를 가리켰던 것이 아닐까 추론해봅니다.

2007/04/29 [00:16] ⓒ 시대소리
인용따로 결론 따로,, 그나마 그런대로 나가다 완전 삑사리,,,나참07/04/29 [05:40]수정 삭제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 머리 속에 일단 망령된 선입견이 들어가면
제아무뢰 많은 사실을 직접 봐도 결국은 헛발질을 하게 되는 이치,,,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헷갈리고, 조심해야 할 것이
'부여'와 '낙랑'이다.

낙랑은 부여와 마찬가지로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도 서로 완전히 '이질적인 두 종류의 낙랑'이 있었다.

그 하나는 '만주 지역'에 있던 낙랑으로서 '한나라의 유산'이며,
다른 하나는 최리가 왕으로 있었고,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의 슬픈 이야기가 있는
최씨 낙랑으로, 그것은 대략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에 있었다.

이를 헷갈리다보니, 완전 소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살수'에 대해서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삼국사기에 의히면, '살수'는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서 수나라가 퇴각을 할 때
처음 만난 강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를 보고 지금의 청천강이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의 평양은 소위 '북평양'으로서 지금의 '봉황성'지역이며,
여기서 가장 처음 만나는 강은 바로 '태자하'이다. 그래서 바로 '태자하'가 '살수'가 되는 것이며, 지금 태자하 지역의 '요양'에 가면, 요나라 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멋진 '백탑'이 서있다. 그러나 이 백탑은 요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태자하에서 벌어졌던 '살수대첩'의 전승비인 '경관'이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당연히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낙랑땅'에 '살수'가 있다고 하는 거다.

나의 이런 주장은
신채호 선생의 작품들과
심백강 교수의 '황하에서 한라까지'에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공연히 복덕방 역사가 이중재 사관에 현혹되어
어이없는 제곡고신씨 운운하며 환부역조 하지 말고
엄한 섬서성, 감숙성 지역에서 봥황하지 말지어다.


대력적 반박이니, 불만 있으면, 말만 해라. 대신 정확히 말이다.
언제든지 상대해주마.


단, 고서의 기록도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므로, 그것들을 서로 비교해서
서로 중첩되는 것만을 취해야지, 어느 한 곳에 있는 것만을 취해서 주장을 하게 되면 꼭 무리한 주장이 나오게 됨을 알기 바란다.

이중재는 다시 말하건데, 중국 짱깨가 되지 못해 망령이 든 자이다.
하나 더,,,(天毒)관련해서,,,나참07/04/29 [06:06]수정 삭제
인간들이 '천독'이라는 말이 나오니, 자꾸 앞뒤 안 보고 흥분해서는 석가모니가 우리나라에서 나왔다느니 하며 난리를 치는데,,,

이 '天毒' 부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논쟁의 진행되고 있다. 한부로 단정짓지 말아라. 비록 '곽박'의 해석에는 '천축국'이라 되어 있지만,

'규원사화'의 저자 '북애노인'은 이 '毒'이 오자임을 지적하며, 원래는 발음이 유사했던 '육(育)'이었다고 정정했다. 이 경우, 한자는 원래 뛰어쓰기가 되어있지 않아서 한 글자가 바뀌면 전체 의미가 변하게 되어 있는데,,,

이 경우, 해석은(위의 본문 해석은 완전 비문법적 견강부회의 전형이다)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

1.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과 천독이라 한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에서,,,

2.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한다. 하늘이 그 백성들을 길렀고 물가에 사는데,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

로 된다.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나는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노인'의 해석을 존경한다.


정확히 따져보지도 않고,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말아라. 웃음거리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