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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은 예맥족이 아니다

淸나라 皇帝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할 것이다.[說淸帝 談同祖 규원사화(揆園史話) 만설(漫說)] 淸나라 황제와 祖上이 같은 것은 韓民族이 아니라, 李成桂다. 李成桂가 女眞族이라는 증거는 넘쳐난다. 李成桂가 女眞族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女眞族이 절대 우리나라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韓民族이 아닌 자는 우리나라의 統治者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尊桓(檀)攘胡를 중국은 尊王攘夷로 바꿔치기 한다]韓民族 아닌 자가 우리나라의 統治者가 될 수 있었다면, 李成桂는 全州李氏인 척 하지 않았고, 북애(北厓)는 揆園史話를 써서 女眞族을 韓民族으로 둔갑 시키고자 혈안이 되지 않았다. 韓民族 아닌 자가 우리나라의 統治者가 될 수 있었다면, 무엇보다 우리나라 영..

고대사 2006.12.07

지명을 옮길 수는 있어도 지형은 바뀌지 않는다

동으로, 남으로 밀려난 지명들 천문관측은 우리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을 남겼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인 증거다. 그런데도 이 땅의 사학자들은 과학적 증거가 제시 되었음에도 기껏 자구해석에나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엉뚱한 데서 헤매고 있다. 절대적인 증거는 결연히 외면하고 언제든지 부정될 수 있는 문헌기록(文獻記錄)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요수(遼水)가 있는 땅은 百濟와 高句麗의 영토이고, 大震國의 영토다. 高麗도 遼西를 차지하고 있었다. 中國은 천문관측할 수 없는 땅이다. 중국 역사책에 기록된 천문관측 기록은 中國이 한 관측이 아니다. 中國 역사책에서 조차 우리나라 땅이라고 나와 있는 지역에서, 더구나 전쟁터에서 천문관측하는 사람은 없다. 중국 통일국가의 일식(日蝕:사서에서는 日食으로 표시되..

역사를 찾아서 2006.12.07

배달이 중국 대륙에 있었기에 조선과 삼국이 그곳에서 건국했다

배달이 중국 대륙에 있었기에 조선과 삼국이 그곳에서 건국했다 (1) 1) 자오지 한웅은 중국 대륙의 서토를 정복했다 천문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百濟와 新羅가 건국 초부터 日蝕을 발해만과 揚子江 유역에서 관측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百濟와 新羅가 어디서 옮겨온 나라가 아니라, 渤海灣과 揚子江 유역에서 건국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百濟가 갈라져 나온 高句麗 역시, 中國 대륙에서 건국할 수밖에 없었다. 高句麗의 초기 일식이 중가리아분지 및 大興安嶺山脈 이북 에서만 관측되는 것은 高句麗의 일식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三國史記에 기록된 高句麗 일식은 高句麗가 관측한 전체 일식의 1~2 %에 지나지 않는다. 遼水는 우리나라의 국경이 아니었다. 遼西까지도 우리나라 땅이었기 때문이다. 朝鮮時代..

고대사 2006.12.07

고려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를 뺀 동아시아다

고려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를 뺀 동아시아다 三國統一 직후 新羅가 百濟와 高句麗 땅을 전부 차지했다. 천하고 작은 생선 唐이 차지한 것이 아니다. 百濟, 高句麗 古土를 두고 唐과 新羅가 7 년 전쟁을 벌여 매소성(買肖城) 전투에서 唐을 완전히 몰아냈다(?). 그런데 역사스페셜 6 권에는 買肖城 전투를 이런 말로 시작한다. 현재 중국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중국의 역사 지도에는 한반도의 백제와 고구려 지역이 당나라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이 지역을 당의 지배 아래 두려고 백제의 옛 땅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당나라 영토로 보고 현재의 역사 지도를 그린 것이다. 만약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고려사 2006.12.07

504 년 사상 최대의 문명대전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주변의 미개국들과 변변찮은 전쟁을 가끔가다 했을 뿐이다. 慈烏支 한웅도 티벳고원 북부나 정복했고, 高麗도 거란(契丹)을 상대로 싸웠을 뿐이다. 그나마 격렬한 전쟁을 수행한 시기는 三國時代와 韓國戰爭이 전부다. 그 외 李氏朝鮮 때의 壬辰倭亂이 있을 뿐이다. 丙子胡亂, 丁卯胡亂은 전쟁을 가장한 연극에 불과했다. 高句麗, 百濟, 新羅 사이의 전쟁은 강물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수백만이 격돌할 정도로 치열했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우리민족의 국가였다. 百濟는 얼마나 강대했는가. 高句麗는 百濟軍에 대항하기 위해 거란(契丹), 靺鞨을 속민으로 삼아 이들을 百濟와의 전투에 투입(濊貊族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날조사라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해야 했을 정도이다. 百濟가 인구 밀집지역을 다 차지하자, 高句麗에..

삼국사 2006.12.07

광개토경대훈적비는 중국 대륙 정복을 기념해 세운 전승비다

1) 광개토경대훈적비는 중국 대륙 정복을 기념해 세운 전승비다 삼국지 위서 한전은 한과 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 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馬韓)·진한(辰韓)·변진(弁辰)이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褊頭)고, 왜와 가까운 지역(近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今辰韓人皆褊頭男女近倭亦文身......其瀆盧國與倭接界 三國志..

삼국사 2006.12.07

평로치청-신라, 제나라는-당에서건국

4) 평로치청은 신라에서, 제나라는 당에서 건국했다 ◀ 고구려의 축조물로 날조된 오녀산성 천문기록으로 살펴본 高句麗의 드넓은 강역만 해도 高句麗가 원래부터 대국에서 출발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高句麗의 수도라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나 환인시(桓因市)는 대체 무엇인가? 고작 五女山城, 桓因市가 高句麗의 영토라면 高句麗가 朝鮮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一粟이 滄海를 계승 했다고 우길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高句麗가 桓因市, 五女山城에서 출발한 나라라면, “옛 땅을 회복하자(復舊土, 多勿)”는 國是조차 내세울 수 없다. 桓因市, 五女山城 이전에는 無이기 때문에 멸망하자, 자멸하자는 소리 밖에는 안된다. 축소돼도 너무나 축소된 역사다. 高句麗를 대신해 천하의 중심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新羅는..

삼국사 2006.12.07

한문명최후의계승국 고려

. 한문명 최후의 계승국 고려 (4) 4) 쌍성총관부는 1356 년이 아니라, 1368 년에 격파했다 鴨綠江을 건너 威化島에 주둔했을 때 이유 없는 도망병이 길에 연이을 정도로 생겨났다? 西鴨綠江(遼水) 너머에 있던 高麗의 행정구역이 威化道였다. 威化島는 섬이 아니다. 遼西도 高麗 땅이라는 증거다. 遼水를 건넜는데도, 明은 가로막지 않았다. 明이 遼西에 없었기 때문이다. 遼東은 커녕 遼西조차 전진기지화 하지 못했다. 太白逸史도 恭愍帝가 여러 장수들을 보내 鴨綠江 이서의 八站을 공격하여 격파했다(諸將攻鴨綠江以西八站破之)고 했다. 鴨綠江을 건너 泰川(富江)이 비로 인해 강물이 불고 유속이 빨라 도강하다 빠져 죽는 자가 수 백 명이 발생 했다면서 이 당시 李成桂가 그 유명한 四不可論을 썼다고 날조했다. 李成桂..

조선사 2006.12.07

천년왕국 신라와 진국

천년왕국 신라(新羅) - 진국(辰國)의 비밀 1. 서문(序文) 대체로 한민족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신라라는 국가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 까닭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대장군 김유신이 당나라의 도움을 얻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한민족의 활동범위를 축소시켜 버렸고, 정작 신라 자신도 당나라에 굴복하는 형세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중대(中代) 신라의 이야기이고, 상대(上代) 신라까지 싸잡아 그렇게 비난할 수 있을까? 초기 신라와 관련해서 몇가지 의문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로 왜 나의 시조 할아버지이신 박혁거세 할아버지는 순장을 하지 않았는가하는 점이다. 당시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자들의 무덤에는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순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설상에 전하는 박혁거세 거..

삼국사 2006.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