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 32

고구려와돌궐의10년간전쟁

진흥왕 순수비. 이것은 사학자들이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역시 기존의 역사와는 달리 해석됩니다. 진흥왕은 고구려와 돌궐이 10년간에 사활(死活)을 건 대전쟁(大戰爭)을 벌이는 동안 고구려의 남쪽 수비군이 전선으로 투입된 시기를 이용해 고구려의 남쪽 지방을 차지한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은 가르치지 않고, 단지 신라 진흥왕의 적극적인 북진정책과 고구려가 북방의 전쟁으로 남쪽 지방의 군대를 옮겼다고만 하여 역사를 은폐하고 있습니다. 돌궐은 어떤 나라입니까? 이들은 투르크(터어키족, Turk)으로 지금의 서남아시아지방에 자리잡은 민족입니다. 그 민족이 세운 나라로 유명한 나라가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등입니다. 이 중에서 셀주크 투르크는 십자군운동의 원인이..

삼국사 2007.01.30

신라는 고시씨의 후예다

신라는 고시씨의 후예다 番朝鮮이 岷江(1 차 西鴨綠江) 以西에 있었기 때문에 武漢 일대에서 건국한 新羅가 番韓의 후예라는 舊唐書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朝鮮(辰韓, 眞朝鮮)이 大夫餘, 北夫餘, 高句麗로 이어졌는데, 또 辰韓이 등장하고 斯盧國이 건국됐다고 한다. 이 辰韓은 眞朝鮮의 辰韓이 아니다. 後三韓의 辰韓도 아니다. 後三韓은 箕準이 衛滿에게 속아 떠난 뒤, 五加의 무리들이 大將軍 卓을 받들고 산을 넘어 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蓋馬國(熊心國)은 北蓋馬大嶺 즉 陰山山脈의 북쪽에 있으며 句茶國(瀆盧國)은 北蓋馬大嶺의 서쪽에 있는 나라다. 月支國은 句茶國의 북쪽 500 리에 있다. 後三韓의 弁韓, 辰韓은 “馬韓의 다스림을 따르고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馬韓政令世世不叛 北夫餘紀)"던 반면, 新羅..

삼국사 2006.12.07

백제는 동아시아 제1의 대제국이었다

우리의 자부심 고구려로 알고 있던 나라는 백제였다 우리나라 유적 발굴은 三國이 어디에 위치했다는 날조 역사책에 근거한다. 高句麗 유적을 찾는 데는 新羅 遺蹟과 비교하고, 百濟 遺蹟과 비슷하면 高句麗 遺蹟으로 보는 식이다. 平壤城 유적이라는 大同江과 普通江이 만나는 濕地帶에서 통나무가 대량으로 발견 되었다. 수분을 일정하게 유지해서 부분 침하를 방지하기 위한 공법이라고 한다. 百濟 泗沘城 이라는 곳에서도 통나무와 나뭇가지들이 발굴됐다. ▲ 보통문 : 평양성 중성의 서문으로 보통강 기슭 천리마거리 어구에 있다. 6 세기 중엽에 세워졌고, 그후 고려 이씨조선에 걸쳐 여러 차례 고쳐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해방 후 본래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55 m정도 옮겨 지은 것이라 한다. 중국 대륙에 이어 韓半島까지..

삼국사 2006.12.07

504 년 사상 최대의 문명대전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주변의 미개국들과 변변찮은 전쟁을 가끔가다 했을 뿐이다. 慈烏支 한웅도 티벳고원 북부나 정복했고, 高麗도 거란(契丹)을 상대로 싸웠을 뿐이다. 그나마 격렬한 전쟁을 수행한 시기는 三國時代와 韓國戰爭이 전부다. 그 외 李氏朝鮮 때의 壬辰倭亂이 있을 뿐이다. 丙子胡亂, 丁卯胡亂은 전쟁을 가장한 연극에 불과했다. 高句麗, 百濟, 新羅 사이의 전쟁은 강물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수백만이 격돌할 정도로 치열했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우리민족의 국가였다. 百濟는 얼마나 강대했는가. 高句麗는 百濟軍에 대항하기 위해 거란(契丹), 靺鞨을 속민으로 삼아 이들을 百濟와의 전투에 투입(濊貊族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날조사라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해야 했을 정도이다. 百濟가 인구 밀집지역을 다 차지하자, 高句麗에..

삼국사 2006.12.07

광개토경대훈적비는 중국 대륙 정복을 기념해 세운 전승비다

1) 광개토경대훈적비는 중국 대륙 정복을 기념해 세운 전승비다 삼국지 위서 한전은 한과 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 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馬韓)·진한(辰韓)·변진(弁辰)이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褊頭)고, 왜와 가까운 지역(近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今辰韓人皆褊頭男女近倭亦文身......其瀆盧國與倭接界 三國志..

삼국사 2006.12.07

평로치청-신라, 제나라는-당에서건국

4) 평로치청은 신라에서, 제나라는 당에서 건국했다 ◀ 고구려의 축조물로 날조된 오녀산성 천문기록으로 살펴본 高句麗의 드넓은 강역만 해도 高句麗가 원래부터 대국에서 출발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高句麗의 수도라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나 환인시(桓因市)는 대체 무엇인가? 고작 五女山城, 桓因市가 高句麗의 영토라면 高句麗가 朝鮮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一粟이 滄海를 계승 했다고 우길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高句麗가 桓因市, 五女山城에서 출발한 나라라면, “옛 땅을 회복하자(復舊土, 多勿)”는 國是조차 내세울 수 없다. 桓因市, 五女山城 이전에는 無이기 때문에 멸망하자, 자멸하자는 소리 밖에는 안된다. 축소돼도 너무나 축소된 역사다. 高句麗를 대신해 천하의 중심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新羅는..

삼국사 2006.12.07

천년왕국 신라와 진국

천년왕국 신라(新羅) - 진국(辰國)의 비밀 1. 서문(序文) 대체로 한민족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신라라는 국가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 까닭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대장군 김유신이 당나라의 도움을 얻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한민족의 활동범위를 축소시켜 버렸고, 정작 신라 자신도 당나라에 굴복하는 형세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중대(中代) 신라의 이야기이고, 상대(上代) 신라까지 싸잡아 그렇게 비난할 수 있을까? 초기 신라와 관련해서 몇가지 의문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로 왜 나의 시조 할아버지이신 박혁거세 할아버지는 순장을 하지 않았는가하는 점이다. 당시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자들의 무덤에는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순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설상에 전하는 박혁거세 거..

삼국사 2006.11.17

한민족사의 고리와 부여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고리, 부여(夫餘)사 이제 구체적인 역사 내용을 논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부여사의 왜곡으로 인해 드라마 의 등장인물간의 인척관계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다 |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高辰)의 손자인 불리지(일명 고모수高慕漱)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유화부인과 해모수가 부부인연을 맺은 것으로 설정하여, 유화부인이 시증조할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이런 역사왜곡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부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 | 드라마에서는 주몽이 태어난 나라를 부여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흥망사를 살펴보면, (원시)부여, 대부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서부여..

삼국사 2006.11.07

백제의대륙에근거

북사(北史) 권94 열전82 백제편과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편의 백제조에 "나라안에 8대 성씨족이 있는데, 사(沙)씨, 연(燕)씨, 리(칼 刀가 셋인 글자, 또는 협 協)씨, 해(解)씨, 진(眞)씨, 국(國)씨, 목(木)씨, 묘(苗)씨 이다." 라고 되어 있으며, 백제의 왕족의 성은 부여(夫餘)씨라 했다. 중국성씨사전에는 부여(夫餘)씨와 복(福)씨 골(骨)씨 등도 8대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백제가 분명한 우리의 역사상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들 8대 성씨가 백제 멸망과 함께 모두 죽지 않은 이상 현재에도 그 후손이 남아 있어야만 하는데 2000년도에 발간된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국(國)씨가 2,182명으로 성씨 순위 154위이며 연(燕)씨는 3,549명으로 138위, 진(眞)씨는 1,579..

삼국사 2006.07.14

동서신라에 대한

동신라는 한반도내에 있던 고구려에 독립한 신라이구요.서신라(대륙:강회)신라는 중국 양자강유역등 우리가 알던 신라방등은 결과론적으로당시중국의 무역 중심이 신라인 이었다는것이고 이는 자국의 무역이권이 신라인에 좌지우지 되었단것은 최소한 신라의 영역권 이었거나 또는 대륙신라의 증거라 할수있고신라 최치원이 당에서 토황소격문을 썼고, 장보고가 절과 상권 장악을 한다는게 말이 쉽지고구려와 이권과 지역 쟁패르르 하던거로 봐서 신라 또는 신라인에 그렇던 상권을 줄수 있었겠는가?또한 청해진의 규모나 상황으로 봐서 산동반도 일 확률이 높고, 당시 삼국의 규모(기록으로 백제,고구려의 군사규모나 인구수 대비 ) 조선 시대 한반도 인구수 보다 더컸다는 사실과 경주의 화산폭발(토함산)로 인한 재난 정도의 유추해보면 대륙신라의 가..

삼국사 2005.11.30