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관측은 우리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을 남겼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인 증거다. 그런데도 이 땅의 사학자들은 과학적 증거가 제시 되었음에도 기껏 자구해석에나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엉뚱한 데서 헤매고 있다. 절대적인 증거는 결연히 외면하고 언제든지 부정될 수 있는 문헌기록(文獻記錄)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요수(遼水)가 있는 땅은 百濟와 高句麗의 영토이고, 大震國의 영토다. 高麗도 遼西를 차지하고 있었다. 中國은 천문관측할 수 없는 땅이다. 중국 역사책에 기록된 천문관측 기록은 中國이 한 관측이 아니다. 中國 역사책에서 조차 우리나라 땅이라고 나와 있는 지역에서, 더구나 전쟁터에서 천문관측하는 사람은 없다. 중국 통일국가의 일식(日蝕:사서에서는 日食으로 표시되어 있다) 관측지 조차 표시되어 있지 않은 기록들을 수작업으로 위도가 다른 三國의 천문관측 기록으로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이 정말로 천문관측한 나라라면, 여러 천문대를 운용한 나라라면, 천문기록을 뒤섞어 놓지는 않았다.
우리나라가 실측이고 中國(정확하게 明, 淸)이 베꼈던 것이다. 천문기록은 과학적 증거이다. 과학적 증거는 절대적 증거이다. 그러므로 천문관측 기록은 절대적인 증거이다. 中國이, 日本이 수십 억권의 책을 가공하고 날조해도 일식기록 하나만 있으면 소설책 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없애지 않는 한, 3 조원 아니라, 30 조원, 300 조원을 들여 역사왜곡 한다해도 다 소용없는 짓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 했었다는 과학적 증거는 이제 충분하다. 그런데도 이 땅의 사학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桓檀史를 부정(桓檀古記의 부정) 하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더불어 증거의 가치를 전혀 모른다는 것과 종합적인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도 큰 문제다. 재야 사학자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것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치부해 버리고 새 하늘이 있음을 애써 외면 하면서 이러한 역사찾기 운동을 아주 사악한 것으로 본다. 도대체 누가 더 사악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늘에 새긴 역사』가 출판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발해(渤海)연안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하여 高句麗 시기 동북아시아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했다.”는 책이 나오는 실정이다. 발해만(渤海灣)에는 高句麗가 아니라, 百濟가 있었다. 그리고 한민족 문화는 “渤海연안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하지도 않았다. 만주(滿州)와 韓半島에서 발생하여 慈烏支 桓雄(蚩尤天皇) 이후 중국 대륙에서 발전한 문화가 韓文化를 주도했다. 三國時代에는 百濟가 한문화(韓文化)를 주도했다. 渤海灣은 百濟의 중심지에서 떨어진 관계로 “동북아시아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할 수도 없었다.
三國史記의 日蝕記錄에 의하면, 高句麗는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 이북에서 중국 北部, 百濟는 渤海灣, 新羅는 揚子江 유역에 있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일식기록이 극소수라서 三國의 영토는 이들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朝鮮의 일식관측지가 黃河 이남이고, 大震國의 일식관측지가 시베리아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중국대륙의 전 지역 이라는 의미다.
中國 동부에는 아직도 우리나라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중국 동부에서 三國은 수 세기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여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 고지도를 보면, 黃河 하류에다 殷나라 발생지와 夏나라 도읍까지 다 그려두었다. 일식기록으로 본 三國의 영토가 접하는 지역에, 三國이 치열하게 접전을 벌인 지역에 중국의 주요도시와 수도가 몰려 있었다고 표시해둔 것이다. 당연히 날조다.
우리나라가 중국 대륙에 있었는데, 어째서 우리역사에는 黃河와 長江이 등장하지 않을까. 黃河와 長江이 있었다면, 김부식(金富軾)에게 책임을 전가해 한반도 어디에다 억지로 끼워 맞추었거나, 못 찾았다는 지명 360개에다 포함시켰을 것이다. 반면 中國史에는 黃河와 長江이 나온다. 중국이 黃河라 불렀던 것은 역사왜곡일까. 중국사를 빈번히 장식하는 이런 중요한 江도 왜곡할까. 솔직히 中國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모든 나라는 江을 끼고 성립한다. 그만큼 물이 중요한 까닭이다. 中國 東部는 三國의 혼전 지역이다. 그러므로 중국 동부를 차지한 고구려, 백제, 신라 영토 너머 중국 내륙부까지 강이 뻗어가야 했다. 중국에 그런 강이 몇 개인가. 黃河하고 揚子江 둘이다. 夏, 殷, 周가 세워진 강은 黃河가 아니라, 揚子江이다. 양자강을 잘라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지금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중국 남부 한강(韓江) 동북쪽에 금강(錦江), 백마(白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錦江이니까, 강이어야 하고 白馬江 역시 어딘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금강, 백마강 이전에 사비하(泗沘河)라고 불렀다. 白馬는 江 이외에 마을 지명 으로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韓江? 우리나라 강은 漢江이다[半島의 아리수(阿利水)를 사학계에서는 漢水로 보았고 이제는 서울을 관통하는 이름으로 정착 되었지만 漢江은 아리수라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이는 百濟를 漢城百濟로 한정시키는 오류의 시초이다]. 韓江 이전에는 한수(漢水)였다. 한수(漢水)는 섬서성(陝西省) 영강현 북쪽 파총산(播潨山)에서 흐르는 물을 말한다.
朝鮮과 三國 그리고 일본이 베낀 일식기록은 중국의 역사가 중국 대륙 전체와 동북아에서 일어 났다고 기술한 중국의 25 史가 전면적으로 날조 되었음을 증명한다. 중국 고지도 에서도 지명이 단계적으로 밀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朝鮮과 三國 그리고 일본이 베낀 일식기록은 中國의 地名이 동북아 이전부터 전부 밀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중국 대륙의 지명이 밀린 사실은 중국의 현재 지도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南京이 中京보다 위도 3 ° 가량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300 km쯤 된다. 南京, 中京은 중국이 붙인 지명이 아니다. 그래서 밀어낸 것이다. 중국이 스스로 붙인 지명 이라면 남경, 중경의 지명이 서로 바뀌었을 것이다. 고위도 부터 北京, 中京, 南京 순으로.
사천성(四川省)에는 揚子江 북안, 삼협(三浹)(중국말로? 싼샤라고 발음하고 있지만) 서쪽에 백제성(白帝城)이 있다. 한자는 바꾸었지만, 누가 봐도 百濟城을 白帝城으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白帝는 태백일사(太白逸史)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에 나오는 우리나라 오제(五帝 : 靑,黃,赤,白,黑帝)의 하나로 성수(星宿 : 별자리)를 주관한다. 중국이 훔친 28 수(宿)에도 白帝가 나오는데, 28 수는 桓檀 이래로 우리나라 천문용어이다. 百濟城이 아니라, 白帝城이라면 어째서 나머지 五帝城은 없는가. 청제(靑帝)城 적제(赤帝)城 황제(黃帝)城, 흑제(黑帝)城도 있어야 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중국이 자기네 시조(始祖)로 떠받는 염제(炎帝 : 神農氏)城, 황제(黃帝 : 軒轅氏)城부터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지명을 같은 음의 다른 한자로 바꾼 것은 비단 百濟城, 白帝城만이 아니다.
新羅가 현 武漢과 중국 남부, 한반도(韓半島), 흑룡강(黑龍江) 등에서 천문관측한 것처럼, 百濟도 발해만 에서만 천문관측 하지 않았다. 백제는 중국 남부에도 있었다. 白帝城은 북쪽으로 밀린 지명 이었던 것이다.
▲ 고려영의 위치 : 高麗營의 유래를 보면 唐나라 시기에 朝鮮人들이 이 곳에 모여 살면서 발전을 한 것이 유래이며 淸나라 시기에는 강희(康熙) 년간에 칠촌(七村) 청진사(淸眞寺)가 있었으며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 곳은 회족(回族)들이 예배를 보던 중요한 장소라 한다. 옛부터 장사아치들이 운집을 하여 거래가 왕성했으며, 이로써 이 곳이 "北京과 河北省의 제일중진(第一重鎭)"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据史料记载,中国唐朝年间有部分鲜族人内徙定居于此,逐步发展成集镇,是为高丽营的由来。北京市顺义区高丽营镇历史悠久,有着丰厚的文化底蕴。建于清朝康熙年间的七村清真寺,至今保存完好,是当地回族居民做礼拜的重要场所。且自古商贾云集,购销两旺,成为远近闻名的"京北第一重镇"。 http://www.gaoly.bjshy.gov.cn/ 참조). 이 곳 高麗營은 北京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20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이며 인구가 3 만명정도이며 2 개의 초등학교와 2 개의 중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지나인(支那人)들이 순의(順義)區를 설명하는 구절에 이 곳이 어양(漁陽)지역 이였다고 설명 합니다.
[百濟 영토 내에 高麗營이 있다. 아직도 고려영에는 성을 쌓았던 흔적과 해자(垓子)가 남아 있다. 고려영은 공들여 쌓은 성으로 군대의 임시 주둔지가 아니라, 常時 주둔지였다. 혹자는 高句麗城이라는 뜻이라고 하지만, 高麗의 城일 가능성이 높다. 列國時代에는 百濟의 城이 있어야 할 땅이었다. 용도성(鄘道城)을 개축한 高麗鎭이 高麗營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鄘道城은 西鴨綠江 유역에 있었다. 상건하(桑乾河)는 李氏朝鮮 초의 서압록강에 불과하다]
49 년 모본열제(慕本烈帝) 때 漢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공격했는데, 실증 한단고기에는 이들 지명이 후대에 생겨났다고 했다. [閔中烈帝의 뒤를 이은 慕本烈帝는 大武神烈帝의 아들로 대단히 흉포했다고 한다. 그러나 폭군이였는지는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다. 慕本烈帝 2 년(A.D. 49) 왕은 장수를 보내어 後漢의 右北平, 漁陽, 上谷, 太原을 습격케 하니 後漢의 요동태수 채융(蔡彤)이 정성을 다해 우리에게 대하므로 다시 後漢과 화친 했다는 기록이 三國史記, 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다(二年春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後漢書). 여기서 右北平은 지금의 北京 동북 300 리 지점이고, 漁陽은 北京 동부 지역이며, 上谷은 北京 북부지역으로 중국의 북방 전진기지로 중요한 요충지이며, 太原은 오늘날 山西省의 성도(省都)로 당시 북중국의 중심지였다]
天文觀測으로 찾은 韓國史에 의하면 後漢은 百濟의 다른 이름이다.
한서와 후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군, 조선, 패수, 수성, 누방, 열수, 열구 등이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지명들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차츰 새로운 이름으로 대치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겨난 지명들이 북평, 우북평, 상곡, 어양, 현토, 요동 및 요서, 영주, 평주, 대방, 상산 등이다.
漢書는 92 년에, 後漢書는 70 년 말에 완성했다면서, 漢書와 後漢書에도 없는 지명을 慕本烈帝는 어떻게 공격할 수 있었는가. 北平, 右北平, 上谷, 漁陽, 玄兎, 遼東 및 遼西, 營洲, 平州, 帶方, 象山은 새로 생겨난 지명이 아니다. 原 中土에 있던 지명이다.
中土의 지명을 中土 밖으로 밀어낸 것은 역사를 날조한 朱元璋이다. 이들 지명은 李氏朝鮮 땅을 단계적으로 빼앗은 淸 때 여러 번의 재조정을 거쳐 현재의 장소로 밀려났다.
원래 北平은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 이었으며, 元, 明을 거치면서 비로소 현재의 北京을 북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25 사 지리지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한서지리지에는 현 북경의 서남쪽인 하북성 역현(易縣) 지역을 북평이라 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중원의 여러 지명이 점차 동쪽으로 이동해 왔음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역현은 옛날 연(燕)나라의 도읍지가 있던 곳이다. 즉 연나라의 도읍을 북평 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 오면서 북평이란 지명이 북경으로 옮겨지자, 마치 연나라의 도읍지가 북경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 원래 연나라의 도읍지는 역수가 있는 역현과 탁현 일대이다.(실증 한단고기)
後漢書의 일식기록은 百濟가 현 北京에서 관측한 기록이다. 그러니까 현 河北省과 山西省 일부는 百濟 영토였다.
訓民正音 解例本에 中國을 “江南의 황제가 있는 나라다 (이때는 이미 北京에 도읍을 정한 뒤,,北京은 李氏朝鮮의 도읍지였다)”라는 주석이 있다. 明은 揚子江 이남에 있었고, 따라서 揚子江 이남으로 北京(북평)을 밀어냈던 것이다. 燕은 옛 長江 이남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明이 역사날조 당시 “倭는 燕에 속한다.”고 했다. 燕이 발해만에 있다고 날조한 것은 淸이다.
河北은 原 黃河 너머를 가리키던 지명이다. 北平이 山西와 河北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날조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山西도 원 黃河 부근에 있었다. 현재 중국의 행정구역을 보면, 山西와 山東이 떨어져 있지만, 예전에는 붙어 있었다. 예전에는 河北지방이 山西지방 남서쪽에 있었다.
오늘날의 山東은 산의 동쪽(山東)이 아니다. 山東, 山西의 기준이 되는 산은 太行山脈이다. 그런데 태행산맥 서쪽을 산서(山西)라 하면서 태행산맥 동쪽을 山中도 아니고 하북, 하남이라 한 것이다. 山東 이라면서 黃河 너머에서 부터 시작하고 있다. 원 中土의 지명을 중국 대륙에 억지로 끼워 맞추다 보니까, 불가피했던 것이다.
李氏朝鮮 초에서 중기 까지는 遼水가 상건하(桑乾河)였기 때문에 黃河 이북에는 遼西, 遼東의 지명을 붙였다. 李成桂가 중국 대륙에 있던 지명을 韓半島를 중심으로 우겨넣고, 明에 이어 淸이 中土의 지명을 밀어내자, 마치 처음부터 北京이 오늘날의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인식된데 불과하다.
元은 北平을 밀어내지 않았다. 元은 중국의 왕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明이 지명을 밀어내면서 元을 물귀신처럼 끌어들인 것이다. 元은 朝鮮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우두머리를 징기스칸(汗;한), 쿠빌라이칸(汗)이라 하고, 그들이 세운 나라를 오고타이‘汗國’, 차가타이‘汗國’, 일‘汗國’, 킵차크‘汗國’이라 했다. 몽골은 우리민족이다.
蒙古와 거란(契丹), 女眞은 朝鮮, 高句麗의 계승국을 자처했던 나라다. 나머지 異民族도 모두 정복한다는 생각으로 中土를 차지한 것이지, 中奴가 되기를 염원해 中土에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다. 단 滿州族(揚子江 이북의 淸)은 中奴가 되기를 열망해 역사도 날조하고, 지명도 밀어냈다. 그래도 隸貊族이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다.”는 기록은 남겨 두었다. 滿州族으로 종족명을 바꾸면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산” 미개종족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다고 여겼던가. 하기야 끝내는 滿州族이라는 종족명조차 生女眞에게 넘기고, 漢族으로 변신했으니까.
▲ 몽한 중토 침입시의 고려강역도
蒙古가 세운 나라의 國名은 元이 아니었다. 제 자식들에게 분봉한 땅은 오고타이‘汗國’, 차가타이‘汗國’, 일‘汗國’, 킵차크‘汗國’이라 하고, 정작 본국은 元이라 했단 말인가. 蒙古는 통치자의 호칭마저 한(汗)이라고 했던 나라다. 우리나라의 계승국이 되는 것이 蒙古의 최대염원 이었다.
그래서 국호마저 몽한국(蒙汗國)이라 했다. 이는 일본원정에 나선 몽고군을 몽한군(蒙漢軍)이라 부른 데서도 알 수 있다. 汗은 우리민족만을 지칭하는 말이다. 蒙漢軍은 蒙汗軍이었다. 明이 역사를 날조하면서 蒙汗軍을 蒙漢軍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蒙軍, 元軍은 이상했던가.
汗이 땀나다는 뜻이라고? 그렇다면 거란도, 女眞도, 蒙古도 汗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저들은 우두머리 까지도 汗이라 불렀다. 당연히 유추할 수 있는 汗의 뜻은 왕, 지배자다. 明이 字典을 만들면서 지운 것이 분명하다. 구한(九汗,九桓 : 배달의 강역을 구한이라고 했다. 이 때의 桓은 환이 아니라, 한으로 天의 古語다)을 나누어 다스리는 각각의 우두머리(蚩尤天皇으로 부터 연유한다)를 汗이라 불렀다. “戊戌 28 년 구한(九桓)의 여러 한(汗)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三神과 上帝에게 제사 지냈다(戊戌二十八年會九桓諸汗于寧古塔祭三神上帝 檀君世紀)."
정작 원(元)이라 한 것은 우리나라이다. 대원국(大元國). 大震國 유민이 세운 나라의 하나다. 우리나라나 피지배종족들은 한단사(桓檀史)에서 국호를 따왔으니까, 元도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 있는 이름이 분명하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보면 淸 역시 처음에는 금한국(金汗國)이었다. “태조 누루하치(努爾哈赤)에 이르러 궐연히 건주(乾州)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팔기병을 거느리고 滿州를 석권, 금한국(金汗國)을 세웠다(太祖努爾哈赤蹶然奮興於建州之地 率八旗之師而席卷滿洲創金汗國).” 1115 년에 세운 금나라(金國) 역시 금한국(金汗國)이었다. 그래서 淸을 일명 後金이라 했다. 요나라(遼國)도 요한국(遼汗國)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隋, 唐 역시 다른 국명을 사용했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遼는 요만(遼滿)의 들녘에서, 唐은 당장(唐莊 혹은 唐藏)의 들녘에서 따온 글자이다. 遼라는 말도 우리나라가 먼저 사용했다. 흥요국(興遼國). 1029 년에 大震國 유민이 세웠다는 것은 날조고, 929 년쯤에 세웠다. 나라가 멸망하고 104 년이나 지나서 재건하는 예는 세계사에 없다. 이스라엘은 유대인들 스스로 세운 나라가 아니라, 잉글랜드와 미국 주도하에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만든 나라다. 무엇보다 大震國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들은 大震國의 핵심 요충지에 몰려 있었는데, 高麗가 後三國을 통일한 936 년 직후 그 땅을 회복했다. 거란(契丹)이 먼저 遼라고 했다면, 거란에게 멸망한 大震國의 유민이 세운 나라가 국호로 遼를 사용할 리 없지 않은가. 거란은 946 년에 遼汗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興遼라 한 것으로 보아 요만(遼滿)의 들녘에 세운 나라로 추정된다.
나라이름 遼는 興遼를 세우고 나서 파생된 뜻이다. ‘멀다’라는 뜻으로 국호를 짓는 나라는 없으니 이 역시 중국이 지운 것으로 추정된다. 桓은 하늘이라는 뜻이고, 韓은 크다는 뜻, 漢은 기록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玉篇에는 銀河水라고 나온다. 6 천년 이상 지속적으로 천문관측해온 우리나라에 딱 어울리는 말 아닌가.
지명을 밀어내면, 蒙汗은 朝鮮의 계승국이 아니라, 中國의 왕조로 변하고 만다. 현 北京은 몽고간섭기(? 蒙汗은 高麗에 침입한 적도 없고, 다만 蒙汗 여자를 皇后로 삼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간섭기라는 것은 지나친 말이다)를 제외 하고는 내내 百濟, 新羅, 高麗의 영토였다. 몽고간섭기에도 현 黃河 이남에는 高麗가 건재했고, 동북아도 高麗의 영토이다. 蒙汗이 유독 北京만을 中土 밖으로 옮겼단 말인가. 中奴가 싫다고 중토봉쇄까지 단행한 나라가 아닌가. 蒙汗은 현 北京을 大都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元, 明을 거치면서 비로소 현재의 北京을 北平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北平이라 부른 北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제 중국 대륙에 있었던 우리나라 지명을 찾아보자. 黃河 하류에 아주 중요한 지명이 보인다. 요택(遼澤)이라고. 요택(遼澤)이 어떤 곳인가. 1차 高唐(?) 전쟁에서 唐王 李世民이 패주할 때 허겁지겁 정신없이 이용한 퇴각로다. 遼澤은 자연 늪지가 도처에 널려 있는 땅이라고 했다. 지금이야 개발한다고 黃河에 늪지를 남겨두지 않겠지만, 黃河가 큰 강인 만큼 그 옛날에는 늪지가 도처에 널려 있었을 것이다.
황제(李世民)는 1 만명의 군사에게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는 수레를 다리 삼아 건너게 했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馬鞘)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왔다(命無忌將萬人翦草塡道水深處以車爲梁帝自繫薪於馬鞘以助役 三國史記).
半島史觀을 만들어냈다는 金富軾의 三國史記에 나오는 기록이다. 그 遼澤이 黃河 하류에 버젓이 존재하는 것이다. 黃河가 遼水라면, 黃河 하류를 중심으로 위쪽이 遼西가 되고, 아래가 遼東이 된다.
그러면 과연 黃河 이남에다 성을 몇 개씩이나 쌓을 전략적 가치가 있는가. 물론이다. 百濟가 발해만에, 新羅가 중국 동부에 있었다. 高句麗가 반드시 현 黃河 중류나 하류를 차지해야만, 三國 간에 전투가 수세기 동안 전개 가능하다. 그렇다면 李世民이 黃河 하류로 부터 침공 하겠는가. 唐이 黃河 중류 이남에 있었고 高句麗 皇城이 黃河 하류 이북에 있었다면, 공격로는 오대산맥(五臺山脈)과 黃河 하류 두 갈래가 될 것이므로 黃河 하류로 부터의 공격은 필수적이다. 이 경우 黃河 하류의 성들을 그대로 두고 가면, 배후공격을 받아 패할 수밖에 없다. 배후공격은 승리의 첩경이다. 그래서 적의 배후를 찾아 기동전이 발달한 것이다.
▲ 삼국시대의 전쟁도
그렇다면 黃河가 遼水인가.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遼澤만이 제자리에 붙박혀 있을 수 있는가. 요택도 밀려났던 것이다. 더구나 黃河는 동서로 흐르는 강이라 遼北, 遼南은 돼도 遼東, 遼西로 나눌 수는 없는 지형이다. 결정적으로 “百濟는 본래 高句麗와 함께 遼東의 동쪽 천 여리에 있었다.”는 宋書의 기사가 성립할 수 없다. 遼東의 동쪽 천 여리는 黃海니까. 또한 百濟 영토가 桑乾河 以東(百濟는 발해만에서 내내 일식관측했으니까, 더 이상 축소될 수 없다)이고 상건하 以西가 高句麗 영토면, 新羅와 百濟의 전쟁이 불가능해진다.
百濟가 말기에는 발해만도 일부 상실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水經注의 기록대로 桑乾河가 遼水가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만일 상건하가 遼水라고 한다면, 요택은 중국 지명 사상, 유일무이하게 뒤로 물러나온 지명이 된다. 물론 中國은 지명을 南으로도 밀었다. 그러나 遼水를 북동방으로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遼水의 한 지점이 반대로 이동하는 것은 명백한 후퇴다. 더구나 遼東은 고구려 영토니까, 桑乾河가 遼水라면, 요동의 동쪽 천 여리에 위치한 百濟는 발해만에 없었다는 결과가 되고 만다.
중국 지도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중국 지도는 역사왜곡용으로 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三國史記와 삼국사기의 일식관측기록에 따라 漢水와 황산강(黃山江)을 찾기로 했다.
일식기록으로 찾은 新羅의 강역이 揚子江 이라고 했다. 新羅는 黃山江에서 시작했다. 날조사에 의하면 끝까지 黃山江에 위치했다. 바로 揚子江이 黃山江 이었던 것이다. 高句麗가 최대 판도였을 때(文咨好太烈帝), 黃山江 이남까지 확보했다. 廣開土境好太皇은 黃山江 이남으로 진출, 倭를 격파했다.
천문기록으로 살펴본 百濟의 강역은 발해만이다. 백제는 漢水에서 건국한 나라다. 그러면 영정하(永定河)나, 조백신하(潮白新河), 난하( 灤河), 대능하(大凌河)가 漢水? 百濟는 나중에 漢水를 상실했다. 高句麗도 한때 漢水 유역을 차지했고, 新羅도 漢水 유역을 차지한 적이 있다.
韓江은 글자도 틀리지만, 漢水가 될 수 없다. 이 경우 高句麗가 漢水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언제나 黃山江부터 건너야 한다는 모순에 빠진다. 高句麗는 黃山江(揚子江) 이남으로 일시 진출했을 뿐이다. 상강(湘江 :상장강)이나 주강(珠江 : 주장강)도 마찬가지 이유로 漢水가 될 수 없다. 회수(淮水)가 漢水라면, 新羅는 6세기 중반이 아니라, 건국 초부터 漢水를 차지했다. 黃河가 漢水였던 것이다.
사비성(泗沘城)은 百濟의 마지막 수도이다. 百濟가 마지막까지 상실하지 않은 땅에 있었다. 일식기록과 百濟長城 위치로 보면 현 北京이 泗沘城이고, 상건하(桑乾河)가 泗沘河이다. 낙화암(落花巖)은 현 北京 서쪽을 통과하는 강가에 있었다. 永定河 東岸에. 錦江과 白馬를 발해만에서 중국 남부까지 끝없이 밀어냈던 것이다.
唐이 黃河 중, 하류를 차지했다고 가정하면 高句麗와 百濟는 新羅와 전쟁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高句麗가 新羅를 위협할 수 없다는 모순에 빠진다. 어쨌거나 날조 역사책 속에서는 “新羅가 高句麗의 위협을 받아, 국가 존망의 위협에 처한 탓으로 唐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양국 사이에 다른 나라가 끼어 있었다면, 新羅는 高句麗의 침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唐은 黃河 중, 하류까지 진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隋와 唐은 高句麗를 공격할 때 매번 遼西를 거쳐 遼東으로 갔다. 遼水는 新羅와는 관련이 없는 지명이다. 隋나, 唐이 水軍을 동원하여 遼水 지역을 공격하지 않았다. 水軍은 다른 곳에 있는 비사성(卑沙城)을 공격했다.
협동작전을 구사하면 승리할 가능성이 한층 높다는 것은 전술의 기본. 隋, 唐의 군대가 수, 륙 협동작전을 펴지 못한 이유는 遼水가 내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고려해볼 지역은 高句麗의 보다 큰 최적 일식관측지다. 天山山脈과 그 주변이다. 中國 대륙의 서북부에 해당한다.
隋나 唐이 요수지역을 공격한 것은 그저 高句麗 땅이나 빼앗자는 것이 아니다. 隋에 있어서도, 唐에 있어서도 王까지 참가한 총력전이었다. 高句麗 황성에 이르는 길목이기 때문에 공격목표로 선정되었다. 옛날에는 한 나라의 통치자가 사는 皇城 내지 王城을 함락시키면, 그 나라는 정복되었다. 다시 말해 遼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高句麗의 平壤城이 위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遼水가 高句麗 영토 깊숙이 위치한 것은 아니다. 高句麗의 도읍이 타림분지(塔里木盆地)나 중가리아분지(準喝爾盆地)에 있으면, 우선 거리상으로도 百濟, 新羅와 전쟁을 하기 힘들다. 高句麗가 고작 사막과 고원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長城을 쌓았단 말인가. 高句麗의 도읍은 百濟(漢水=黃河 하류)와, 新羅의 도읍(현 武漢)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長城 이남에 高句麗 皇城이 있었다.
1차 高唐(?) 전쟁에서 李世民이 공격한 遼水는 내륙에 있었다. 安市城 전투에서 패하고 왔던 길을 차단 당하자, 李世民은 遼澤으로 퇴각했지만, 萬里長城으로 가지는 못했다. 平壤城이 만리장성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李世民이 만리장성으로 갔다면 唐(그리고 中國)은 몽고고원에 있었다는 소리밖에 안된다. 그러나 中國은 몽고고원에 시종일관 몽고가 있었다고 했고, 日本이 베낀 710 년에서 792 년 까지의 일식관측지가 시베리아 남부다. 大震國은 百濟 영토 절반과 高句麗 영토를 차지했다. 몽고고원은 몽고간섭기 이전까지 내내 우리나라 영토였다.
▲ 만리장성
高麗 말까지 長城 지역은 내내 우리나라 영토였다. 長城은 우리나라가 축조했다. 秦始王은 종이 위에서 長城을 쌓았던 것이다. 百濟는 386 년에 長城을 축조 했다지만, 386 년부터 축조했을 것이다. 百濟를 한반도의 소국으로 만들고 보니까, 한 해만 長城을 쌓아도 충분했다. 청목령(靑木嶺)에서 팔곤성(八坤城)과 黃海로 이어지는 長城을 쌓았다. 장성 위치로 보건대, 이 당시의 靑木嶺은 五臺山脈일 가능성이 극히 높다. 八坤城은 현 北京 이서나 이북에 있을 것이다. 黃海라는 것은 百濟를 한반도의 소국으로 축소 시켰기 때문에 맞춘 것이다. 長城은 발해만으로 이어진다. 高句麗長城은 百濟長城에 이어진 부분으로 오르도스사막(鄂爾多斯沙漠) 아래쪽에 쌓았다. 농경국가 百濟가 현 北京에서 오르도스사막을 건너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를 통해 高句麗의 平壤城을 침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柴達木盆地 위쪽을 지나는 長城은 高麗가 쌓았던 것이다.
현재 北京 아래는 파괴되어 일부만 남아 있는데, 과거 전쟁으로 파괴된 것이 아니고, 현대 중국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중국의 13 억 인구 중 9 억 명은 급성장 중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광대하고 궁핍한 외진 곳에 살고 있다. 長城의 대부분도 이러한 벽지에 있다.
이 때문에 長城 부근에 살면서도 그 건축물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는 농민들도 적지 않고 심지어 長城의 벽돌을 빼내 짐수레로 옮겨 집이나 양의 울타리, 돼지우리 등을 짓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 목격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와이어드뉴스에 따르면 北京에서 가까운 河北省 주민들이 돌이나 토대물을 가져가는 바람에 1km에 걸친 長城의 일부분이 1 년 만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처럼 관광객이 적은 곳은 자연 파괴나 주민의 약탈행위에 무방비로 놓여져 있는가 하면 관광객이 어느 정도 찾아오는 長城에서는 기념품으로 벽돌을 빼내가는 통에 몸살을 앓고 있다. 관광객의 이름을 조각해 주고 장성 벽돌을 3달러에 팔아먹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singular.do?Redirect=Log&logNo=140000062534 참조]
中國이 내세우는 萬里長城은 百濟長城과 高句麗長城 그리고 高麗長城을 합친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동북아의 소국으로 축소된 高句麗가 날조 萬里長城 아래로 밀어낸 지명들을 공략했다고(百濟가 지배한 吳, 越, 燕, 齊, 魯 땅의 지명들을 중국 동부로 밀어 냈지만, 한반도의 百濟가 중국 대륙을 침공할 수는 없다며 가능성을 전면 부인한다), 黃河 이북에 있었다고 날조된 유목민족들이 揚子江 이북에 나라를 세웠다며 長城이 쓸모없는 건축물이라고 단언하지만, 長城은 무수한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축조된 건축물이다.
長城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百濟人과 高句麗인이 죽어 갔기에 중국은 “秦나라 사람의 절반은 萬里長城 때문에 죽었다.” “隋 楊廣이 1 백만 명을 동원했는데 열흘 동안 60 만 명이나 죽었다.”고 날조할 수 있었다.
적을 막을 수 없다면, 애초에 長城을 쌓지도 않았다. 新羅로 부터의 침공을 막는 장성이 없었기에 新羅가 三國을 통일할 수 있었다. 長城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적 이었기에 高麗는 백년 가까이 蒙汗을 정복하지 못했다. 高麗의 장성 이북 공략을 막기 위해 蒙汗은 어부지리로 얻은 땅에 서둘러 東寧府와 雙城總管府에 8 참(站)까지 설치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百濟에 이어 高句麗, 新羅, 高麗가 줄줄이 長城 축조에 가세했다는 사실은 長城이 얼마나 효과적인 방어물 이었는지를 말해준다.
長城 축조는 공격에서 수비로 국방 정책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래서 長城이 적의 침입을 막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百濟도, 高句麗도 長城을 쌓은 직후부터 쇠퇴했다. 단 高麗는 예외로 長城을 축조한 직후 거란(契丹)을 中土로 내쫓았다.
검증해보자. 萬里長城을 여정(呂政 ; 진짜 아비가 밝혀진 이상, 생부의 성을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瀛政이 아니다)이 쌓았다면, 中國이 長城 아래쪽에 있었다는 소리다. 新羅는 長城을 뚫고 揚子江 유역에다 나라를 세운 셈이다.
高句麗, 百濟가 長城 위쪽에 있었다면, 新羅와 전투를 벌일 수 없다. 공세 때마다 長城을 부숴야 하니까, 中國은 長城 보수 하다가 세월 다 보내야 한다. 長城을 넘어 나라를 세운 新羅는 고립된 채, 漢나라, 魏, 蜀, 吳, 晉, 宋, 齊, 梁, 5胡 16國, 隋가 망하고 唐이 들어설 때까지도 존속했다는 것이다. 百濟가 韓半島의 小國 이라면, 吳, 越, 燕, 齊, 魯 땅을 차지 하자마자 중심지를 옮겼지, 韓半島에 남아 있지 않는다. 百濟에게는 더 넓은 땅을 차지 하겠다는 야심이 없었단 말인가.
통일국가도 아니고, 고작 戰國時代의 列國 중 하나인 燕이 발해만을 다 집어 삼켰다고 왜곡하는 중국이다. 燕이 발해만에다 長城까지 쌓았다고 우긴다. 당시 燕은 上國 朝鮮에 조공을 바치는 처지였다. 史記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도 나온다.
연(燕)나라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天子께 조공을 바치도록 했는데, 그 조공품이 성주(成周) 때와 같았다. 그리고 연(장공 : 莊公)에게 소공(召公)의 법도를 다시 세우고 잘 따르도록 하였다(使燕共貢天子如成周時職使燕復修召公之法 史記卷三十四 燕召公世家 第四).
“天子라는 호칭은 東夷(배달)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각했기 때문에 天子라고 한 것이다(天子之號稱始於東夷父天母地故曰天子).” 채옹(蔡邕 : 132~192)의 말처럼 이 당시, 天子란 朝鮮의 檀君 뿐이었다. 여불위(呂不韋 ; ?~BC 235)의 자식 때에 이르러 겨우 皇帝 칭호를 모방 했다고 날조한 중국이 아닌가. 무엇보다 燕이 발해만에 있었다면, 百濟가 발해만을 차지하고 건국 초 부터 일식관측할 수가 없다.
▲ 날조된 명의 강역도
http://cn.news.yahoo.com/041015/264/268mn.html 에서 발췌
燕나라 長城의 실체는 百濟長城이다. 百濟長城을 燕이 쌓았다면, 南으로 부터는 공격받지 않았던가. 春秋戰國 시대에는 中土의 소국들끼리 싸워댔다. 결국 燕은 秦에게 망했다. 明이 날조한 역사 속에서 燕은 揚子江 이남에 있었다. 중국 남부의 倭가 燕에 속한다고 山海經을 뜯어고치지 않았던가.
역사스페셜 6 권에 보면, “현재는 영성자 산성(英城子山城)을 안시성(安市城)이라 지목하고 있다. 英城子城 옆에는 李世民이 지시 했다는 흙산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흙산은 安市城 여부를 비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옛날 攻城戰에서 공격자는 으레 흙산을 쌓았던 것이다. 三國은 중국 하고만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三國 간에도 치열하게 싸웠다. 神市氏가 개천한 黑水와 白山 사이도 그냥 굴러 들어온 땅이 아니었다.
흙성(土城)이니, 암성(巖城)이니, 혼합성(混合城)이니 하는 것도 安市城을 비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성은 흙성 아니면, 巖城, 混合城 중의 하나였다. 山城이라고 해서 安市城이 될 수도 없다. 城은 산 아니면 평지에 세워졌다. 城에 문이 두 개 있다고 하여 安市城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원래 성은 보통 문을 두 개 만든다. 門이 하나면, 무너졌을 경우 방어자가 퇴각할 방법이 없고, 문이 여러 개면, 적의 공격을 받을 장소가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三國의 일식기록은 三國 이전부터 우리나라가 大帝國 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朝鮮의 일식기록에 의해 뒷받침된다. 三國과 朝鮮의 최적 일식관측지는 黃河 하류가 우리나라 영토임을 알려준다. 黃河 하류는 三國이 각축전을 벌인 접경지역이다. 따라서 殷나라는 黃河 하류에 없었다. 殷나라의 존재는 고고학적 증명이 없었던 것이다. 은허(殷墟 : 天文記錄으로 찾은 韓國史에서는 白岳山 阿斯達의 위치를 현 殷墟로 본다)라 하는 것은 朝鮮의 유적지이다.
어떤 수단으로든지, 영토를 차지하기 직전이나 직후에만 지명을 밀어낼 수 있다[淸이 땅도 차지하기 전에 날조지도(皇輿全覽圖)부터 만들었다는 것은 반드시 차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李氏朝鮮은 무능한 나라였다]. 中土의 지명은 李成桂가 朱元璋에게 우리나라 역사와 영토를 준 明 때 이르러서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역사왜곡의 일환으로 밀어냈던 것이다. 遼水를 끝없이 밀어낸 淸은 남아 있는 우리나라 지명마저 동으로, 남으로 밀어냈다.
中土가 워낙 작은 땅이라, 中土의 지명 만으로는 중국 대륙을 다 채울 수가 없었다. 해결책으로 中土에 섰다는 무수한 나라의 국명을 따서 산과 강 이름 등을 만들어 냈지만, 그것으로도 역부족이었다. 부득이 우리나라의 지명을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자를 同音異語로 바꾸었다. 百濟城, 白帝城이 그것이다. 이런 지명은 많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새로 만든 지명으로 대체되어 갔던 것이다.
여기서 혹자는 한자의 뜻이 다르다면서 그 변조 여부에 회의를 품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이는 한자의 음이 우리식으로 발음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자는 우리가 만들었으며 한자의 발음은 고려 말까지 중국 대륙의 표준말이였다. ☞ 고려시대 대륙의 표준말은 고려어였다 참조
역사 및 영토 훔치기의 목적에서 지명을 밀어내면서 고작 몇 개만 밀어내지 않는다. 모든 지명을 밀어내야 한다. 原地名을 남겨둔다는 것은 中國이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알려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명을 밀어내기 이전에는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가. 아니다. 날조 역사 속에 地名을 설명하는 단서를 남겨 놓았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 지명을 옮길 수는 있어도 지형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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