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만주원류고는 말합니다.

대동이 2007. 5. 11. 13:59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만주영토를 그대로 당에 팔아치운 나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주원류고는 말합니다.




[만주원류고] 신라의 땅은 동남쪽으로 조선의 경상도 강원도의 2개의 도를 아우르고, 서북쪽으로는 길림 오랍에 이르고, 서쪽으로 개원 철령에 가깝다. 개원(開元:당나라 현종 713-741)이후 발해가 성할 때
압록강으로 경계하였다. 신라의 구주(九州)는 동쪽으로 길림(吉林)에 이르고 서쪽으로 광녕(廣寧)에
이른다.




뭐라고! 신라의 구주가 동으로는 길림! 서로는 광녕이라니! 통일 신라의 구주 오소경이 대동강이남이
아닌 만주라고!




그러나 사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남의 나라가 우리나라 받들어 줄리도 없고 하는데 그리고 우리와 특별히 원수진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냥 그대로 적었다고 보아야합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는 만주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주원류고라 믿을 수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주원류고는 조심스레 다뤄야 할 사서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조해주는 기록이 신당서에도 나왔습니다.




신라왕은 둘레가 8리인 금성(金城)에 거처하며 그 왕을 계림주도독으로 삼았다는 내용과, 신라는 한나라 시대의 낙랑지역에 할거하였고, 횡으로 1000리며 종으로는 3000리였다. <신당서>




이 사이트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매초성전투 이후 신라는 무서워서 한강이남으로 도망와서
당나라에 애걸복걸했다고.



엄밀히 말하지만 틀렸습니다. 삼국사기를 재독 삼독하시기 바랍니다.




672년 문무왕 12년 7월, 당나라 장수 고간 군사 1만과 이근행 군사 3만 등 4만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平壤:요녕성 요양)에 이르렀다. 8월 한시성과 마읍성(馬邑城:요녕성)을 쳐서 이기고 병력을 백수성에 진주시켰다. 신라군과 고구려군이 퇴각하는 당나라 고간을 추격하여 석문(石門:요녕성/하북성)에 이르렀으나 우리 군사가 패했다”▼삼국사기





신라는 요동반도에서 일어난 석성전투 이후로 당나라 장수를 태행산맥의 석문까지 추격합니다.

황산벌이라는 영화에서 김유신이 너희 당나라 놈들 이 땅에서 다 죽여 없애버리겠다고 했듯이 당나라를

죽여 없앨 기세로 석문까지 추격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기서 지고 맙니다. 더 추격했다면 당나라를

멸할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 때 신라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한강이남으로 퇴각한 후 강화를 맺었을

것입니다. (물론 한강을 지금의 한강으로 보지 않습니다. 저는 허성정 선생님처럼 대동강으로 보고 있습

니다.)





그렇다면 석성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석성’은 요녕성 요양 동쪽 57리 <요사지리지>




석성(石城)’에서 잡았는데 그곳이 개주이다. 개주(開州)는 본래 고구려가 경주라 하던 곳으로서 발해
역시 경주라 하였다. 개원현에는 본래 책성이 있었으며 고구려는 용원현이라 하였다”▼요사지리지



석성은 개주입니다. 마읍역시 요녕성에 있었던 만큼 8년전쟁은 요동반도에서 치러졌던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8년전쟁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연합과 당나라간에 이뤄졌던 치열

한 전쟁이었습니다. 동아시아 패권을 두고 국가의 존망위기를 둔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도

여기서 절대로 져서는 안되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서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고 꼭 이 곳만이 아니라

서방의 토번국과 북방의 돌궐 거란과 싸우고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물러서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호로하에 당군을 수장시키는 쾌거를 이루고 매초성에서 당군 수천명의 목을 베고

엄청난 양의 전투마를 거두고 병선 40척을 약탈하는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엄청난 회전(回戰)에 당군 20만명이 동원됩니다. 신라도 만만치않은 숫자를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군의 수에서는 딸리기는 엄청 딸렸겠죠.

하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듯이 당나라군을 18번 피터지게 싸운 후에 쓰러뜨렸습니다.

전쟁후에 매초성에는 각국의 군사들의 피가 강물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룰 정도였을 것입니다.

673년 문무왕 13년 9월, 당나라 군사가 말갈 및 거란의 병력과 함께 신라의 북쪽 변경에 침입해와 9번을 싸워 우리 군사가 모두 승리하고 2천명을 목을 베었다. 당나라 군사 가운데 호로하(瓠瀘河:요녕성)와 왕봉하(王逢河)의 두 강에 빠져 죽은 이가 헤아릴 수가 없었다”▼삼국사기

이 것이 호로하 대전의 결과입니다. 라이언일병을 보셨는지요? 초반에 독일군의 기관총에 의해 연합군의

피가 바닷물을 이루지요.

이것으로 전쟁의 결과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9주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상주(尙州)’는 요나라 동경로(요녕성/요양)에 속한다. 한나라 양평현이고, 발해의 동평채이다.
<요사지리지>

전주(全州)’는 금나라 북경로(서요하)에 속하며 안풍현에서 다스렸다.
<금사지리지>

조선의 경상도상주는 본래 진한의 남경이고 신라의 고지이다. 전라도전주는 본래 변한의 변방 경계다. 강주(康州)는 요나라 현주에 속하며 의무려산에 가깝다.
<만주원류고>

웅주(熊州)는 웅악을 말하는 것으로 당나라 의봉 초에 옮긴 웅진도독부 건안성이며 개주(蓋州:요녕성 개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발해의 삼로군이다. 한주(漢州)는 한강을 말하며 후에 조선왕조의 도읍이 되었다. 삭주(朔州)는 봉황성(압록강 단동) 동남에 있다. 명주(溟州)는 예국의 땅이다”▼만주원류고

“[당회요]에는 신라9주가 옛백제와 옛고구려 남쪽 경계에서 동서로 900리 남북으로 1800리에 있었고, 신라의 계림주는 압록강(요하)의 동쪽 8리 ‘황토령’ 경계에 있었다. 개원(길림성)과 철령(요녕성) 사이에 있다”▼만주원류고


암연현의 동쪽은 신라이며 옛평양성(요녕성 요양)은 현의 서남쪽에 있으며 동북 120리 지점에 해주가 있다.(巖淵縣東界新羅故平壤城在縣西南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요사지리지(권38)

그리고 대방전투가 있었군요.

672년 당나라 군사가 석문(石門:요녕성/하북성)의 들에 군영을 세우니 신라 문무왕은 의복과 춘장을 보내 대방(帶方:요녕성/하북성)의 들에 군영을 짓고 대치하였다”▼삼국사기(김유신전)

문무왕이 장수들을 보내 대방에 보내는 장면이 나오는군요.대방고지는 요녕에 있었고 대방군은

하북성 남부에 있었습니다. 이 대방군과 낙랑군은 툭하면 이 요동반도를 조종하려고 했지만

미천왕의 하북성평정으로 종결이 됩니다.

당나라는 부여융을 웅진도독대방왕으로 삼고 요녕성 개주로 보냅니다. 그러나 신라가 먹어버려서

실패하고 말지요.

그리고 한주에 대한 설명은 말할 것도 없지요. 지금의 서울입니다.

그리고 성덕왕때 평양(요양) 영해 우두주를 당으로부터 반환받습니다.

736년 성덕왕 35년 6월 사신을 당나라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아울러 표문을 붙여 사례하기를「엎드려 은혜로운 조칙을 받들자오니 패강(浿江:요녕성 태자하) 이남의 땅을 내려주셨습니다. 저는 폐하의 영예로운 총애를 입었사오니 분골쇄신하겠나이다」하였다.…왕은 평양(요녕성 요양)과 ‘우두(牛頭)’ 두 주의 지세를 조사하고 살펴보게 하였다”▼삼국사기

그런데 신라는 이미 함경도를 먹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두주가 지금의 함흥이라면 신라가 당나라

에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패강구는 지금의 태자하로 보아야 합니다. 평양은 요양입니다. 이렇게 해야 만주원류고의 기록과

맞아들어갑니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왜 요동반도가 웅주일까요? 이 웅진성은

200년경의 구태왕의 웅진성입니다.

신라는 발해가 등주를 치기전까지는 만주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등주공격 이후에 약간 축소됩니다.

그리고 압록강에서 대치하지요. (이때의 압록강도 역시 요하이다.)

당나라 고종 총장 중에 호(戶:해족)들이 신라에 항복해 오자 이들을 모아 귀의주를 설치했는데 이곳은 량향현의 ‘광양성(廣陽:하북성)’이다. 후에 폐지되었으며, 그 후에 다시 설치했는데 이시(해족의 추장)의 부락민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高宗總章中,以新羅降戶, 置歸義州, 於良鄕縣廣陽城,後廢,今復置以處李詩部落)▼자치통감(권213당기29/당현종개원20년).

돌궐과 해가 당과 전쟁에서 패하자 신라로 항복을 하다니! 신라의 만주영토가 없고서는 설명이 불가능

합니다. 배도 못타는 놈들이 무슨 항해를 해서 신라에 올까요?

만영군은 궤멸된 장수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전군총관 장구절은 만영군을 맞이했다. 만영군은 로수(潞水:요녕성/하북성)의 동쪽에서 쭈그리고 앉아 탄식하였다…신라(新羅亦死將安之乎)…남은 병사들과 해(奚)는 모두 돌궐에 항복하였다”▼중국 자치통감

만주에 있는 족속들이 발해와 싸우지는 못할 망정 신라와 싸우다니! 이놈들이 해전을 할 줄 압니까?

삼국지를 보면 알수 있듯이 조조의 북방기마병들이 적벽강하구에서 오나라와 첫번째 수전을 벌일 때

어떠했나요? 뱃멀미로 고생을 했지 않습니까?

만리장성에 가까운 북방민족들도 심지어 감숙성 섬서성 산서성 등지에 주거하는 위나라 사람들조차도

뱃멀미로 고생을 하는데 만리장성보다 멀리떨어진 초원이나 만주에사는 족속들은 어떨까요?

말할 것도 없지요. 배 공포증으로 고생을 할 것입니다.

만영이 신라에게 엄청나게 깨진 후 돌궐로 도망을 갑니다. 이 전투는 요녕성 로수에서 벌어진 전투입니

다.

그런데 돌궐과 해가 어떤 민족인가요? 만주가 아니라 요하 건너편의 민족들입니다.

이 민족과 전투를 벌이다니! 이것은 신라가 만주영토를 가졌다는 움직이지 않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통일 신라의 국경이 압록강과 요동반도라는 기록이 여기에 있습니다.

“산동반도 등주(登州)에서 동북으로 바다를 나가 대사도(大謝島)를 지나 귀흠도(龜歆島), 말도(末島), 오호도(烏湖島)에 이르기 300리이다. 북으로 오호해(烏湖海)를 건너 마석산(馬石山) 동쪽의 도리진(都里진)에 이르기까지 200리이다. 동으로 바다를 끼고 청니포(청泥浦)를 지나 도화포(桃花浦), 행화포(杏花浦), 석인왕(石人汪), 탁타만(탁駝灣), 오골강(烏骨江)에 이르기 800리이다”▼신당서(도리기)

“이에 남으로 바다를 끼고 오목도(烏牧島)를 지나 패강구(貝江口), 초도(椒島)를 거치면 신라 서북의 장구진(長口진)에 닿게 된다. 또 진왕석교(秦王石橋)를 지나 마전도(麻田島), 고사도(古寺島), 득물도(得物島)를 거쳐 1,000리를 가면 '압록강 당은포구(唐恩浦口)'에 이른다. 이에 동남쪽으로 육로로 700리를 가면 신라 왕성에 이른다”▼신당서도리기(又過秦王石橋, 麻田島, 古寺島, 得物島, 千里至鴨 江唐恩浦口)

자세히 보라!

압록강 당은포구를 볼 것이다. 압록강 당은포구! 당은포구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패강이 대동강이면

압록강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잘못된 기록이라 하지 말라! 대동강이 어떻게 패강이고 무엇이 되겠는가?

대동강아래에 압록강이 있었느냐? 대한민국의 지명을 바꿔치기하지 말라!

압록강이면 압록강이지 어떻게 평양보다 더 아래에 있겠느냐?

강단학계 당신들은 고구려와 백제도 망쳤지만 신라는 더 망쳤다! 신라가 1000년의 나라인데 고구려와

백제보다 더하다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라왕은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였으며, 후세에 와서는 2개의 월성에 거쳐하였다. 고구려 백제의 국경은 개의 이빨처럼 교차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화친하거나 배반하다가 후에 두 나라 모두 신라와 당나라에 토멸 당하였다. 신라는 그 지역에 9주를 설치하였다.”▼삼국사기지리지(권34/잡지3/지리1).


신라왕성이 2개였다고 합니다. 통일후의 월성이 따로 있었다는 뜻이죠.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바로는 신라의 수도는 통일전이나 통일후에 한 번도 옮긴 적이 없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지리지]는 분명히 통일전의 신라9주와 통일후의 신라9주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2개의 수도(월성)가 있었음이 이를 증명합니다.. [만주원류고]가 신라9주의 영토가 만주에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옳습니다.



고구려 백제의 국경이 개의 이빨처럼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구려 백제 지리도를 생각하면, 고구려 백제의 국경이 개의 이빨처럼 얽히고 설킬 것이 없지요. 660년 백제 멸망 이후에는 “백제땅을 발해와 신라가 나누어 가졌다”고 모든 사서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백제 땅은 요녕성 개주시에 있는 웅악(熊岳)의 대방고지를 말합니다. 바로 이 땅을 치기 위해 당나라 유인궤는 ‘대방주자사’라는 작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방고지 백제가 요동반도임은 요동반도에서 발굴되는 여러 가지 벽돌고분과 벽돌고분에서 출토되는 백제연호에서도 확인됩니다. 대방고지 요동반도에서는 대동강평양과 황해도에서 발굴되는 이른바 낙랑고분과 같은 양식의 백제고분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또한 백제 것이 확실시되는 명전의 연호들이 대량 발굴되고 있습니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 이전의 백제는 요동반도에 ‘대방고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이라!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9주를 설치한다고? 정말이지 위대하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당나라 유인궤가 대방주자라는 작호를 가졌다면 당나라가 대방주(황해도)를 점령이라도 하였다는 말입니까? 더 이상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낙랑은 대동강평양이 아니고 대방은 한반도의 황해도가 절대로 아닙니다.



더이상의 거짓말은 없습니다. 거짓말이란 이렇게 유치하게 하면 들통이 납니다. 자기들 생각에 맞지


않으면 가짜야! 가짜야! 이러면 쉽게 말해 유치원생이라는 소릴 들어도 싼 것입니다.



유치원생들이 어떻습니까? 생각과 맞지 않으면 아냐! 아냐! 이러지 않습니까?

그게 현 학계다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신라는 만주에 영토를 가진 나라입니다. 신라는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


다. 신라는 강했습니다.



신라 수도 월성은 광역도시입니다. 세계 무역도시입니다. 거기에 걸맞는 영토를 가진 나라입니다.



신라는 위대했습니다.





光濟 (2005-11-26 12:30:51)
그 잘난 신라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귀족과 백성들이 망향을 떠 안은 채 크나 큰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결단코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가우리 (2005-11-26 16:27:16)
그렇습니다. 그런 일은 있었지요. 김춘추가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하는 장면도 덩달아 있으며 망국의 백성들이 제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그 골품제때문에 출세를 못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문무왕 이후에 왕들은 이 9주 속주들 때문에 암살 또는 여러요인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지요.
가우리 (2005-11-26 16:29:42)
귀족 숙청또한 많았습니다. 하대사회는 화려한 문화를 이루기도 했지만 그 뒤에 있던 여러 모순들 때문에
하루에 사람들이 100명씩 죽어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요.
문 무 (2005-11-26 22:40:40)
* 만주원류고.
이 기록속에는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었던 상식을 뛰어넘는 여러 기록이 있읍니다. 물론 대륙 역사서 역시
우리 상식을 뛰어넘는 기록들이 있으나, 이를 해설하는 분들이 문제입니다.

<만주 원류고> ! 물론 옛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만주>라는 지명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만주>라는 지명이, 본시의 만주 팔기의 시원지는 어디일까.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