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찾아서

''코리족의 군장'' 칭기스칸이 지키고 계승하려 하였던 것?

대동이 2007. 2. 23. 10:21
칭기스칸은 왜 대제국을 건설했던 것일까 ?
'코리족의 군장' 칭기스칸이 지키고 계승하려 하였던 것
나참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역사 속에서 최고의 정복자는 단연 ‘칭기즈칸’이다. 그의 제국은 그 크기에서나 운영 시스템의 측면에서, 그 어떤 다른 제국들보다 탁월했다고 한다. 그는 그저 광적으로 제국을 넓히는 것에만 집착했던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어떤 이유를 가지고 정복전쟁을 수행했으며, 그 이전의, 그리고 그 이후의 어느 제국보다도 선진화된 시스템을 가지고 통치했던 ‘문명인’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세계 제국은 서구의 최고의 영웅들인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의 제국보다도 모든 면에서 탁월했으며,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상식적으로 알려진 역사 속에서 그는 최고의 정복자이자 문명창조자이다.

그러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정복활동에 유럽문명은 수백년에 걸쳐서 비난하고 저평가해왔다. 특히, 기독교 문명과 문화적 지평에서, 그는 언제나 ‘신의 저주(혹은 채찍)’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서구의 기독교적 이상으로서 천 년을 유지했던 ‘중세’가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엄청난 격변이 너무도 예상 밖으로 갑작스럽게, 그리고 파괴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서구’는 그와 그의 제국에 대해서 일종의 ‘트라우마’ 혹은 ‘신경증’ 증세를 갖기까지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유럽인들의 입장에서 ‘칭기스칸’의 정복은 그 명백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물을 수 없는, 그래서 그 어떤 ‘문명적 요소’를 찾을 수 없는, 문명적 부조리이자, 악의 구현, 야만, 혹은 그들의 불신과 게으름에 대한 신의 저주로 아주 오랜 세월동안 해석되어왔다.


요컨대, 그는 유럽인들에게는 심지어 아직까지도 ‘역사적/현실적’ 인간이 아니라, ‘신학적 존재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죄인의 머리위로 내리꽂히는 신의 벼락이거나, 세상의 모든 도시를 다 집어 삼켜버렸던 신의 홍수와도 같은 그 무엇에 불과하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로 말미암아 서구의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그와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말미암아 역사상 거의 최초로 동서양이 본격적으로 교류를 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의 제국이 거의 200년간 지속되었고, 제국이 몰락하고 한참 후인 현재에까지 많은 유산을 남기고 영향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상’의 영역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유럽인들의 ‘악몽’ 속의 ‘프레디’가 된다.

그러나 매우 당연하게도 오직 이런 식의 이해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일본은 유럽인들에 의해 신학화된 칭기즈칸을 각자 자기들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미국의 수많은 미래학자들, 세계화주의자들, 그리고 신보수주의자들에게 칭기즈칸과 그의 제국은 ‘카이사르’와 그의 제국 ‘로마’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들의 관점에서 칭기즈칸과 그의 ‘팍스 몽골리카’의 이념은 곧바로 ‘세계화’, ‘신세계 질서’, ‘팍스 아메리카’의 가장 확실하고 실증적인 역사적 모델이 된다. 그래서 이제 그의 정복전쟁은, 작고 상호 단절적인 단위들로 쪼개진 세계를 새롭고 커다란 단위 속에서 재정렬을 시켜서 전 세계적인 자유교역을 가능하게 한 세계화 전쟁이 된다. 정보와 물류가 전 세계를 자유로이 이동하면서, 그 이전의 통제와 국가 단위별 경제 체제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새로운 부와 문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 바로 이를 위해 칭기즈칸은 신화를 남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칭기즈칸은 미국에 의해 ‘자유무역주의자’가 된다.

한편, 일본은 미국보다 일찍이 칭기즈칸을 발견한다. 일본인들에게 칭기즈칸은 신의 저주도, 자유무역의 화신도 아니다. 이제 그는 이념화되고 영웅화된 무사로서 나타난다. 비록 역사적으로, 만주에서 동유럽까지 이어졌던 칭기즈칸의 욕망도 그 유명한 ‘신풍(神風)’으로 말미암아 일본 열도 앞의 바다에서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역사적으로, 그는 일본인들에게는 지속적으로 좌절되어 가슴에 사무친 대륙의 꿈을 가장 충동질하는, ‘성배’와도 같은 인물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성배’는 두려움과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듯이, 일본인들에게 ‘대륙’은 한(恨)과 동경의 신천지 영역이며, 그 한가운데에 칭기즈칸이 서있다. 칭기즈칸이 말달리던 대륙과 초원을, 그 끝없는 지평선의 이동을 일본인들은 영원히 닿지 않는, 그러나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무지개와 같은 것으로, 그래서 마침내 그들의 ‘대동아공영권’의 꿈으로 이상화하기에 이른다. 제아무리 ‘사무라이의 꿈’이 원대하다 할지라도 ‘섬’이라는 운명적 제약은 그들이 진정한 영웅으로 성장하는데 근본적인 제약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칭기즈칸은 일본인들에 의해 그들의 ‘콤플렉스 치료제’임과 동시에 ‘제국주의 이념의 신화소’가 된다.

칭기즈칸은 왜 유라시아를 정복하려 했던 것일까? 그는 왜 자신의 삶을 이것에 쏟아 부어야 했던 것일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엄청난’, 그래서 7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쳐 해석되지 않은 꿈을 꾸게 하고, 그것을 실행하게 했던 것일까? 또한 무엇이 그로 하여금 단 한 번의 ‘실수’나 ‘실패’도 없이 이런 과업을 실현시킬 수 있게 한 것일까? 이런 ‘과정상으로나’, ‘결과적으로나’ 완벽한 성공이 다시 한 번 가능할 수는 있는 것일까? 이게 사실의 공간인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었던가? 이건 불가능한 것 아닌가? 그래서 그는 하나의 환상이나 혹은 유라시아의 신화는 아닐까?

아직도 그의 역사는 실존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적절한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직까지도 뭔가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기 보다는 얼추 그의 전모를 드러내 보여주는 일반적 해석도 갖추어져 있지 못하다. 그는 아직도 미지의 인물이다. 그의 모든 것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묻혀있다. 누군가 그의 미스터리를 발굴해야만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의 시조는 위대한 영웅 ‘코릴라르타이-메르겐’과 그의 따님이자 몽골민족의 성녀‘알랑-고아’이다. 어렸을 적, 부족장이었던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고, 그와 형제들은 어머니와 함께 황야로 내쫓겨 늑대의 먹이감이 되는 위기에 처하지만, 초인에 가까운 생존력과 지혜로써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아버지의 복수에 성공하고, 이후 ‘피의 복수전’으로 얼룩져있는 몽골평원과 전 몽골족을 하나로 규합하여 대족장이 되고, 이어 세계 대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그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영웅코드’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성한 계보와 불후한 어린 시절, 그리고 그것을 지혜로써 극복하고, 강건한 인물이 되어 마침내 역사의 위대한 영웅이 된다. 이런 영웅신화코드는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흔하게 발견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나 신화 속에서도 쉽게 발견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위대한 ‘고구려(고구리, 혹은 고리)’의 건국자인 ‘주몽’이다.

주몽은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황제국 북부여의 해모수의 후손과 현재 황하유역의 지배자인 하백의 딸 유화(柳花) 사이에서 일종의 사생아로 태어난다.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유화는 북부여나, 아버지와 살 수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제후국 동부여로 가서 살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주몽은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신성한 피를 이어받은 이유로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강건했기에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마침내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규합해서 동부여를 빠져나와 세계적인 대제국인 고구려(고구리, 혹은 고리)를 건국하게 된다.

고구려(고구리, 혹은 고리)의 건국자인 ‘주몽’ 이야기와 원나라의 건국자인 ‘태무진(칭기즈칸의 본명)이야기 사이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연관성‘이 발견되는데, 이 관련은 ’유화-주몽‘과 태무진의 시조인 ‘코릴라르타이-메르겐 과 그의 따님인 알랑-고아’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먼저, 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버드나무 꽃’이라는 뜻인데, 우선 그녀의 이름은 만주와 몽골 지역의 모든 종족에서 가장 칭송받는 나무인 버드나무와 연관되며, 아름다움과 생산력의 여신의 이미지로서 남아있다. 그래서 고구려에서도 ‘유화’는 영원한 어머니이자 처녀 신으로서 받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주몽’은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만주/연해주/몽골에 걸쳐있던 ‘부여’의 언어에서 ‘활쏘기의 명인’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이런 ‘유화-주몽’의 ‘모자신화’는 몽골에서는 ‘코릴라르타이-메르겐 과 그의 따님인 알랑-고아’ 사이의 ‘부녀신화’로 이어진다. 유일한 차이는, ‘어머니-아들’이 ‘아버지-딸’로 역전되고 있다는 것뿐이다.


우선, 알랑-고아(Alan-Go'a)는 ‘알랑 미인(美人)’이란 말로서 몽골민족의 성녀(聖女)이며, 이 이름에 들어간 ‘고아’는 곱다(beautiful)는 의미이고, ‘알랑’이란 우리가 자주 들어온 아랑 설화의 그 ‘아랑’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렇게 유화부인과 유사한 이미지를 가지는 ‘알랑-고아’는 이제 다음의 이야기에서 유화부인과 구별이 안 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밤바다 밝은 금빛을 띤 사람이 겔(몽골인의 천막집)의 에루게(천막 위로난 창문)의 창문을 통해 빛처럼 들어와 나의 배를 비치자 그 빛이 내 뱃속으로 들어왔다. … 뱃속의 아이는 하늘의 아들이다 … 이 아이가 우리 모두의 칸이 되면 일반 사람들은 이 아이의 내력을 알게 되리라 (『몽골비사』)”

이런 유사성은 알랑-고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알랑-고아의 아버지는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코리족의 선사자(善射者)”라는 의미다. 이 ‘선사자’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보자면 ‘주몽(朱蒙)’이다. 다시 말해서 칭기즈칸의 선조인 알랑-고아의 아버지는 고주몽(高朱蒙 : 코리족의 명궁)이라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유사성은 다시『몽골비사』에서 또다시 발견된다:


“알랑-고아의 아버지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냥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아름다운 여인 바르고진을 아리ㄱ 오손(Arig-Usun : 청결한 강이라는 뜻)에서 만나 알랑 고아를 낳습니다. 그런데 ‘코릴라르타이-메르겐’에게는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 사냥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하는 무리들이 나타납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람들을 모아 코릴라르(Khorilar, 고리족 사람)라는 씨족을 만들어 성스러운 산 보르칸으로 이동합니다.”

참고로 『몽골비사』에 보면 알탄 칸(금나라의 황제)이 타타르가 자신에 복종하지 않자 칭기즈칸에 협력을 요청하고, 칭기즈칸이 타타르를 정벌한다. 이 때 칭기즈칸이 받은 칭호가 ‘자오드 코리(札兀忽里)’이다(『몽골비사』134절). 여기서 ‘자오드’는 ‘족장을 의미하며, ’코리‘는 바로 ’고리‘로서, 결국 이는 태무친이 ’고리족의 족장(우두머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본적 의문들, 혹은 반박들을 예상한다.
1. 고구려의 건국자 ‘주몽’이 태무진의 최초 시조인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며,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는 ‘알랑-고아’인가?
2. 고구려의 원주민은 한민족이 아니라, 몽골족이거나, 혹은 한민족과 몽골족은 같은 민족인가?

이미 지적했던 대로, 주몽과 유화부인 이야기는 고구려나 몽골뿐만이 아니라, 거란족과 여진족, 선비족, 돌궐족 등, 전통적으로 동이 혹은 동호에 해당하는 만주-시베리아 전 민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이에 대해서는 『왜 우리 신화인가 (동북아 신화의 뿌리. <천궁대전>과 우리 신화, 김재용, 동아시아)』를 참고하시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주몽-유화부인’ 신화는 단순히 우리 역사상의 한 나라인 고구려에만 해당하는 신화가 아니라, 바로 범 ‘만주-시베리아 영웅신화의 원형’임을 의미하며, 이에 ‘주몽’은 고구려의 건국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이/동호족 문명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주몽-유화’는 역사적 실존인물인가 아닌가 라는 지평에 한정되기 보다는 범동아시아 신화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신화소’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역사 속에서 ‘주몽-유화’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는가 아닌가 라는 물음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며, 이제 우리는 역사 속에서 모든 북방 유목민족들이 단일한 신화적 구도 속에서 살았으며, 세상을 이해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지중해 지역의 모든 민족들이 거의 유사하게 '예수신화‘ 속에서 생각하고, 살았던 것처럼(『예수는 신화다』, 티모시 프리크, 승영조, 동아일보사), 동아시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주몽‘과 그의 제국의 꿈이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비록 ‘주몽’과 ‘유화’가 범동아시아 신화의 신화소일지라도,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단순히 그들의 역사적 실존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보다는, 신화소로 존재한다는 것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단순한 역사적 실존성의 긍정과 부정을 초월하는 것이며, 오히려 그들의 존재와 의미를 가능한 한 가장 최고로 긍정한다는 점이다.


즉, 아주 오래 전 그 어떤 위대한 인물의 등장과 그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비로소 민족적/문화적/종교적/역사적/신화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으며, 이것을 세세토록 간직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후 지속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삶을 방향지우며, 평가하고,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의 모든 영웅들은 그때마다 주몽이 된다.

이런 이유로, 고구려와 몽골이 유사한 신화를 공유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 둘이 정확히 동일한 혈족임을 결정적으로 증명하지는 않는다. 물론, 깊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정확히 동일한 혈족이기 때문이기 보다는 서로 근접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존해왔다는 역사적이고 환경적인 사실들에서 보다 정확히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그 둘이 혹은 주몽신화를 공유하는 여러 북방 민족이 ‘하나’에서 갈라진 여러 형제들일 수도 있고, 그 보다는 그들 모두 ‘공동운명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북방지역의 역사를 단순한 현대적 혈통적 민족지학적으로, 혹은 허구적 ‘국민국가’적 개념으로 갈기 갈기 찢어버리기 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통일 문명권’으로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몽골비사』와 실제적 역사적 연구에 따르면, 칭기즈칸을 배출한 부족이 8세기 경 북만주의 흑룡강 지역에서 지금의 몽골지역으로 이동해서 몽골문화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이는 분명, 전통적인 ‘오랑캐 관’에 따라 ‘몽골’을 터부시했던 우리의 ‘小華論’과 정면으로 배치되며, 우리 역사상의 큰 봉우리인 고구려(고구리, 고리)가 후에 몽골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이런 범동아시아의 신화소로서의 ‘주몽-유화’를 발견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한 위치에 도달하게 되었다: ‘조선-부여-고구려-흉노-선비-돌궐-거란-여진-말갈-몽골’ 등의 북방민족들 각각의 역사는, 비록 끊임없이 서로 경쟁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독립적이고 분리된, 별개의 역사가 아니며, 실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세계관과 역사관의 공유를 전제로 한 상태에서 벌어진, 단일 문명권 내적으로 계속되는 주도권 싸움의 과정이었을 수 있다. 이들은 하나의 거대한 문명권을 구성하고 있는 상호 이질적 요소들로서 평가될 수 있다.

우리가 이 북방민족들의 역사를 하나의 단일한 거대 문명권의 역사로 이해할 때, 우리는 기존의 ‘오랑캐/중화사관’이나, ‘유목민족/농경민족’ 등의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졌던 역사적 ‘이원론’을 폐기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중원대륙은 거의 대부분 단일 문명권의 구성원들인 여러 북방민족들에게 지배되어 왔다는 의미에서, 소위 ‘중화’는 그 실체가 없는 허구적 문명/역사 단위일 뿐이며, 우리 조선과 부여, 그리고 고구려가 처음부터 ‘반농/반목’의 경제/사회구조를 갖추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북방의 단일 문명권을 단순히 야만적 유목민족들의 파편적 역사의 불연속적 흐름으로 이해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단지 역사적 상황과 각각의 주도적 세력들 간의 부분적인 차이들만이 존재했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이미 자체 내에 여러 이질적 요소들을 간직하고 있는 하나의 거대 문명권의 역사만이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현재 온갖 왜곡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공인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흉노는 ‘훈’으로 중원의 漢을 위축시키고 동유럽까지 팽창해서 게르만 족의 서진을 유도했고, 이 결과로 서로마가 멸망하고, 서구의 ‘중세’를 가능하게 했으며, 돌궐은 ‘셀주크 투르크’라는 이름으로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하고,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을 계승, 서구에 전달해 주어 서구의 중세를 풍요롭게 해주었으며, 후에 몽골은 중원의 남송을 제압, 중원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다시 동유럽까지 세력을 넓혀 서구의 중세를 붕괴시키면서 명실 공히 ‘팍스 몽골리카’를 건설했으며, 후에 돌궐은 다시 ‘오스만 투르크’로, 여진은 ‘淸나라’로, 유라시아 대륙을 양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계사 전체 속에는 언제나 ‘주몽과 유화’가 살아있었다.

굳이 우리의 상고사에 대한 논란을 언급할 이유도 없다. 제 아무리 매국/매판 세력들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삭제시켜도 소용이 없다. 우리의 마음속에 주몽과 유화가 있는 한, 우리들 중 누군가는 끊임없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주몽과 유화를 기억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다시 그들보다 더 오래된 신성한 이야기들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토록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일단의 민족사관주의자들이 우리의 역사를 세계의 시원문명이라 주장하는 이유를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방법론적으로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단순한 국수주의나 혈통지상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까지의 간략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칭기즈칸’을 ‘북방의 대문명권’의 지평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이에 대한 연구가 학문적인 위상에서 평가받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런 엄밀한 학문적 연구조차도 그 출발은 학문적인 것과는 다른 그 무엇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보다 자유롭게 생각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학문적 성과에서 드러난 칭기즈칸에 대한 이해가 진실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거칠게나마 분명하게 기존과는 다른 관점에서 그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칭기즈칸을 악몽 속의 프레디나, 혹은 유태-세계 자본가 세력의 원조로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들의 역사적 콤플렉스의 보상물로서가 아니라, 시원적이고, 가장 위대한 단일 문명권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살았으며, 부단히 그 영광을 계승하고 부활시키려 했던 역사적 영웅으로 그를 평가하고 싶다. 그가 수행했던 모든 정복전쟁은 야만적이고 맹목적인 무정부적 확장주의도, 전 세계를 착취하려 의도된 잔인하고 교활한 제국주의적 과정도 아니다. 그보다는 부단히 과거의 영광을 수호하고자한 시도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역사 속에서 반복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