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찾아서

7천년의 고대사를 짤라 없애고

대동이 2007. 5. 11. 14:22
[단독]신라의 영토는 실로 광대하였다
7천년의 고대사를 짤라 없애고, 무려 20만권의 사서(史書)를..
박병역 위원
➤ 어처구니없는 엉터리의 망국적 국사

현행 국사는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 식민지시대에 일제와 일왕의 지령을 받고, 조국을 배신한 식민사학자 이병도 주도하에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켜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한 모략(謀略)으로 1938년에 편찬된 망국적 국사입니다. 본 연재의 논설을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믿지 못하는 독자님을 위해 먼저 일제와 이병도의 만행부터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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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가 조선사를 만든 목적
1922년 조선총독 사이토마코토는 중국에 파견하여 각처를 수색 수거하여 돌아온 <일본인 학자 실무자>들을 독려하며 조선사 편찬 시책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고대사, 전통적 문화를 알지 못하게 한국의 국내와 중국 각처에서 수거한 “조선사 사료”를 조선인들 몰래 불태워 없애고, 고대사 또한 짤라 없애버리면 조선인들은 민족정신과, 전통적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조선의 조상과 선인들은 무능하고, 악행을 과장하게 들추어내서 조선사를 편찬하여 조선인 청소년들에게 가르치게 하므로서 조선인 청소년들은 자국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는 하나의 기풍이 조성될 것이다.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역사와 인물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되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조선인들이 일본사람으로 동화되는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며 제국일본이 조선사를 만들어 주는 목적인 것이다."

(2). 일제의 조선사 편찬 지침
1925년 10월 8일 제1회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개최했을 때 조선사 편찬지침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② 전편의 상고 삼한, 삼국통일 후의 신라, 고려, 조선, 조선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③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 사설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정부기록문서 본관소에 소장돼 있습니다]

(3). 일제는 한국과 중국 각처의 사료를 수거했다.
1910년 일왕 칙령 제 319로 조선총독에 취임한 데라우치는 한국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10개년 계략을 세우고 1910년 11월부터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한국의 국내와 중국 각처를 수색하여 단군조선 삼한의 고사서등 51종 20여만 권의 사료를 색출 수거하여 돌아왔다.

1922년 일인학자 이케노우치(池內宏), 이마니시(今西龍) 등 8명의 관계자들이 중국에 들어가 대륙 각처를 누비며 조선 사료를 찾아내고, 광개토대왕 비문 등 모든 사적(事跡)들은 훼손 조작하고 돌아왔다. 또한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우리나라의 고대 사료가 무려 4천 9백 50종을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고, 중요자료는 일본으로 가져갔다.

(4). 조국을 배신한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만행
1963년 5월 국사교과서 편찬에 관한 문교부의 위촉을 받은 28명의 국사학자와 국사담당 교사들은 12차례 회의를 갖고 조국을 배신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일제의 만행과 꼭 같이 다음과 같은 세부지침을 세웠다.

1. 단군 : 단군은 한민족의 신화로 취급하라.
2. 위만조선 : 사실(史實)은 고조선에 포함 취급하고 箕子東來(기자동래), 기자운운은 교과서에 일체 수록하지 않는다. ...(중략)
3. ① 주몽 ·온조 ·박혁거세는 부족사회의 부족장으로 다루고
4. ②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건국연대(BC 57,37,18)는 표시하지 않으며,③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한 것은 고구려,백제, 신라의 순으로 하고,④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시작한 때는 고구려는 태조왕(53~146),백제는 고이왕(234~286)부터, 신라는 내물왕(356~402)때부터로 한다.(국사편찬위원회와 정부문서 보관소에 소장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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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조선사 편찬지침과 현행 국사는 똑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거금으로 조선사를 편찬해준 국책을 자랑삼아 “조선사편찬사업개요”를 작성했습니다. 제 정신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조선사편찬사업개요”만 탐독해도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조선사(현행 국사)는 거짓 가짜로 편찬된 망국적 역사로 즉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가 만든 조선사와 현행 국사의 내용은 [조선사 편찬 회의록]과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와 꼭 같이 환인, 환웅, 단군에 대한 고대 사료는 불태워 없애고, 역사 또한 삭제하고, BC 2~1세기의 삼한이 멸망한 역사부터 기술돼 있습니다. 또한 우리역사가 마치 3국시대부터 시작된 것 처럼 조작하고, 세계적 대국의 3한과 아세아적 대국의 3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사대역사관의 패배의식과 철저한 식민지사관의 치욕적 역사로 구성돼 있습니다.

일제식민지시대의 [1938년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조선사]와 [2005년 3월 1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된 중, 고등 국사]와 근본적 내용이 똑 같습니다. 또한 일제가 조선사를 만든 목적의 요결문과 조선사 편찬 지침과 똑 같이 현행 국사는 철저한 식민지사관의 망국적 치욕의 국사로 곧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행 국사의 본문을 싣습니다.]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현행 국사)

1. 청동기의 보급
신석기시대를 이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기원전 13세기경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철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업이 발달하여 경제기반이 확대되었다.

2. 인류의 4대문명
기원전 3000년경을 전후하여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데스강, 이집트의 나일강, 중국의 황하강 유역에서 관계 농업의 발달, 청동기의 사용 도시의 출현, 문자의 사용,국가의 형성 등이 이루어져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고등 20쪽)

3. 단군과 고조선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다.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BC 2333).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중략) 고조선은 요령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 준왕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서 지방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고등 35쪽)

4. 위만의 집권
중국이 전국시대이후로 혼란에 휩싸이게 되자 유이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그 중 위만은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게되었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는 세력을 통솔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 194).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중략) 이에 불안을 느낀 한무제는 수륙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패수)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략되었다.(BC 108).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고,[식민지로 다스리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고등국사 36쪽 도움 글]
(연(燕)나라 사람 도적 괴수) 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에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중국의 조상이 우리나라의 조상이 된 사실을 강조함]

현행 국사의 삼한(한)

위만 조선이 있었던 기원전 2세기경에 남쪽에는 진(辰)이 있었으며, 여기에서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원전 1세기경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더불어 부여, 동예, 옥저 등이 공존하고 있었다. 부여 및 마한의 목지국(월지국)은 왕을 칭할 정도로 연맹왕국 단계에 이르렀다. 이후 동예, 옥저, 삼한의 소국들은 연맹 왕국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통합되었다. 이 시대를 고고학에서는 철기 시대 후기(기원 1~300년)라고도 한다. [고등 국사 도움글 39쪽]

[마한]은 천안, 익산, 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고,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모두 10여만 호였는데 그 중에 큰 나라는 1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변한]은 김해,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12개국으로 이루어졌다. [진한]은 대구,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12개국으로 이루어졌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모두 4만~5만 호였는데, 그 중에서 큰 나라는 4천~5천호,작은 나라는 6백~7백호였다.

[마한 목지국]은 처음에 성환, 직산, 천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백제의 성장과 지배 영역의 확대에 따라 남쪽으로 옮겨 익산 지역을 거쳐 마지막에 나주 부근(오늘날의 대안리, 덕산리, 신촌리, 복암리)에 자리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등국사 41쪽 도움 글)

삼국의 성립(고등 국사 49쪽)

[1. 고구려]는 삼국 중 제일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다.(B.C 37)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정복 활동 과정에서 커진 군사력과 경제력을 토대로 왕권이 안정되어 왕위가 독점적으로 세습되었고, 통합된 여러 집단들은 5부 체제로 발전하였다. 이후 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다.

[2. 신라]는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이 되었다(B.C. 57)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왕의 칭호도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기반을 유지했다.

[3.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다(B.C18),백제는 3세기 중엽 고이왕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

[4. 가야국(금관가야)]은 3세기경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기 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김수로에 의하여 건국되었다(42).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다. (망국적 국사 본문 끝)

➤ 우리민족은 세계에서 문명이제일 뒤떨어진 미개한 민족인가?

중국의 황하문명은 BC 3천년 경부터 황금문화가 발달하고, 거대한 왕궁이 있었으며 고대 국왕은 정치와 더불어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우리민족은 기원전 4세기경에 비로소 철기를 쓰기 시작하고 있으니 세계에서 제일 열등하고, 미개한 민족으로 철저히 비하시키고 있는 현행국사를 청년학도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찌 망국적 치욕의 국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1945년 8.15 해방이후 62년 동안 망국적 식민지국사를 그대로 청년학도들이 배우고 있으니 도대체 우리 대한민족의 지식인들은 두 눈이 멀었는가? 제 정신이 있는 민족인가? 얼빠진 민족인가?

특히 [단군과 고조선편]은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다.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라고 우리나라 국조를 철저히 폄하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의 이웃나라 중국은 황제헌원이 있었고, 고신왕과 성스러운 요임금이 있었으나 단군왕검은 부족장입니다. 오직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본왕의 밀명에 추종한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고조선을 철저히 부정하고, 도저히 단군을 왕이라 칭할 수 없었습니다. 이병도는 국사를 정립한 선구자인가?

그리고 고조선의 역대왕을 살펴보면 제1대 단군왕검(BC 2333)의 2천여년 역사는 공백이고, 제2대 준왕(BC 194), 제3대 위만(BC 108)뿐입니다. 즉 고조선의 역사 주인공은 단군➜준왕➜ 위만 세 사람뿐입니다. 단군왕검은 고조선시대부터 진한, 마한, 변한의 삼한(三韓)이 건국되었으나 삼한 중의 변한(弁韓)왕 준(準)이 멸망한 역사부터 기술하여 한나라의 식민지 역사부터 청년학도들이 배우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한 민족의 국사입니다.

또한 현행국사의 [삼국의 성립]에서 삼국 중 제일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다. 라고 했습니다. 현행국사에서 신라는 BC 57, 고구려는 BC 37, 백제는 BC 18년, 라고 분명히 표기돼 있으나 어찌하여 고구려가 제일 먼저 국가체제를 정비했단 말인가?

즉 우리나라는 고조선부터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국가체제를 정비하지 못하여 왕이라 칭할 수 없고, 부족장이며 1세기 후반 고구려 태조왕(서기 145년)부터 왕국이시작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백제는 8대 고이왕(서기 234~285)부터 왕국이고, 신라는 박,석,김 3성의 여러 세력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나라였기 때문에 국가적 통합이 비교적 늦다. 고 했습니다.

신라는 시조부터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17대 내물왕(서기 356~401)부터 왕국이 시작되고 가야는 시조 수로왕(서기42)부터 10대 구해왕과 마지막 말왕(532년)의 역사는 무시하고, 부족 연맹체일 뿐입니다. 삼국사기에 건국 년대가 제일 빠른 신라는 그 어느 나라보다 황금문화를 꽃피웠던 군자국을 이 처럼 철저히 비하(卑下)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7천만 국민을 우롱하는 기만적 작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 한국이 제사장인가? 중국이 제사장인가?

고조선의 진한, 마한, 변한의 삼한 중에 진한의 단군왕검은 천산(天山:요녕성 안산시)에 천부도(天符都)를 설치하여 매년 10월 3일은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이며, 삼한의 영토를 관리하고 제후를 임명하는 왕권을 갖고 있었다. 곧 단군은 제사장을 뜻합니다.

고조선 삼한 중에 [진한과 마한]이 멸망에 이르자 신라의 박혁거세 성인(聖人)은 진한의 전통적 제례의식을 거행하던 천부도(天符都)를 산동성(山東省) 태산(泰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설치하였다. 천부도(天符都)는 곧 천제단(天際壇:원구단)이며, 하느님에게 제천의례(祭天儀禮)를 행사하며, 아울러 황제로 등극 할 때 봉선의식(封禪儀式)을 행하는 곳입니다.

[한국과 중국] 두 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가 천제단(天際壇:원구단)에서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한 나라인가? 를 밝히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안입니다. 즉 천제단은 오직 천자(天子)만이 제사를 주제(主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고조선과 삼국이 천제단에서 제사를 주제한 나라로 입증된다면 중국이 자국의 역사를 변조, 조작하여 가짜 황제로 자칭한 사실이 곧 바로 밝혀져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력화 시키는 핵탄과 같기 때문입니다.

중국 하북성(河北省) 탁록현(涿鹿縣)의 계명산(鷄鳴山)을 마고산(麻姑山)혹은 삼신산(山神山)이라 칭합니다. 이곳이 신라의 계림(鷄林)이 아니고 무엇인가? 탁록 곁에 新城(신성:월성)이 있습니다. 한,중,일 3국사학자는 철저히 궁구(窮究)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라의 혁거세왕은 달구(達丘:산동성)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산서성(山西省) 율포(栗浦=蔚州(울주)=울산)에 해시(海市:해물 시장)를 열어, 육해 교역의 제도를 수립하였다. 蔚州(울주)는 삼한시대의 진한 땅이며 신라의 혁거세왕은 해물시장을 개설했습니다.


▲ 상도에 신라의 蔚州(울주),新州(신주:월성)와 백제의 漢城(한성), 武州(무주)가 있습니다. © 플러스코리아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황제 해모수이며,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柳花), 또한 사소(娑蘇)이었습니다. 박혁거세 성인(聖人)을 낳은 성모(聖母)는 안휘성의 선도산(仙桃山)에 오래 머물러 계시며 신라를 진호(鎭護)했습니다.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왕에게 충성한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신라의 근본역사를 짤라 없애고,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의 장손국을 문명이 제일 뒤늦은 나라로 폄하(貶下)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광대한 신라의 영토를 납득하기 위하여 먼저 북부여의 역사부터 고찰해 봅시다.


♦. 중 마한은 5천축국으로 번성했다

5가들은 BC 158년 오손(烏孫)의 침략을 받고 남하하여 다시 5천축국으로 번성했다. 인도, 베트남,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일대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후한(後漢서기 25~220년)때는 청해성,감숙성,서장성, 운남성까지 확장하여 국토는 약 3만리가 되었다.
한(韓), 중(中), 일(日), 사학자(史學者) 여러분...!
천축국이 인도인가? 중국인가?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준왕의 후 마한 건국

삼한 중의 변한의 제 74대 기준왕은 재위 28년 정미(BC 194)년에 燕(연)나라 도적 위만에게 왕권을 빼앗기자 좌우궁인들을 거느리고 해성(海城:요녕성)으로 들어가 후마한을 건국하고, 제 9대 계왕은 서기 9년까지 202년을 존속하고 무려 2340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상기 도표와 같이 일제는 무려 7207년의 역사를 말살하고 삭제했습니다. 최치원이 말하기를 고조선 삼한의 진한은 신라이며, 마한은 고구려이며, 변한은 백제이다. 라고 했습니다. 월지국은 본래 마한의 영토이었으나 신라가 5천축을 관리한 대국입니다.

세계적대국고조선

일제는 한반도 속으로 축소했다

▲ 현행 국사 삼한 ©플러스코리아

▲ 단군왕검의 고조선 삼한 ©플러스코리아



























➤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삼한과 아세아적 대국의 3국(신라, 백제, 가야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대한민족의 자긍심을 없애고, 또한 무려 7천년의 고대사를 짤라 없애고, 무려 20만권의 사서(史書)를 불태워 없애고, 인류의 부모국이며, 4대문명과 종교 원천국의 역사적 흔적을 철저히 말살했습니다.

➤ 일본의 고대역사는 없으며, 한국의 역사입니다.

상기 지도와 같이 일본 열도는 고대 삼한지역이며 또한 신라, 고구려, 백제가 다스린 지역이며, 일본의 고대역사는 없습니다. 이러한 고로 우리 역사를 말살, 왜곡, 변조, 조작한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차차 고증으로 명확히 입증 될 것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다음은 [경주는 신라 천년의 왕도가 아니다]가 연재됩니다.

박 병 역 위원 프로필

△ 종합인터넷 日刊 플러스코리아 역사문제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