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조선(朝鮮)과 사막(沙漠)에 대하여

대동이 2008. 4. 1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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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본인은 <조선은 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으며, 본시 조선이란 중조(中 朝)로써 中國이었으며, 대륙은 하나의 조선의 중조로써 이어져 왔다는 대륙 조선 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가끔 올라오는 글들에 대해 아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상대에 대해 거침없는 논설 아닌 논조로 반박하는 글들을 보아왔습니다. 대륙 조선 설에 대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가부를 떠나 상대방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이 아닌 감정적 대응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강역에 사막이 있었는가, 아니면 없었는가에 대한 인식은 사고의 차이일 뿐입니다. 즉 조선(통칭)이 영원한 반도라는 우리 안에 있었다면 사막이니 대막이니 대적이니 하는 글자들과는 전혀 무관할 것이나, 조선(통칭)의 영토가 반도라는 우리 안에 만 있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아니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들께서는 국가적으로, 정책적으로 공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교육을 받은 덕분으로 반도에 조선이 있었다고 배웠으며, 그 결과로 반도에 조선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며, 관심 있는 분들은 역사 해설서나 반도에 현존하는 현 기록을 보면서 조선이 반도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가 공교육이라는 미명아래 배워온 그 조선의 역사가 왜곡되었다거나 조선인이 아닌, 조선인을 통치,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분들에게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왕조실록이나 고려사, 고려사절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조선의 역사 기록에 근거하여 분명 조선은 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원문이나 원전과 그것을 번역 또는 해설한 역사책과 비교, 검토는 해 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조선이 수천 년 전부터 반도 내에서 시원, 발흥하여 영광과 좌절과 흥망성쇠를 이어왔다고 한다면 그 역사서의 원전이나 해설서는 반도의 지형, 지리와 산과 하천, 기후, 특산물, 백성의 호수와 인구수 및 변방과 이웃 국가와의 관계 등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 되어야 마땅합니다. 수천 년 변함없는 반도의 지형, 지리, 기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의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반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산과 하천, 지형, 지리 및 기후, 특산물, 백성들의 호구 등 수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으며, 일제 식민지 시절 반도를 통치한 일인들이 쓴 기록물에서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난해하며, 특히 대륙의 많은 역사서속에는 조선(통칭)이 반도에 있었다는 징후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원전을 보고 반도에 있었다고 해설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한편에서는 朝鮮 조정의 관리들은 지방의 관리를 역임했으며, 중앙조정의 대신으로써 조선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들의 기록물을 보면 반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지방과 기후와 산과 하천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반도만이 조선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조선 광해군 시절 명나라에서 여진을 정벌코자 조선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여 강홍립이하 조선의 군대가 출정합니다. 중간의 과정을 생략하고 전투 끝에 강홍립휘하의 좌영장이었던 김응하 장군이 장렬한 최후를 맞는데 <뼈를 사막(沙漠)에 묻었다>고 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할 일이 그리도 없어, 김응하 장군을 미화하려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막(沙漠)에 뼈를 묻고, 사막의 풀잎에 피를 묻혔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당시의 사막과 인접해 있던 中原 서북방지역의 건주위(建州衛)의 위치가 현 길림성 심양부근으로 인위적으로 지도상으로 이동되다보니 원전과는 전혀 다른 이런 엉뚱한 해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십시다. 현재의 하북성으로부터 동북삼성지역에는 옛 고조선으로부터 수천 년, 주 무왕으로부터 조선의 왕으로 봉 받았다는 기자, 그리고 삼한, 삼한내의 수백 개 국가, 그리고 천년사직을 영위한 고구려, 백제, 신라와 오랑캐라고 욕하던 수천 년 전의 숙신으로부터 읍루, 말갈, 실위, 해, 거란, 그리고, 발해, 또 요나라 또 금나라 및 청나라, 그리고 근대조선(구분 상)등 도대체 얼마나 많은 국가인지 조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종족과 국가들이 있었다고 하면서 1,900 년대엔 인구가 3백 만 명도 되지 않았다는 백과사전의 기록은 또 무엇이며, 그 수많은 국가들이 영위했다는 유물적 근거는 다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저 몇 개의 도시에 왕성 같지 않은 엉성한 유적 몇 개가 수천 년 헤아릴 수 없는 왕조들의 유적이라면, 수많은 왕조와 그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려 했던 중원과 그 주변지역, 그곳을 차지하려 시도 때도 없이 침구하여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는 중원의 수많은 왕조들의 유적들은 다 무엇인가?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논리적인 반박이 따라야 하는 것이지 평생을 반도 조선을 연구하고 식민지 시절 통치를 위한, 식민지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한 그 교과서 내용대로 조선의 역사를 해설하는 그 자들이 쓴 해설서만을 반론의 자료로 이용한다고 한다면 그 자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원전을 보면 반도의 장성을 “俗 號 萬里長城”이라 했는데 이것은 떠도는 소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은 “전하는 세습의 말대로 만리장성”이라 불렀다는 말이며, 대륙의 장성은 “稱 萬里長城”이라 했으니 만리장성이라 불렀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만리장성이라 부른 것이 아닌 후대에 그렇게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및 근대조선시대 조정의 대신으로써, 지방의 관리로써, 변방을 수비하고, 조정의 명으로 이민족을 토벌하던 장수 등..........이들이 틈틈이 기록하여 놓은 유고집에는 조선과 사막에 대한 수백 건의 기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정에서 평생을 바치고, 지방의 제후나 관리로써 누구보다도 조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바보천치가 아닌 다음에야 수천 리 머나먼 곳에 보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사막이니 대막이니 대적이니 하는 문구를 사용해 조선과 연계시켜 기록한 것을 어찌 생각해야 하며, 이들이 대국(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이 극치에 달해 평야지대를 대적지대라 호칭하고, 초목이 무성한 곳을 사막지대라고 호칭하겠습니까.

역사서(원전)를 탐독하다보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특별한 지역에 대한 명칭이 계속 이어져 오기 때문입니다. 대적(大 磧)지대는 청해 성 북방지역의 삭막지대를, 적(磧)지대는 청해 성과 甘숙성을 포함한 일부 지방을, 북 막이니 삭막지대, 사막지대는 외몽고와 新강성 천산의 북쪽지방 즉 북해와 한해지방을, 막북지방은 외몽고 및 新강성 천산이북을, 막 남 지방은 현재의 내몽고 황하 남쪽지방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기로부터 시작되는 25 사를 보면 공식 아닌 공식처럼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 곳에나 사막이니 대막이니 하는 글자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고려 또는 조선의 유학자들의 지식수준이 현재의 여러분보다 못해서 아무 곳에나 大漠, 沙漠, 大 磧, 磧이라는 글자를 사용합니까. 몇 분의 글을 보니 꼭 수백 년 전의 조선시대를 겪어 본 것처럼 말을 하시는데 이건 아닙니다. 대륙 사나 조선 사나 기록은 똑 같은 것입니다. 조선의 강역 안에 대막지대가 있으니 대막이라는 글을 쓰는 것이고, 조선의 강역에 사막이 있으니 사막이라는 글자를 쓰는 것이지 평야지대나 동북삼성지대처럼 초목이 울창한 지역을 北 漠이라 했다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현재의 사막지대는 급속한 기후의 변화로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과학 뉴스입니다. 그렇다면 일천 년 전이나 몇 백 년 전의 사막지대는 현재의 사막지대와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현재를 보고 수천 년 전이나 수백 년 전의 일을 이해하려 한다면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될 것입니다.

조선의 강역을 반도에 강제로 우구려, 찌그려 넣지 맙시다.

아래의 몇 구절은 조선의 사막과 연계된 것들을 골라 놓은 것인데(민족문화추진회의 번역본과 원문입니다) 전부를 올린 다는 것은 무리기에 몇 개만을 고른 것입니다. 부탁하고픈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보라는 것입니다. 뼈와 살을 보태면 기록이 아니라 소설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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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곡 선 생 집 (谿 谷 先 生 集) 제30권. 칠 언 율(七 言 律) 1백 60수(首)

김 장군 “응 하”를 애도한 시 두 수[哀 金 將 軍 應 河 二 首]


태양도 빛을 잃은 ♠ 사막(대막)의 전진(戰 塵) / 大 漠 煙 塵 白 日 黃
기진맥진 싸우다가 장군이 전사하였도다. / 將 軍 力 盡 死 沙 場
충성스런 그 혼백 원 학과 같이 할 리 있나 / 忠 魂 定 不 群 猿 鶴
무서운 귀신 되어 견양을 죽이리라 / 厲 鬼 猶 應 殺 犬 羊
사해의 영웅들 모두 눈물 뿌리고 / 四 海 英 雄 皆 涕 淚
구중궁궐 영광스런 포장(褒 章)도 있었어라 / 九 重 褒 贈 有 輝 光
강변을 배회하는 상심한 초객 / 傷 心 楚 客 江 潭 上
이소의 국상 편 읊조리며 애도하네. / 漫 把 離 騷 吊 國 殤

이제 막 펼치려다 ♠ 사막(대막)에 묻힌 장한 그 뜻 / 壯 志 初 將 大 漠 呑
사수보단 그래도 임금의 은혜 보답했네. / 死 綏 差 足 答 君 恩
고군분투 끝에 함몰된 군대 / 鼓 衰 矢 盡 三 軍 沒
비 오고 음침한 날 원귀(寃鬼)들의 호곡(號 哭) 소리 / 雨 濕 天 陰 萬 鬼 寃
듣자니 이능도 무릎을 꿇었다 하는데 / 聞 道 李 陵 猶 屈 膝
가련타 선진처럼 머리라도 돌아오지 / 可 憐 先 軫 未 歸 元
우리 조정 이제 와선 한스럽게들 여긴다오. / 如 今 廟 算 多 遺 恨
장군 위해 일찌감치 착 문을 해 주지 못한 것을 / 不 爲 將 軍 早 鑿 門

♠ <遼 東 伯 金 應 河>...............조선 광해군 때의 무장이다. 광해군 10년(1618) 건주위(建州衛)를 치기 위하여 명나라에서 원병 요청이 있자, 부원수 김경서(金 景 瑞)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듬해 도원수 강홍립( 姜 弘 立)을 따라 좌 영장(左 營 將)이 되어 압록강을 건넜다. 우 모 령(牛 毛 嶺)에서 분투 끝에 절사(節 死)했다. 광해군 12년에 명 신종(明 神宗)에 의해 요동 백(遼 東 伯)으로 추봉(追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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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곡 만 필 (谿 谷 漫 筆) 제1권 [만 필 (漫 筆)]


[광야에도 신기루가 있다[廣 野 亦 有 蜃 樓]]


세상 사람들은 단지 바다 위에만 신기루(蜃氣樓)가 있는 줄 알지, 넓은 들판 가운데에도 신기루 현상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 무변(武弁) 출신인 어떤 고관(高官) 한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젊었을 적에 육진(六鎭)의 변방 고을을 지키고 있었는데, 언젠가 오랑캐 지역을 바라다보노라니, 아지랑이와 같은 기운이 자욱하게 일어나는 ♠광막한 사막 한가운데에, 그야말로 바다 위에 나타난다는 신기루처럼 누대(樓臺)와 궁실(宮室) 모습이 이따금씩 보이곤 하였다.” 하였는데, 내가 그때 듣고서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뒤에 《사기(史記)》 천관서(天 官 書)를 읽어 보니, “바닷가에서 보면 신기(蜃 氣)가 누대(樓臺)의 모양을 만들고, 광야 역시 그곳의 기운이 궁궐의 형상을 이루어 낸다.” 하였으므로, 그의 말이 허망한 것이 아닌 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대체로 우리나라는 지역이 협소하여 광야라고 할 것이 없는 반면에, 오랑캐 지역은 광막한 들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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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8상 갑신 고려 숙종(肅宗) 9년부터, 병인 고려 인종(仁宗) 24년까지 43년간

기축 년 예종 4년(송 휘종 대관 3, 요 천조제 건 통 9, 1109)

최씨(崔 氏)는 이렇게 적었다. “변방을 개척한 실수는 숙종(肅宗)에게서 시작되어 예종(睿宗) 때에 이루어졌는데, 재물을 한없이 낭비하고, 죄 없는 백성을 사역(使役)하여 ♠북쪽 사막(沙漠)을 정복한 것은 다만 우리나라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오랑캐의 분심만 돋우어 놓은 것뿐이니, 얻은 것이 어찌 잃은 것을 보상(報償)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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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 경 당 일 사 (夢 經 堂 日 史) 제1편

마 자 인 정 기(馬 訾 軔 征 紀) ○ 을묘 년(1855, 철종 6) 11월[1일-16일] 14일(계유)

大릉하에서부터 山해관까지 몇 백 리가 모두가 숭정(崇禎) 때의 전쟁하던 곳이므로 즐비한 무덤이 있다. ♠이 사막 가운데 있는 원숭이나 학들도 여태껏 지사(志士)들의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 것을 금치 못하게 한다. 저녁에 寧 遠 城에 도착해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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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금 쇄 술(紫 禁 瑣 述) ○ 을묘 년(1855, 철종 6) 12월[14일-22일] 22일(경술)

연 경(燕 京)은 북방 한 모퉁이 땅에 불과하고, 산천은 醫무려산과 발해(渤海)로서 역시 지류(支流)와 여맥(餘脈)일 뿐이며, 인물로 말하면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 같은 성군(聖君)과 고(皐)ㆍ기(蘷)ㆍ직(稷)ㆍ설(契) 같은 현신(賢臣)이 있었지만 한번 흑 취 모(黑 毳 帽)와 마제 수(馬 蹄 袖)를 착용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더 볼 것이 없네. ♠ 황 막(荒 邈)한 사막, 흰 자갈뿐인 천 리 광야에 높직이 벽돌담을 쌓아서 빙 둘러 놓고는 성첩(城堞)이라 하고, 높다랗게 정각(亭閣)ㆍ전우(殿宇)를 세워 조각과 단청을 하여 궁궐이라 하며, 관리(官吏)는 높은 자인지 낮은 자인지 등위를 분변하기 어렵고, 민간의 아이와 어른은 관동(冠童)을 분별할 수 없으며, 음식은 반드시 돼지기름으로 조미를 하므로 냄새가 고약해서 먹을 수 없고 의복은 반드시 털 갖옷으로 입은 모양이 흉해서 볼 수가 없네. 혼사와 상사에 풍악을 사용하니 선왕(先王)의 예는 쓸어버린 듯 남은 것이 없고 알아들기 어려운 웅얼거리는 말소리는 오랑캐 풍속이 천성에 박혔기 때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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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 선생 집 제8권. 시(詩)○칠언고시(七 言 古 詩) 25수

김응하를 애도하다 [悼 金 應 河]

김 장군이여 / 金 將 軍
살아서는 임금 얼굴도 몰랐고 / 生 不 識 君 面
벼슬도 요직에 오르지 못했으나 / 官 不 登 節 樞
적군이 왔을 땐 만인의 적수가 되었고 / 賊 至 爲 萬 人 敵
아군이 패해서는 장렬한 장부가 되어서 / 兵 敗 爲 烈 丈 夫
노추는 죽어라 소리만 지를 뿐 기가 꺾이었고 / 虜 酋 死 咋 氣 畜 縮
한의 기병은 손뼉 치며 웅장한 계책 더하였네. / 漢 騎 抵 掌 增 壯 圖
♠뼈는 사막에 버려지고 피는 풀을 적셨으며 / 骨 委 沙 場 血 漬 草
♠넋은 무극에 노닐면서 북해를 진압하나니 / 魂 遊 無 極 鎭 禺 强
김 장군은 참다운 장군이라 / 金 將 軍 眞 將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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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 선생 집 제9권. 시(詩) ○오언율시(五言律詩) 1백 23수

창기에게 부치다 [寄 昌 期]


봄이 오매 시름 정히 괴로운데 / 春 來 愁 正 苦
편지 이르니 정신이 배나 아득하네. / 書 到 倍 茫 然
세상에 이바지함이 뭐가 좋으랴 / 供 世 有 何 好
살기 괴로움만 스스로 애처로울 뿐 / 勞 生 空 自 憐
♠철관은 북쪽 사막으로 통하고 / 鐵 關 通 朔 漠 ◀◀
압록강은 유연 지방과 연접했나니 / 鴨 水 接 幽 燕
아무리 매화 소식을 전하려 한들 / 縱 寄 梅 花 信
하도 멀어 어떻게 전할 수 있으랴 / 悠 (悠) 那 可 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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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 선생集 제12권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99수

동고의 永평부운을 차하다 [次 東 皐 永 平 府 韻]


고향땅을 떠난 뒤로 가마아득한 세월 / 鄕 原 別 後 歲 年 遙
힘든 노역 지루하게 몇날 며칠 넘겼던가. / 倦 役 支 離 幾 暮 朝
더딘 해 들녘에는 아지랑이 피어나고 / 遲 日 郊 坰 團 野 馬
화한 바람에 안개는 봄 초목을 덮었구나. / 暖 風 烟 靄 冪 春 條
요동 변방 끝이 없는 차가운 ♠사막 실컷 보고 / 厭 看 遼 塞 聯 寒 磧
또 다시 난 하 향해 끊긴 다리 건너가네. / 又 向 灤 河 渡 斷 橋
예로부터 ♠노 룡 사막 험난하다 불렸나니 / 從 古 盧 龍 稱 絶 漠
나부끼는 깃발인가 나그네 마음 흔들려 / 覉 膓 懸 斾 正 搖 (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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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 선생集 제13권.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110수

용만의 객중에 읊다 [龍 灣 客 詠]


구월 구일 요하에 갈대 잎 가지런한데. / 九 日 遼 河 蘆 葉 齊
돌아갈 시기 또 다시 ♠패관 서쪽에 묶였네. / 歸 期 又 滯 浿 關 西
살랑살랑 모래 바람 변방 소리 어울리고 / 寒 沙 淅 (淅) 邊 聲 合
어둑어둑 짧은 해에 기러기 내려오누나. / 短 日 荒 (荒) 鴈 翅 低
고국의 친척과 벗들 서신이 끊길 듯하고 / 故 國 親 朋 書 欲 絶
타향의 꿈속에는 고향길이 아련하네. / 異 鄕 魂 夢 路 還 迷
시름겨워 다시금 초루 올라 바라보니 / 愁 來 更 上 譙 樓 望
♠대막의 뜬구름에 저절로 서글퍼지네. / 大 漠 浮 雲 易 慘 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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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선생集 제15권.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111수

朝천록의 뒷장에 적다 [題 朝 天 錄 後] 進 退 格이다. 갑오년에는 서장관으로, 기유 년에는 상사가 되어 중국에 두 번째 사신으로 갔는데 그동안이 15년이므로 시에서 언급한 것이다


십오 년 전 지난 일 하염없이 흘렀는데 / 悠 (悠) 十 五 年 前 事
삼천리 밖 여행길 까마득히 멀 구나. / 渺 (渺) 三 千 里 外 行
흰머리 오늘 모습 깜짝깜짝 놀라고 / 繁 鬢 每 驚 今 日 白
늙은 나이 옛 젊음 만회하기 어려워라 / 頹 齡 難 挽 舊 時 靑
♠요동 사막 먼 길은 마음 매우 두렵고 / 脩 途 遼 磧 心 長 戒
오만 땅의 외론 베개 꿈이 아니 이뤄졌네. / 孤 枕 烏 蠻 夢 不 成
덧없는 세상 반평생 외물에만 사역될 뿐 / 浮 世 半 生 空 物 役
각건 차림 어느 제나 산중 집에 돌아갈꼬. / 角 巾 何 日 返 山 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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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선생集 제49권

산중독언(山中獨言)


이공(李 公) 성량(成 梁)은 황조(皇朝 명(明) 나라)의 명장(名將)이었다. ♠ 철령위(鐵嶺衛) 출신으로서 외따로 떨어진 ♠사막 가운데에서 일어나 능히 공을 세워 삼진(三 鎭)과 유주(幽 州)ㆍ계주(薊 州)의 병권(兵權)을 장악하였으며 오등(五等 남작(男爵))으로서 봉토(封 土)를 나누어 받고 나이 80여 세 때 그 직위를 간직한 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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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호 (俗 號) 만리장성

➡ 장성(長城) : 고려 덕종 2년에 평장사(平章事) 유소에게 명하여 북쪽 변경의 관방(關防)을 창설하였는데, 주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옛 국내성의 경계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威 遠ㆍ興 化ㆍ靜 州ㆍ寧 海ㆍ寧 德ㆍ寧 朔ㆍ雲 州ㆍ安 水ㆍ淸 塞ㆍ平 虜ㆍ寧 遠ㆍ定 戎ㆍ孟 州ㆍ朔 州 등 14성에 걸치고, 요덕(耀 德)ㆍ정변(靜 邊)ㆍ화주(和 州) 등 3성에 다 달아 동쪽으로 바다에 가까이 붙었다. 연무(延袤 연은 동서, 무는 남북, 즉 넓이, 넓음, 길게 뻗음의 뜻) 1천여 리를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25척씩이며, 속칭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한다. 주의 동쪽 玉 江 里의 북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3백 2보(步)이고, 구룡연의 북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4백 11보이다. 고 동보(庫 洞 堡)ㆍ三 岐 堡 주의 북쪽에 있다. 검 동보(黔 同 堡) 곧 검 동 도이다. 암 림보(暗 林 堡)ㆍ미륵당보(彌勒 堂 堡) 주의 서남쪽 40 리에 있다.

○ 고려 고종 4년에 금(金)의 來 遠 城이 이첩(移牒)하여 이르기를, “반적(叛 賊) 만 노(萬 奴)가 본래 거란과 한 마음이라 만약 군사를 아울러 귀국(貴國)을 내침한다면 그 걱정이 적지 않으며, 또한 귀국에게 격퇴당하면 반드시 우리나라로 달아나 돌아올 것이니, 실지로 귀국을 침범하거든 꼭 급히 알려 주시면 우리가 곧 출군(出軍) 엄호(掩護)하여 공격하겠습니다.” 하니, 영덕성이 회첩(回 牒)하여 이르기를, “거란兵이 일찍이 우리나라 지경에 들어왔다가 여러 번 좌절되었는데, 만약 만 노가 이어서 이른다면 우리 군력(軍力)이 나뉠까 두렵고, 거란의 구적(寇賊)이 다시 세력을 떨치어 상국(上國)을 침범한다면 일이 잠깐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라 알리기에 미칠 수 없을 것이니, 청하건대 미리 병마를 베풀어서 만 노를 막아 우리 읍에 이르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 읍이 또한 거란 병을 막는다면 상국에 이르지 못하게 할 수 있으리다.” 하였다. 古 寧 朔 鎭 주의 동쪽 1백 20리에 있다. 고려 문종이 安 義 鎭의 진자농장(榛子農場)에 성을 쌓고 寧 삭 진이라 하여 변방 적의 요충(要衝)을 진압하였다. 성의 둘레가 7천 7백 60척이었는데, 지금은 토성의 남긴 자리만 있으며, 안에는 3개의 우물이 있다. 古 定 戎 鎭 주의 동쪽 80 리에 있다. 유소가 또한 興화진 북쪽에 있는 옛 석벽(石壁)을 수리하여 定융진을 두고 永 平 城의 백성을 옮겨서 채웠으며, 토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7천 7백 92척이고 안에는 3개의 우물이 있으며, 속칭 臨 川 城이다. 古 延 平 城 주의 동남쪽 80 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천 8백 87척이고, 안에는 13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古 延 州 城 주의 동쪽 28 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백 80척이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玉 江 城 옥 강의 동쪽 기슭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백 20척이고, 사면이 절벽인 가운데에 못이 있다. ♠♠♠전 문 령 고성(箭 門 嶺 古 城) 주의 동남쪽 20 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1천 6백 10척이고, 안에는 62개의 우물이 있다. 가 미 성(嘉 彌 城) 주의 북쪽 1백 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천 3백 척이고, 우물이나 샘이 없다.

➡ 장성(長城) : 고려 덕종 2년에 평장사(平章事) 유소에게 명하여 북쪽 변경의 관방(關防)을 창설하였는데, 주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옛 국내성의 경계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威 遠ㆍ興 化ㆍ靜 州ㆍ寧 海ㆍ寧 德ㆍ寧 朔ㆍ雲 州ㆍ安 水ㆍ淸 塞ㆍ平 虜ㆍ寧 遠ㆍ定 戎ㆍ孟 州ㆍ朔 州 등 14성에 걸치고, 요덕(耀 德)ㆍ정변(靜 邊)ㆍ화주(和 州) 등 3성에 다 달아 동쪽으로 바다에 가까이 붙었다. 연무(延袤 연은 동서, 무는 남북, 즉 넓이, 넓음, 길게 뻗음의 뜻) 1천여 리를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25척씩이며, 속칭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한다. 주의 동쪽 玉 江 里의 북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3백 2보(步)이고, 구룡연의 북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4백 11보이다. 고 동보(庫 洞 堡)ㆍ三 岐 堡 주의 북쪽에 있다. 검 동보(黔 同 堡) 곧 검 동 도이다. 암 림보(暗 林 堡)ㆍ미륵당보(彌勒 堂 堡) 주의 서남쪽 40 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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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의 장성 ; 號 만리장성 : 처음에는 장성이었을 뿐이나 후대에 만리장성이라 칭

♠ 조선의 장성 : 俗 號 만리장성 : 처음에는 장성이었을 뿐이나 후대에 만리장성이라 칭

차이는 무엇인가? 기록의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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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표 한곳의 전문령(箭 門 嶺)은 아래 계산기정의 시에 나오는 전문영(箭 門 營)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는 전자는 嶺 즉 산 고개 또는 연이어져 있는 산을, 후자는 營은 진지나 성채등을 나타내는데 아래의 글을 보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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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薊 山 紀 程 제1권. 출성(出城) ○ 계해 년(1803, 순조 3) 11월[1일-22일] 12일(계 묘)

맑음. 의주(義州) 50리를 가서 소 관참(所 串 站)에서 점심을 먹고 또 30 리를 가서 龍 灣 館에 묵었다.

전 문 영(箭 門 營) ; 만부(灣 府)에 닿기 전 10 리 지점에서 전문(箭 門)에 올라가 ♠♠♠ 서쪽을 바라보니 압록강 밖의 산세(山勢)가 유달리 웅장하고 쓸쓸한 기운이 호흡에까지 통할 정도다. 산 이름은 금석(金石)이었다.

미계의 건널목을 지나서 / 渡 過 尾 溪 口
전문 마루에 올라가니 / 行 上 箭 門 顚
조선 나라 땅은 다 끝나고 / 地 盡 朝 鮮 國
사막의 하늘 산이 웅장하다 / 山 雄 大 漠 天
고향 소식 꿈속 같은데 / 鄕 音 如 夢 裡
나그네 기분 바람 앞에 선 듯 하 이, / 客 意 忽 風 前
빠른 말을 멀리 몰고 가지만 / 快 馬 長 驅 去
앞길은 또 몇 천 리 인고 / 程 道 又 幾 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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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많은 기록이 있으나 이곳에 한꺼번에 올린다는 것은 무리이므로 간단한 몇 가지만을 설명 없이 참고로 올리는 것이니 양해바랍니다.

조선과 관계되는 수많은 의문점은 반도라는 한정된 지역에서는 이해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유고집이나 조선의 역사서를 해설하시는 분들이 즐겨 찾으시는 문구가 있는데, <알 수 없다. 미상. 상세하지 않다. 비유한 것이다.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병도의 조선사에 의하면,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사기에 의하면...........>이러한 것들입니다.

아무쪼록 넓은 사고를 갖고, 주장과 반론은 논리적으로, 미사려구를 사용해 조선사를 축소, 재생산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